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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7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26) -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을 통해서 그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들어 시신(屍身)을 따로 모시는 것 자체가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으며, 내세관(來世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신을 별도의 장소에 모시는 것은 물론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내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무덤이 만들어졌던 예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덤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춘 초기적인 형태의 매장시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무덤 역시 그 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무덤의 구조 또한 매우 단순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시신을 매장하는 습속이 일반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 하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무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창원 덕천리 11호 무덤 (석곽묘)>

 

-마산·창원지역에도 고인돌이 있었다-

고인돌 또는 지석묘(支石墓)라 불려지는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던 여러 종류의 무덤 가운데 대표적이다.

땅 속에 돌로써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돌을 얹은 것이 보통인데, 무덤 속에는 시신과 함께 돌칼이나 화살촉, 토기, 장신구 등을 함께 묻는다.

땅 위에 드러난 큰 돌을 상석(上石)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을 굄돌 또는 지석(支石)이라 한다.

‘고인돌’ 혹은 ‘지석묘’라는 이름은 상석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에서 유래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에 있다.

이 상석으로 말미암아 고인돌의 존재 그 자체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으며, 상석의 크기 또한 몇 톤에서부터 수십 또는 수백 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무엇 때문에 무덤 위에 그토록 큰 상석이 필요한지가 의문의 시작이다. 상석은 무덤을보호하는 동시에 뚜껑돌(蓋石)의 역할을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상석 아래에 있는 무덤에는 대부분 별도의 뚜껑돌이 덮혀 있으며, 상석 때문에 무덤이 찌그러진 경우도 많아서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풀어야할 첫 번째의 문이다.

수십 톤 이상의 큰 돌을 옮겨와서 무덤을 만드는데에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런 까닭으로 고인돌을 한 집단의 장(長)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 사람의 시신을 묻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다면,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있지만 반대의견도 적지 않다. 고인돌을 집단의 장, 즉 수장(首長)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상석의 크기에 비해 부장품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상석이 아주 큰 무덤의 부장품이 아주 보잘 것 없는 데 반해 조그마한 상석을 가진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상석의 크기와 부장품의 질이나 양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고인돌에 관한 연구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풀어야 할 두 번째의 숙제이다.

마산·창원지역에 있는 고인돌 관련 유적은 모두 20개소 이상으로, 100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부터 상석이 없었거나 한 개의 상석 주위에 여러 기의 무덤이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실제 무덤의 수는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할 때, 마산 창원지역의 고인돌 분포는 크게 3개의 지역군(地域群)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해안지역으로서 삼진(진동, 진전, 진북)과 구산면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진동만을 끼고 있으면서 그 주위의 평지나 산기슭에 분포하는 유적들로, 진동 진동리 유적과  고현리유적, 진전 곡안리·오서리유적, 구산 반동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 진북 신촌리유적에서는 3기의 주거지와 30여 기의돌상자무덤(石棺墓)이 조사되었고, 진동 송도와 다구리에서는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금의 자동차운전 면허시험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괴된 진동리 유적은 마산·창원지역에서는 드물게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반동리 고인돌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청동검이 출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발굴조사된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둘째는 내륙지역으로서 내서읍과 북면, 동읍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하천 주위나 산지에 인접한 평지이다. 함안 오곡리유적, 북면 외감리유적, 동읍의 덕천리·용잠리·봉산리·신방리·봉곡리·화양리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오곡리유적은 행정구역상으로는 함안군에 속하나, 내서읍을 가로지르는 광려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 포함시켰다.

이 유적에서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곽무덤(石槨墓), 돌상자무덤, 움무덤(土壙墓) 등 모두 3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내서 안성리에서는 손잡이의 모양이 특이한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동읍 일대에는 3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곳은 덕천리유적 한 곳 밖에 없다. 덕천리유적은 모두 5기의 고인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주위에서 모두 2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1호 고인돌은 주위에 56×17.5m의 돌담장(石築)이 돌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무덤은 8×6m 크기의 구덩이를 4.5m 깊이까지 파고 돌로써 쌓은 것인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무덤 가운데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1호 고인돌의 상석 무게는 35톤 정도이다.

2호 고인돌에서는 160여점의 대롱옥이 출토되었으며, 이것과 인접한 작은 무덤에서 청동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인접한 용잠리에서도 크기나 구조상 이것과 비슷한 고인돌이 도굴된 채 발견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동읍 일대의 고인돌이 대체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갖춘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이처럼 대규모의 무덤에 묻힌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창원 덕천리 유적 1호 지석묘 전경>

 

셋째는 창원분지이다.

마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되어있는 창원분지는 얕고 완만한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창원시내의 가음정동, 외동, 내동, 상남동, 남산동 등 곳곳에는 다양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상남동에서는 고인돌과 함10여기의 무덤이 발굴조사되었고, 외동의 고인돌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2단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의 무덤방이 조사되어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남산유적에서는 환호(環濠)라고 하는 방어용 도랑으로 둘러싸인 대규모의 취락이 조사되어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창원 외동 지석묘(창원 남고등학교 내)>

 

이상으로 마산, 창원지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묶어서 살펴보았다.

고인돌의 분포에 비해 주거나 취락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이 아쉽다. 그러나 고인돌은 상석이 땅 위에 드러나 있으므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반해, 주거지나 취락은 모두 땅 속에 있으므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발견된 주거유적이 전부라고는 할 수가 없으며, 무덤이 있으면 인접한 곳에 당연히 주거지도 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고인돌과 같은 무덤은 아니지만 독특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마산 가포동유적을 들 수 있다.

가포유원지의 뒷산 경사면에 위치하는 이 유적은 동검(銅劍)과 동모, 동과(銅戈) 등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의 급경사면에 자연적으로 굴러 내린 바위틈 사이에 청동기를 끼워 넣어둔 이 유적은 청동기를 이용한 제사유적(祭祀遺蹟)으로, 흔히 청동기 매납(埋納) 유적으로 불려진다.

청동기의 매납은 집단의 수장이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후 그것을 바위틈에 감춰 둔 것인데, 이러한 유적이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은 가포동유적이 처음이다.

-고인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까지 확인된바로는 마산, 창원지역에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마산, 창원지역은 넓지는 않으나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된 평지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거의 전지역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진동만 일대의 삼진지역과 내서읍, 창원분지 등은 모두 거의 비슷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농경사회와 관련된 거석(巨石) 기념물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정착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한 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동안에 조상의 중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의 시신을 모셔두고, 그곳을 관리하고 참배하는 풍습은 오늘날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은 지금의 무덤에 있는 봉분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보호하는 동시에 무덤의 표시였다.

이러한 점은 덕천리유적이나 상남 고인돌 등과 같이 상석을 가운데에 두고 그 주위에 일정하게 무덤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창원 남산유적의 취락은 대규모의 저장시설, 수확용 반달돌칼이나 목제 농기구를 가공하기 위한 돌도끼의 존재 등으로 보아 농경을 위주로 하는 취락이었다.

더구나 대규모의 방어용 환호는 집단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는 만들거나 보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원의 공동 작업은 큰 돌을 옮겨서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인돌이 반드시 수장의 무덤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품앗이와 같은 공동의 노동으로도 가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덕천리 1호 고인돌과 같이 엄청나게 규모가 큰 무덤의 경우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무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그 신분이 매우 특별났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포동유적에서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수장(首長)이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 이상길 / 경남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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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창원 탄생-합포성-임진왜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2008년에 창원시가 펼친 ‘창원탄생 600년’ 기념행사는 바로 이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7년이 지난 1415년(태종15년)에는 부(府)였던 창원이 도호부(都護府)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도호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포성'은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부원수 배극렴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병영입니다.
올해 초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합포성지 정밀지표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당시 합포성을 도면으로나마 복원하였습니다.
연구책임을 맡았던 이상길 교수는 "역사적 가치로 보아 소중히 보존해야할 유적인데 시민들로 부터 외면 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히더군요.

아래 사진은 193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당시의 합포성 사진이며 그 다음 것들은 각 시기별로 촬영된 합포성의 항공사진입니다.
1947년도 사진은 미군이 촬영한 것인데 흐릿하게 보이는 사각형 윤곽이 성지(城址)입니다. 1967년 이후의 사진은 국토지리정보원 보관자료이며 이상길 교수의 도움으로 올렸습니다.

                                       <1930년대 합포성 모습>

                                          <194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6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75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82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2008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합포성은 방어상 목적 때문에 해안에 바로 접하지 않고 내륙에 입지하였으며 내성과 외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인 '합성동'은 내성 외성을 합했다고 해서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합포성'을 줄여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성의 구조에 대해서『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관방조에는
「右道兵馬節度使營 在古合浦縣距府十三里 石城周四千二百九十一尺 高十五尺 內有五井 裵克廉築」이라고 하여,
우도병마절도사영은 옛 합포현에 있으며 창원도호부에서 서쪽으로 13리 거리에 있고 석성(石城)인데 둘레가 4,291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서 성안에는 우물이 5개소 있으며 배극렴이 쌓았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합성동 어느 주택 담벼락에 남아있는 합포성벽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합성동 155-42번지입니다.
가벼운 현대식 블록 담장을 떠 받치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석축이 내 눈에는 마치 '시간의 낙관(落款)'처럼 보입니다.





합포성 성곽유적 일부가 유형문화재로 남아 이처럼 보존되고 있습니다.

                                             <합포성 성곽 유적>


다음 그림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합포성입니다.

중앙 상부의 원형 표식 안에 '창원'이라 적은 것이 의창동에 있었던 창원읍성이고 그 좌하의 작은 원형 표식 위에 고병영(古兵營)이라고 적은 것이 합포성입니다.




다음 그림은 이상길 교수가 복원한 합포성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한 것입니다.

                                     
                                                 <합포성 위치>

창원시 의창동 일대에 있었던 창원읍성은 성종 8년인 1477년 완공되었습니다. 완공은 되었지만 창원도호부가 언제 신축한 부성으로 이전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아무튼 1408년 탄생한 창원부의 행정치소는 짧게보아 칠십년 이상 지난 뒤 마산에서 창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성(府城)이동이라는 도시의 대변화는 마산지역(당시 합포)에 있었던 행정과 군사의 중심기능이 창원(의창동 일대)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성이 이전하자 합포성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만 남았는데 이 영(營)은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6년(1603년) 진주로 옮겨갔습니다.

그 후부터 합포성은 역사적 소명을 상실하였고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치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존 받아야할 이 오래된 성곽은 '도시화'의 이름 아래 무너져 내렸습니다.
철도 마산선(마산-삼랑진) 개설로 1904년-1905년 사이에 성곽이 관통되었고, 이어서 1909년에는 마산-창원-부산을 잇는 신작로가 성곽을 관통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에는 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조성과정에서 합포성의 성벽이 매립용 골재로 사용되면서 성의 형태가 대부분 망실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마산시의 도시확장정책으로 동마산개발이 시작되면서 합포성은 형체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산의 기차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들이 현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기존의 철도는 광로(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 대로)가 되고 그 옆으로 새로운 철로가 생겨 합포성은 또 한 번 관통당했습니다.

우리 지역도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피해가 많았습니다.
마산인근지역의 대표적인 전투는 현재의 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인 노현(露峴)일대 및 창원성 전투, 의병장 최강이 분전한 안민고개 전투,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투입된 합포해전과 안골포 해전 등입니다.


전쟁기에 왜적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남해안 여러 곳에 성(城)을 수축했는데 마산 산호동 용마산에는 그 때 축성한 왜성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진왜란 중 우리 지역 주민들은 왜구의 침입에 불굴의 저항의식과 희생정신으로 민족 자존심과 자주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7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와중에서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관민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34년(1601년)에 창원도호부는 행정과 군사상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유는 임진왜란 때 보여준 창원지역민들의 높은 충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합포성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을 진주로 이전한 것이 대도호부 승격 2년 뒤인 것을 보면, 이 병영(兵營)이 떠나고난 뒤 약화될 창원지역의 행정과 군사적 비중을 강화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1408년에 시작된 창원부는 도호부를 거쳐 200여년이 지난 1601년 드디어 대도호부가 되었습니다. 1661년(현종2년)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1670년(현종11년) 다시 대도호부가 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임진왜란 때 단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하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이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으로 절대 권력을 두 번씩이나 쓰러뜨린 마산 사람들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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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14 09: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같은 장소를 시대 순 변천사 사진을 보니까 참 ...
    앞으로 2008년 뒤에 실릴 사진은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 지네요 ^^

    • 허정도 2010.06.14 10:00 신고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저 유적지가 미래에는 또 어떻게 변할까요?

  2. 옥가실 2010.06.14 10:1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보니,
    합성동이 마산 창원의 중심이군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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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의 경제성을 이야기하면 사용후핵연료 처리비용 과소계상, 원전 해체비용과 환경 복구 비용 과소 계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사고 보험 문제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 ..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

마산해양신도시, 대통령 말씀대로

계륵 꼴이 된 가포신항이 구체화된 것은 2001년이었다. ‘마산항 제2차 무역항기본계획’에서 20년 후 마산항 물동량이 54만 TEU가 될 것으로 예측해 성사된 사업이었다. 환경문제를 걱정하며 매립을 반대했던 시민들에게는 ‘일..

고지도로 보는 창원 27. - 칠원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7. - 칠원현 지방지도 ● 칠원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7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6. - 진해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6. - 진해현 지방지도 ● 진해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7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웅천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8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8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