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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조선 왕조 최후의 황제인 순종 이척(李拓)은 1909년 1월 10일~12일(원문에는 '등극한 1907년(융희 원년) 10월'로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에 소위 경부·경의선 철도부설 시찰이라는 명목 아래 마산포를 순행하였다.

 

이 순행을 축하하는 뜻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가 마산만에 투묘(投錨)하고 101발의 축포를 터뜨렸다.

 

한편 마산 이사청(현 경남대 평생교육원) 정문과 숙사(宿舍)인 이사관사(부윤관사-현 마산종합복지관) 앞 그리고 경교(京橋, 제일각 앞)와 창원교(전 럭키회관 앞)에는 한제폐하(韓帝陛下)의 어남순(御南巡) 환영대송문(歡迎大松門)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수행원은 통감 이등박문, 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등 외교 문무백관이었다.

 

숙소는 삼증(三增) 이사관(마산부 초대 부윤 1914-1919) 관사였는데 숙사 근방은 한황(韓皇) 신변관계로 관계려니와 이등박문의 신변에 만약의 경우를 고려해서 한일 정·사복 경관은 물론 일인 병대와 헌병 등 3, 4중의 삼엄한 경계망은 수하(誰何)도 얼씬 못했다.

 

익일은 이사철 2층에서 잠시 휴게하셨다.

 

후일 마산부 회의실을 사용한 기념으로 1936년 마산부청 이전 때까지 그 자리에 옥좌라 써 붙이고 일반에게 조심을 환기시켰다.

 

이어 구마산으로 납시었다.

 

어가가 없어 인력거를 임시로 이등과 이완용 그리고 한국 각료 등만 각각 뒤따르고 나머지 무관과 수행원들은 마필(馬匹)을 이용했다.

 

감리서(구 제일은행)에다 급히 행재소(行在所)를 마련하여 옥좌를 감리실에 두고 감리서 내외엔 마산 근처의 국민들이 부복 배알했다.

 

12일 오전(원문에는 도착 다음 날 일모경(日暮頃)이라고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에 천지가 뒤집힐 환호성과 만세 소리에 싸여 열차편으로 한양에 환행(還幸)하셨다.<<<

 

 

<아래는 당시 순행을 기념하는 그림엽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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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5. 이등방망이 피살보

115. 이등(伊藤)방망이 피살보(被殺報)

 

 

19091027(이등 피살 이튿날) 마산공립보통학교 제4학년 정영관(본교 3회 졸업생)은 완월 의숙(義塾)학원 생도들과 하학 도중 성지학원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등박문이 북만주 하르빈이라는 정거장에서 한인 독립군 안중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전보 통신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인 만큼 신문보도인 경성일보를 본 흑목원이(黑木源二) 교장이 전교생을 모은 가운데 울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등이 어떠한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 위인인가는 확실히 모르면서도 한인의 원수라는 것만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일부 국민들은 덮어놓고 통쾌하게 생각했으며,

 

이등박문이라는 것이 와전되어 이등방망이가 한국인의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고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죽인 안중근의 원하던 노래가 삽시간에 퍼져 나왔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 번 만나려고

    혹은 륜선 혹은 기차

    수륙으로 수십 만리

    너 만나기 원이었다(이하 망각)

 

이리하여 경찰과 밀정들은 혈안이 노래 부르는 자의 색출에 힘을 다했다.

 

이때 보통학교 기숙사에는 백주에 정복 경시(警視)가 나타나 가택수색 사건이 벌어졌다.

 

소문은 감판동(甘判同)이라는 3년생 학생이 창신학교에서 불온 창가를 담임 김학배 선생에게 전하였다는 것으로 교내가 소란하였는데 배일 훈도 장기현 선생은 흑목(黑木) 교장에게 직접 화풀이를 했다.

 

문제의 대상인물 김학배 선생은 극도로 흥분하여 사무실에서 금지된 황실가를 소리 높게 부른 일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와 이등 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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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8 00:00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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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 [감춰진 도시이야기]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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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0:0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의 한국경영 가운데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나 보호조약도 이보다는 못하고 통감설치나 철도점유도 이보다는 못하며 두 군항(진해만·영흥만)의 획득이 최대 환영이다」라고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이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전투행위에 들어간 것은 2월 5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의 군사본부였던 대본영은 「연합함대는 황해방면의 러시아함대를 격멸하고 육군의 선유부대(先遺部隊)를 호송할 것. 제3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하고 조선해협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 제3함대가 진해만을 점령한 것은 2월 6일부터 7일 아침까지였고 이때부터 창원·웅천·거제 각 군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 「일본의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거제도와 진해만뿐만 아니라 이 나라 해안을 온통 일본해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한일 두 나라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본해군이 가근거지(假根據地)로 마련한 곳은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진해만’은 다음 그림에서 나타낸 지역으로 웅천·창원·칠원·진해·고성 등 각 군의 일부와 거제도 전역에 걸친 해역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그때부터 송진포항의 규모가 작아 영구적인 군항으로 부적합함을 알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 29일)과 치욕적인 을사조약(11월 17일)이 체결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진해만 내해에 위치한 현 진해지역의 막대한 땅을 수용하겠다는 일본 측 요청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은 다음해인 1906년 7월이었습니다. 원산 영흥만과 함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마치 진해군항을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에서 보낸 공문에서
「………귀국정부는 진해만과 영흥만을 군항으로 예정하고………」
라며 한국정부에서 진해군항을 추진하는 양 표기하면서
「………군사시설은 일본에서 하는데 한국의 군비수준이 높아질 때 까지 사용할 것」
이라고 위장하였습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군항과 신도시에 대한 민심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4,388.8정보(43.52㎢, 1,300여만 평)였습니다.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시가지면적은 약 12만평이었습니다. 거제도의 장목면과 하청면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縣洞)․도만(道滿)리․도천(道泉)리․여명(余明)리․중평(中平)리․좌천(佐川)리․신좌천(新佐川)리․안곡(安谷)리․속천(束川)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이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에는 일본육군연병장을 둘 예정이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의 위치에 대해서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하구는 자은동, 중동은 석동과 하구마을 사이라고 했습니다)

군항으로 예정된 1,300여만 평의 땅은 한국정부에 의해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이때부터 진해는 해군기지와 군항도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인 1907년, 진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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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일본인이 계획한 신마산의 모습>

-마산전도(馬山全圖)*-
1907년 / 청목항삼랑(靑木恒三郞) / 율원경포당(栗原耕浦堂) / 1 : 4,500 / / 일본국회도서관

 

 

한일병합 직전 시기의 신마산 조계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제목인「마산전도」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을 ‘신마산’ 혹은 그냥 ‘마산’이라고 불렀으며 원래부터 한국사람들이 살았던 원마산(마산포)을 ‘구마산’이라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마산 최초로 개설된 중앙에 있는 도로를 진해본통(鎭海本通)으로 표기하는 등 도로의 명칭을 일본식으로 지어 사용하고 있으며 조계지 주변의 산 이름까지 일화산(日和山), 영성둔산(影星屯山) 등 그들 멋대로 지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지도가 제작된 시기에는 아직 개설되지 않고 계획 단계에 있었던 도로까지 표시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구분을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자료와 비교 분석해보면 산수상통(山手上通)이라고 불렀던 현 제일여고 앞 도로 이북의 지역은 도로가 개설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범례로 토지경매 때 나눈 등급을 표시하여 무색의 토지를 1등지(一等地, A급지), 유색의 토지를 2등지(二等地, B급지)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이는 다른 자료의 구분과 일치합니다.

그런가하면 그 때까지 경매되지 않았던 토지도 상세히 구분했는데 이에 의하면 제일여고 앞 도로인 고운로 이북의 토지는 그 때까지 미경매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토지는 등급별로 일련번호를 붙여 놓았습니다.

지도 최상부의 지점은 현재의 만날고개로 연결되는 위치인데 이곳은 무학산 너머에 있는 감천마을과 연결되는 고개입니다.

그곳에「함안도(咸安道)」라는 도로명칭이 적혀있고 함안도 아래의 직선도로,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앞 도로가 「함안신정(咸安新町)」이라는 것을 보아 옛 월영리와 함안의 연결도로가 만날고개를 지나 감천-중리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월영동에서 걸어서 함안까지 간다면 그 길이 가장 빠를 겁니다.

조계지 역역 안에 있었던 세 개의 하천에 11개의 교량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을 일화계(日和溪)로 불렀으며 신월천(깡통골목, 복개)을 신월계(新月溪), 월영천(경남대 앞 광장, 복개)은 월영계(月影溪)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창원천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래로부터 신월교․무학교․마산교․반룡교․대사교(大使橋) 등 다섯 개의 다리에 명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월천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래로부터 창원교․완월교․웅천교였으며․왼쪽 월영천에 있는 한 개의 다리는 진해교였습니다.
진해교는
현재의 진동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때만 해도 진동을 진해라 불렀기 때문에 진해교라고 한 것입니다.

일본인 전중 손(田中 遜)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4개의 콘크리트 교량은 그 시기와 위치를 보아 창원천에 있는 7개의 다리와 신월천의 3개 중 4개를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어느 다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중손은 일본궁내대신이었던 전중광현(田中光顯)의 아들입니다.
전중광현은 1906년 한황실 위문대사로 우리나라에 왔던 일본 고관으로 방문 당시 철도용지였던 마산 장군천 상류 일대 35만여 평을 100년 동안 농장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통감 이등박문과 임차계약을 하였습니다.
전중손은 바로 그 농장을 물려받은 자인데 그 농장이 월포원입니다.
전중손은 이 외에도 대규모의 가옥임대업과 건설업 및 수 백호의 소작인을 두고 농업경영을 하는 등 일제기에 마산을 호령했던 권력자이자 대부호였습니다.

함안신정(咸安新町)․본정(本町)․중정(中町)이라고 적힌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 갈래 길이 개항 초기에 ‘마산의 긴좌(銀座)’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변화했던 도로입니다.

이 지도를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해보면 매우 정밀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방 이후 강점기가 진행되면서 개항 초기에 조계지내에 개설된 도로가 없어지거나 형태가 약간씩 바뀌었기 때문에 최초의 조계지 도시구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대단히 큰 지도입니다.

위 지도의 현재 모습이 아래 그림입니다. <<<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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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0 14: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11.01.10 16:57 신고 address edit & del

      오 기자, 반갑소.
      근황은 이야기 들었어요.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주세요.
      가족 모두 새해 좋은일 많이 있기 바랍니다.

2010.10.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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