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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4) -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7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노랫말을 쓴 사람이 동원 이원수다.

그는 15세 되던 해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당선된 후 7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아동극, 수필, 시, 아동문학 평론 등 모두 800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문학은 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였고, 우주 만물의 모든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고 서로를 죽였던 처참한 전쟁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우리 겨레의 삶, 외세에 의한 고난 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한가운데서 어린이와 함께 호흡했다.

또한 부정한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어린이 문학이 현실을 떠나 알록달록한 모습만 그리는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할 때도 이원수는 늘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민족 수난의 가운데에서-

이원수는 1911년 경남 양산 북정동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년 뒤 창원으로 이사 와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흘러가는세월속에」, 1980)

 

1920년 마산으로 이사를 간 다음 해에 바로 마산 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신식 공부를 하게 되면서『어린이』와『신소년』을 애독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봄>으로 아동문학에 입문하던 그 무렵 이원수는 ‘신화 소년회’에 가입하고 민족의 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 소년회의 정신은 그의 자전적 소년소설 <오월의노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다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조선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 말을 쓰고 우리 혼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우리 소년회에서는 늘 서로 말하고 생각하고 해온 것이다. 

 

이원수는 1927년 마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1939년 지은 시 <고향바다>에서 확인되듯이〈고향의 봄〉창원과 더불어 마산은 그에게 정신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분위기가 강했던 마산에서 이원수가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소년회 활동을 한 사실은 이후 그의 문학에 짙게 배인 현실성을 설명해 주는 요소가 된다.

1930년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함안 금융조합에 취직을 한다. 이곳에서 이원수는 일본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는데, 그의 시 <여항산>을 읽으면 짐작할 수가 있다.

함안에서 독서회에 참가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학에 대해 배우고 농촌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려 했다.

그러나‘함안 독서회’는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5년 회원 6명이 모두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독서회에 카프 중앙위원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원수는 프로문학에 강한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게 된다.

19361월 출옥한 그는 3개월 후 수원에 있는 최순애(『어린이』에 <오빠생각>, <가을>을 발표한 동시 작가)와 마산 산호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산의 한약방 서기로 일하다 이듬해 함안 금융조합에 복직되어 함안에서 살게된다.

1945년 해방은 국민 모두에게 환희였으나 식민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으며, 그들은 한반도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자주적인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좌우익의 정치적 충돌은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원수도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흐름을 이어 받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이원수는 종래의 동요, 동시 쓰기와 함께 1947년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면서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동심천사주의적인 노랫말이나 이념의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 혼란과 격동기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사회의 모습을 그리기에 운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산문으로 전환하여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한다.

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장군처럼 사방에서 큰소리들을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 이런 동시로써 내 가슴이 후련해질 까닭이 없었다. 동화를 쓰자. 소설을 쓰자. 그런 것으로 내 심중의 생각을 토로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쫓겨가는 외인에게 주먹을 들어보이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외인에게는 허리를 굽혀 환영을 한다. 외인의 것이면 물자건 풍습이건 즐겨 받는다. - 이런 세상이 싫었다. (나의 문학 나의 청춘」, 1974)

 

이원수의 첫 장편동화인 <숲 속 나라>(1949)는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돈과 권력을 배제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나라로, 이원수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그린 판타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사상적 토대는 “자주적 독립, 민족의 눈을 속이는 경제적 침략 등을 경계하는정신” (「아동문학프롬나이드」)이었다.

일제식민지시대를 마감하고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세워 우리 뜻대로 살아볼 희망과 꿈에 부풀어있던 우리 민족은 1950년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이원수는 1·4후퇴 때 3녀 영옥과 3남 용화를 잃게 된다. 그에게 전쟁은 고아들, 굶주림, 이별 등 온갖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세상에서 부정되어야할 모든 것들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전쟁의 참상은 작품의 중심소재가되었고, 평화를 열망했던 그의 정신이 작품 곳곳을 가득 메웠다.

19604·19겪으면서 이원수는 정치와 사회문제, 분단과 실향의 문제, 무분별한 문명수용에 대한 비판과 고발정신을 담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염원했다.

<'고향의 봄' 가사에서 '울긋불긋 꽃대궐'로 묘사된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생가 /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현존>

 

-죽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최근 이원수의 친일작품이 발견되었다.

조선금융연합조합회의 국책 기관지인『반도의 빛』이라는 월간 잡지 428월호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친일 글을 남겼던 것이다.

친일글을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의 변명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의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했다.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 구백 삼십 칠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써줄 턱이 없는 시절이었건만 그 곳의 이사 김정완 씨는 우선 임시 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 지도 모르고. (<털어 놓고 하는 말>,1980)

 

일제시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문인들처럼 그도 일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친일글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 만이라도 ‘친일분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고’가 아니라 진정한 참회의 글을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원수가 태어난 191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1년까지 우리 나라는 격랑의 세월이었다.일제식민지, 해방, 6·25 전쟁, 분단, 4·19, 5·16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물리적, 정신적 수난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짙게 녹아 들어있다.

1981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이원수는 정신을 꼿꼿이 해서 갱지 위에 글을 썼다. <때묻은 눈이 눈물 지을 때>(1981)와 <겨울 물오리>(1981)는 눈앞에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심경을 짐작케 한다.

이원수는 스스로 때묻은 눈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린이를 감싸고, 목을 축여 활짝 피어나게 하는 때 묻은 눈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원수의 호는 ‘동원(冬園)’으로 스스로 겨울들판이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힘겹게 살아온 그의 삶과 관련이 있다.

추운 겨울 들판에 서있는 겨울나무와 같이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꿋꿋하게 쓰러지지 않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아이들 편에서 글을 쓰려 했다.

죽어가면서도 그 자세 그대로‘겨울 물오리’가 되어 죽어간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박종순 / 당시 진주교육대학교 강사. 아동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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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멩물 2014.11.03 09: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보일러 한번 살펴봐야 할 날씨 입니다..건강 유의 하십시요.

    • 허정도 2014.11.03 10:51 신고 address edit & del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2. 실비단안개 2014.11.10 21: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나오나...
    친일에 대한 이야기도 있군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니까요.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4.11.11 13: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잘 계시죠?

2011.02.16 00:00

'고향의 봄' 창작지에서

설을 앞둔 지난 1월 28일 마산지역 출판기획사인 '불휘'의 우무석 시인으로 부터 급한 전화 한통을 받았다.
1920년대 일제감점시기때의 마산부 오동리 71번지의 위치를 찾을 수 있냐고?
그 주소지가 이원수선생이 16세때에  '고향의 봄' 을 만든 창작지라고 한다.
 마산 마산원도심의 지적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터라, 그간에 지번이 변경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말떨어지기 무섭게 다음날 현장을 안내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토요일 오동동 현장을 안내하게 되었다.
현재의 지번도를 통해 과거의 지번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행여 도로라도 개설되어서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 골목안에 있던 필지라 필지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당초의 골목길이 6미터 도로로 확장되어 필지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의 봄’ 창작지 현재의 모습
현재의 위치는 구. 오동동파출소에서 오동동아케이드로 내려오는 길 중간쯤 삼거리가 있다. 거기에서우측방향, 고려모텔로 향하는 길로 약 50미터정도 가다보면 골목 4거리가 좌측에 면한 상가건물이 당시 오동리 71번지이다.
현재는 필지가 71-1,2,3,4번지로 4개로 분할되어, 개별 주택과 상가가 지어져 있었다. 당시의 주택의 모습이나 흔적은 알아볼 방법이 없으나 주택이 있었던 지번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행한 관계자들은 매우 감개무량해 하는 것 같았다.
71-4번지에 해당되는 모서리 부분에 세탁소가 있었으며, 나머지 필지에도 주택 및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오동세탁소가 창작지 71번지이다. )


(사거리에서 어시장방향 골목전경) (오동동 하천방향 골목전경)
(사거리에서 패션호텔방향) (고려모텔 방향 골목전경)

1920년대 원도심의 사회상
당시 1920년대 원도심의 사회상은 마산 지역도시사를 정리한 허정도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원마산 지역의 상가는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밖에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다.
1926년경 신마산의 대성동과 장군동의 전답 지가는 평당 2원 4-50전이었으며 비싸도 삼원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원마산의 오동동 방면은 평당 20여원이었으며 전답도 4-6원에 이르렀을 정도로 가격이 치솟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차 원마산 지역이 크게 발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땅 값은 이렇게 높았지만 원마산의 도시 시설의 정도는 그 때도 매우 낮았다. 원마산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초가였으며 아직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1920년대의 원마산 변화를 지적도에서 찾아내어 1930년 당시 원마산을 복원한 도면이 다음의 지도이다.


(1920년대 원도심 지도 : 붉은색 부분이 오동리 71번지) (구글 지도상의 오동동 71번지 :감색부분은 매립전의 원도심이며 청색부분은 포구였다. )

당시의 사회상
당시의 상황을 위의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주변 환경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수 있을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오동리는 원도심의 변두리 지역에 해당되었다. 주변에 인가가 적은 논밭으로 되어있었으며  원도심(현 고려모텔)방향으로 논두렁 같은 길이 나 있었다.
오동동 하천하류 방향으로 구.오동동 파출소에서 아케이드로 내려오는 길 주변에는 제법 많은 주택가가 형성되었음을 당시의 지도현황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하천이 주거지를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공공시설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원도심의 대부분 주택은 초가였으며, 전기 공급은 신마산 조계지에만 공급되던 시절이라서,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던 시기였었다.
오동리 71번지는 당시는 원도심 외곽지역이었으나 도심지역이 확산되면서 중심가로 변모 하였던 것 같다.
한편 일본이 마산설 철도부설시 건설인력들과 함께 묻어 들어온 기생, 이를 교육하고 공급하는 조합에 해당되는 '남선권번'이 오동리에 있었다.
이원수선생이 오동리에서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다닐 적,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 문학 소년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누나 덕분이었는데, 바로 그 누나가 오동리에 있던 권번에서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어 동생을 키웠다고 한다.
오동리가 가졌던 장소적 특성과 가족사적인 애환이 그의 생애에서, 작품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이원수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논란
올해가 이원수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이원수 선생을 재조명하는 상황에서 상반된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
< 뉴스 1 >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흉상 제막식'이 24일 오후 창원시 팔룡동 고향의 봄 도서관에서 열렸다.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 주최, 주관으로 열린 이 행사에서 "이원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창원시를 '동심의 고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문학과 도시의 가치연결된다"면서 "이 일이 통합 창원시의 가치를 부여하고, 도시의 브랜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날 선포식과 흉상 제막을 시작으로, 오는 4월 학술세미나와 '고향의 봄 어린이잔치', 10월의 '이원수문학상 제정 및 시상'과 기념집 <겨울나무의 노래> 발간 등으로 이어질 계획이란다.

< 뉴스 2 >
창원시의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열린사회희망연대(공동대표 이동근 외 4명)가 문제를 제기했다.
"통합 창원시가 친일 문인 한 사람을 끌어들여 시의 가치를 보태야 할 정도로 초라하고 구차한 도시인가"라고 지적했다.
문제 제기의 근거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사실과 함께 1942년 이원수 선생이 조선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시 '지원병을 보내며' 일부를 공개했다.
"진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며 그를 기리는 일에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 시민의 세금으로 기념사업을 하겠다는 그 몰염치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문제제기 배경을 밝혔다.

역사적 재조명에 대하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논의의 대상 밖으로 제외시키기 보담은 두 가지 측면을 다 재조명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며, 하나는 문학적 성과에 대하여는 학문적 입장에서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분으로 인해 나머지 한부분에 대한 공과가 희석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민족적인 행위를 통한 역사적 진실은 후세에 그 만큼 희생이 따른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문학적 성과에 대한 부분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정확하게 정리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부분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아니면 대비를 통해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원수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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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6 03:21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신삼호 2011.02.16 10: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따님도 연세가 좀 될터인데---
    하지만 조금 안타깝네요!

2010.01.24 14:30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관한 글을 올린다.

                                    <일곱번째 탐방 코스>

     <3.15의거 발원지 표시동판과 의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백한기 회장님>


8년 전 2002년 벽두,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운동을 벌였다.
마산YMCA를 주축으로 ‘한국은행터 공원만들기 마산시민행동’을 조직하고 상임대표를 맡아 운동의 중심에 섰다.
달포 만에 무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그것을 마산시의회에 제출 청원하였다.
하지만 부결되었다.

우리들이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려했던 까닭은 ‘도시환경’이라는 측면과 ‘터의 역사성’ 때문이었다.

             <공원만들기 운동의 발대식과 거리서명 캠페인 장면, 2002년>

돌이켜 보자.
마산은 1899년 개항이후 일제 강점기의 무차별한 개발과 매립, 해방 후 귀환동포 정착, 6.25 피난민 정착, 60년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에 의한 산업화 등 다른 도시가 경험하지 못한 격랑의 세월을 겪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제 한 번도 도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이 있었지만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만 해결했다.

도시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고, 시민들도 도시환경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舊) 마산형무소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고 나선 것이다.
공원으로 하기에 충분한 땅은 아니었지만, 도심에 나온 시민들에게 짧은 여유라도 즐기게 해주고 싶었던 하나의 작은 몸짓이었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려보자.
건강한 사회는 시민 스스로 생활의 제반 문제를 대응한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원래 왕이 사냥을 즐기던 숲이었다. 하지만 도심공원이 없었던 런던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세계최고의 공원이 되었다.
협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런던시민들이 울타리를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오픈스페이스운동, 하이드파크는 이런 격동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운동’도 바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자연적 문화적 유산을 시민 스스로 보존하기 위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영국 전 국토의 1.5%, 해안의 17% 가량을 소유하여 공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런던 하이드 파크>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사람살기 가장 좋다는 밴쿠버 이야기이다.

1886년 5월 12일 오후 7시 30분, 밴쿠버 최초의 시의회가 열렸다.
당시 밴쿠버 시민은 2,600명이었다.
이  첫 회의에서 의원들은 영국해군기지였던 땅 120만 평을 공원부지로 결정하였다. 민간에 매각되어 주택지나 산업단지로 개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원이 밴쿠버가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스탠리파크’다.
124년 전, 인구 2,600명 도시에 120만 평의 공원을 만든 밴쿠버의 결정.
이 결정과 이 비전이 오늘날 밴쿠버를 세계최고의 도시로 만든 주춧돌이었다.

                                         <밴쿠버 스탠리 파크>

밴쿠버 시의회 최초의 결정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깊고도 넓다.
몇년 전, 인구 42만 도시의 마산시장은 1,500평 한국은행 터에 1/3은 건물을 짓고 나머지 천 평만 공원으로 하자는 계획을 발표한바있다.
40만 인구에 1,500평과 2천6백명 인구에 1,200,000평.
왜 마산은 날로 쇠락해가고 밴쿠버는 왜 오늘날 세계최고의 도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리자.
마산형무소 터의 지난 세월은 질곡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일제통감정치시절이었던 1909년에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으로 사용된 후 무려 60여 년 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자리다.
일제 때는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에는 좌우이념갈등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갇혔던 곳이다.
3.1운동 때에는 유명한 삼진의거를 비롯하여 마산, 함안, 창원, 웅동 등 인근지역에서 만세를 불렀던 모든 선조들이 이곳에 갇혔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여성 정치인 박순천도 갇혔던 곳이다.


           <일제기 마산 형무소>            <'마산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
마산의 시인 월초 정진업은 이 형무소에 갇힌 친구를 생각하며 갇히지 않았던 시인의 아픔을 토했다. 「골목길」이라는 시(詩)다.

가치운 몸은 달라도
창살 틈으로 보내는 눈초리는
오직 한마음이라                     

네 손발의 사슬이 풀렸기로
오히려 억압은
첩으로 쌓이는데
아직도 무릎 꿇고
무료히 앉아 있을
벗의 닫혀진 억울한 세월을
너는 어이 잠시라도
잊어보는 것이냐?

고문에 항시 못 이겨        
이를 갈던
공포와 저주는
그래도 잊혀지지 않아                         


총을 멘 보초들 서있는
돌문 앞을 지날 때마다
죄 없이 조라드는
겁 많은 마음이

나무 가지 사이로
철창을 노리고
이룩할 민주의 나라                        
이리 더딤을 한탄하면서                              
밖에서 내 다만 참답게
일 하겠노라
인욕(忍辱)의 벗에게
머리 숙이며 가는
밤마다 정이 드는
나의 골목길이 있다.

식민지시대의 감옥은 단지 신체를 속박시킨다는 의미 외에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다. 공원은 근대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의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터가 공원으로 변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 「근대시민의 자유공간」으로 바뀐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제시했던 자료 / 왼쪽은 당시 현장상황, 오른쪽은 공원조감도>

이제 세 도시가 통합되면 도시의 큰 그림은 다시 그려질 것이다.
따라서 이 터를 공원으로 하는 문제를 두고 ‘옳다 혹은 그르다’ 식의 논의는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터를 보니 마산의 도심공원 문제가 다시 떠올라 몇 자 적는다.

공원문제가 이 도시의 쟁점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터 외에도 신포동 매립지를 아파트만 지을 게 아니라 일부를 공원으로 하자는 운동도 있었다.
모두 실패하였다. 마산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지정된 마산시의 공원의 면적은 자그마치 240여만 평이다. 이 면적은 마산 인구 일인당 약 6평 가까이 되는 규모다.
도쿄와 오사카의 공원 면적이 1인당 고작 1평 내외, 세계적인 도시 파리가 3평 반, 몬트리올이 4평, 뉴욕이 5평반인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 큰 규모다.
1인당 9평이나 되는 런던보다는 작지만 어쨌든 통계상으로 마산은 공원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통계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다.
이미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던 산과 계곡을 공원이라 이름 붙여 통계로 잡은 것이다.

이 도시에는 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제대로 없다.
해변공원은 아예 없고 만날재 공원은 주로 행사용으로 쓰인다. 양덕동 삼각공원은 접근성이 나쁘다.
서항매립이다, 구항매립이다 하면서 20여 만 평의 해면을 매립하고서도 그럴듯한 도심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민들과 바다를 단절시켰고 수변공간계획은커녕 해안 전부를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길과 수입 원목들이 차지해 버렸다.

지금 계획되고 있는 ‘마산비전 2020’에 중앙공원, 산호공원, 추산공원 개발을 비롯하여 돝섬유원지개발, 구산해양관광단지개발, 팔용유원지개발 등 공원개발 계획이 다양하게 세워져 있지만 어디 한군데 도심공원은 없다.
엄청난 시설비를 요하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을 공원화하는 것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토록 철저하게 도심공원이 없는 도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공원계획이 시급하다.
화려한 언어로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도심 속에서 생활 속에서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할 수 있는 공원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시민 1인당 공원 6평이라는 허구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해안도시라면,
적어도 바닷가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30분 정도는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키 큰 나무 아래 잔디 깔린 바닷가에,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가 달리고 벤치에서 연인의 속삭임이 들려야 해안도시 아닌가?

도심공원이 전무한 도시,
바다가 있지만 바다와 차단된 도시,
역사의 가치에 관심 없는 도시,
그리하여 성장 동력조차 상실한 채 인근도시와의 통합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게 된 도시......

이 도시의 '희망찾기'는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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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25 11: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님 저도 찬성입니다.
    그 곳이 공원이 되면 아마도 오동동 창동 거리도 조금 북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창동에서의 추억이 많은 세대로서 늘 아쉬운 부분이지요
    어차피 구 상권일바에야 추억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만드는 것도
    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황량한 그 곳의 모습은 지날때만다 늘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통합 새도시에선 ...잘~ 되길 바랍니다.

    가포탐방때 뵐께요 ^^

    • 허정도 2010.01.25 16:38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도심공원이 없는 게 마산의 걱정인데 딱히 이곳이 아니더라도 도심에 좋은 공원하나 들어서면 참 좋겠습니다.

  2. 조원문 2010.01.27 11: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회장님 정말좋은 마산의 역사를 배우고갑니다
    저도 마산 토박이인데,,,,죄송 합니다,,너무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속적인 마산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많은 자료보도록 하겠읍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읍니다...

    • 허정도 2010.01.27 16: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마산과 관련해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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