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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3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0) -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5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흔히들 마산을 두고 공기 좋고 물 맑아 인심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 왔다.

맞는 말이다.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접하고 살아가는 마산시민들은 잘모르지만 타지사람들이 마산에 오면 안온한 기후에다 살기 좋고 쾌적한 도시임을 실감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일찍이 일제가 마산을 강제 개항시키고 나서 온난한 날씨에다 더 없이 맑은 물과 공기에 착안하여 거점도시의 기틀로 삼은 점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먼저 기후부터 보자.

마산은 중위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안에서 길게 뻗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기후의 특색을 보면 먼저 온대 몬순기후로 겨울철에 한랭 건조한 대륙성 극기단에서 발생하는 북서계절풍과 여름철엔 고온다습한 열대기단에서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기후 특색과 거의 유사한 기후현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쓰시마(對馬島)의 난류가 옥포만과 합포만에 겨울에도 유입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내륙지방에 비해 기온의 연교차가 적어 이른바 해양성 기후에 속하고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마산의 연평균 기온은 고위도에 위치한 대구·서울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위도상에 의한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마산과 거의 같은 위도상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기온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남단의 제주시의 14.7°C보다는 다소 낮지만 남해의 도서지방을 제외한 한반도의 기온분포로서는 통영시 다음으로 마산시가 높은 기온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포 전경>

 

-천혜의 자연환경, 가포-

일제는 이같은 기후의 호조건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살려 요양원을 차렸다고 볼 수 있다.

입지적 여건만 보더라도 구한말, 러시아가 가장 탐냈던 율구미(栗九味)였다는 점이다.

요양원으로서 터전을 잡은 이곳은 나지막한 부용산(芙蓉山) 자락 일대로서 삼면에 울창한 송림으로 싸여있고 동쪽으로는 호수와 같이 잔잔한 합포만을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다.

80을 훨씬 넘긴 노인들이 보통학교에 다닐 적에 원족(소풍)을 가면 으레 요양소가 위치한 가포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자복동을 지나 자복고개를 넘으면 송림이 울창해 숲에서 뿜어내는 송진향에 흠뻑 취했다고 회고한다.

어디 그뿐인가 일제가 마산의 물로 빚은 정종을 최고로 꼽은 사실이 있다.

정종을 ‘마사무네’라 하여 일본 천황한테 진상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감칠 술맛은 일본·만주전역까지 꽤 유명했었다.

또 있다. 간장·된장을 생산하여 일본 ‘끼꼬망’을 견줄만한 상품으로 일약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러한 제품들이 일본열도 전역은 물론 군용으로 만주까지 수송하여 소비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산 전역에 걸쳐 술과 간장 양조장과 통조림 공장으로 즐비하다보니 마산을 주도(酒都)라 하여 한동안 명성을 떨쳤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듯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공기가 맑고 기후가 온난한 이점을 살린 일제1941년, 이곳 가포에다 ‘상의군인요양소’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국립결핵요양원의 모태가 된 것이다.

1940년대, 가포의 결핵요양원과 월영 홍골(지금의 경남대) 언저리에 철도(교통)병원이 자리잡게 되었다.

1950년대 들어와 자북동에 위치한 일본병참부대가 육군군의학교와 제36군 병원으로 바뀐 것도 천혜의 자연환경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1960년대는 국립결핵요양원, 군의학교, 36군 병원, 철도병원을 잇는 ‘호스피탈·벤트’가 형성돼 그야말로 전국에서 제일 이름난 휴양도시로 부상되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1941년 상이군인요양소로 개설된 것이 해방과 함께 완전히 우리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해방 후 기존 건물을 보수하고 일부건물을 신축하여 초기에는 200병상의 수용능력을 갖추었다.

이어 194661일 ‘국립마산요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국립기관으로 개원하기 전 해방 후 과도기에는 신마산에서 저명한 의사였던 제길윤 박사가 마산시 의사회장 위임으로 책임을 맡아 일본인 요양소장으로부터 제반 물건과 인원을 접수하고 운영책임을 받아 자치관리를 했던 것이다.

당시,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은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질서유지를 하면서 60%의 공사가 진척되다가 해방으로 인해 중단된 신축병동 재건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또한 도난·분산된 건축자재를 회수·보관하는데도 진력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제길윤 박사와 간부직원이 상경하여 해방과 함께 급작스레 몰려온 귀환동포 중 결핵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요양원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국립마산요양원은 오늘날 명실상부한 결핵전문치료센터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결핵병원 전경 / 최근 신축 때문에 철거되었>

 

-머물다 간 사람들-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마산요양원은 광기 넘친 일제의 마지막 단말마인 태평양전쟁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함께 갖은 풍상을 겪어온 역사의 표상이요, 결핵퇴치의 요람으로 그 구실을 다해온 것만은 틀림없다.

숱한 애환이 서려있는 요양원에 말못할 곡절과 애틋한 사연도 많았음은 물론이다.

곳을 거쳐간 유명인사도 있었고 요양원을 주제로 한 가요와 영화까지 나와 한때나마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암울했던 일제시절 요양원을 거쳐간 문인으로서 임화(林和:19081953 / 사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본명이 이현욱(李賢郁)인 그는 약관의 나이에 KAPF를 조직, 서기장이 될 정도로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문인으로서 일약 유명하였다.

월북한 그는 1953년, 김일성일파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는데, 억울하게도 미제간첩의 누명을 쓰고 어이없이 희생되고 말았다.

임화의 아내 지하련(池河連)은 마산출신 문인이었다. 둘은 요양소에서 로맨스를 꽃 피웠는데 폐결핵환자였던 임화를 위해 지하련은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임화는 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되어 결혼하였다. 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무대가 바로 요양원이었다.

한국전쟁 때 만주에 소개해 있던 지하련은 임화의 사형소식을 듣고 미치광이가 되어 끝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지하련은 1940년 <문장>지에 <결별>을 발표, 문단에 데뷔했다. 단편 <결별>·<가을> 등을 대표작으로 남겼는데 그 누구보다도 여성의 심리를 이성적으로 관찰한 작가로 주로 소시민의 상극적인 심리상태를 잘 묘사했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

나홀로 재생의 길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리/

 

1956년 마산방송국에 재직하고 있던 반야월(박창오)이 가장 절친했던 친구 이재호(李在鎬)를 찾아 마산요양원에 문병을 갔다.

그 날 위문공연도 함께 했다. 요양원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장을 연상시켰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한 묘령의 여인이 호젓한 숲길을 거닐고 있음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이 여인 역시 폐결핵환자였다.

완쾌된다는 보장도 없이 그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외로운 모습이 서녘하늘에 타는 붉은 노을마저 애처로운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고 있었다.

반야월은 당장 만년필을 뽑아들고 청순 가련한 이 여인의 비감 어린 심정을 아는 듯이 노랫말을 적었다. 제목은 <산장의 여인>으로 정했다.

폐결핵환자였던 이재호가 즉시 곡을 붙였다. 이런 사연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당시 KBS전속가수로 활약하던 권혜경이 취입했다.

권혜경은 이 노래 한 곡으로 1950년대의 톱싱어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이 가사를 쓴 반야월은 마산출신으로, 진주 출신인 이재호가 곡을 붙인 <꽃마차>, <넋두리 20년>과 같은 자신이 부른 노래에 가사를 지었다.

작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추미림, 박남포 등 여러 필명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5000편에 달한다고 하며 작곡가의 손에 넘어간채 미발표된 가사만도 250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서슬퍼런 유신독재의 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1975년 그 해 사상계 잡지에다 <오적>의 시를 실어 일약 유명해진 김지하 시인도 한때나마 요양원을 거쳐간 사실이 있다.

김지하가 요양원에 머물렀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의 집요한 감시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실례를 든다면 75쯤, 일본 문예춘추잡지가 주관하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아꾸다가와(芥川)상을 그해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재일교포작가 이회성(李恢成)이다. 그는 수상작품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해서 탁월한 문학가로서 장래가 촉망된다고 평판이 자자했다.

이 무렵 한국일보가 주선하여 모국을 방문하였는데 이회성이 김지하를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는 바람에 마산까지 내려왔다.

이회성은 끝내 김지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시 극심했던 감시와 인권유린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문인이었던 권환, 이영도, 구상 등과, 재야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진 계훈제, 영화인 최백산 등도 한때 요양원에 머물다 가기도 했다.

병원은 영화의 무대이기도 했다.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넘긴 올드 팬들은 기억해 낼 수 있는 <3천만의 꽃다발>이라 하겠다.

<영화 (삼천만의 꽃다발) 연습 장면>

 

195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촬영 8개월로 완성된 16mm판 영화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한국전에나가 부상을 당해 실명한 자식에게 자기 눈을 빼내 각막이식으로 광명을 찾게하여 다시 출전시킨다는 단조로운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모성애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관제군사영화였다.

출연진은 당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조미령, 마산출신 시인 정진업, 김수돈을 비롯해 이규숙, 박영 등이 등장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주로 요양원을 위주로 하고 앵기밭골에 있는 무학농원, 육군군의학교 등지에서 촬영했다.

이 영화에 친일기업인 한일봉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몰고 달리는 모습은 눈길을 끌만하다.

이 작품의 연출은 신경균(申敬均)이었으며, 촬영은 김찬영이었다. 이 영화의 기획·연출 분야는 제2육군병원이 맡았고, 마산결핵요양원이 후원을 맡기도 하였다.

어디까지나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상징하고도 남을 국립결핵요양원은 결핵으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을 일으키는 재활의 둥지요, 삶의 윤기를 더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하였다.

국립결핵요양원 뿐만 아니라 신생 국립결핵요양소, 철도요양소 등 3개소가 밀집되었던 것은 그만치 마산의 따뜻한 기후와 맑은 공기가 바로 건강을 되찾는데 가장 알맞은 요양지였기 때문이다.<<<

홍중조 / 당시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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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 07:00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마산도시탐방대' 여덟 번째 길이다.
1월 30일 오후 1시 반, 걷기 좋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다.
우리는 가포로 가기 위해 비움고개를 넘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는 한 많은 땅이다.
110년 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다.
잊혀져가는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겨울 오후 바닷가를 4시간 쯤 걸었다.



나라 뺏긴 설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가포에는 마지막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사그라진 가슴 아픈 현장도 있다. 바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세운 결핵전문병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우리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병동’ 터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노래
‘산장의 여인’의 애절한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그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겨울 낙엽 밑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대를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국립마산결핵병원입구(위)과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였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수십 년 세월에 이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였다.
사방에 콘크리트 기초가 둘러 진 것으로 보아 입원실이었음직한 자리에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 서있었다.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았던 여인이 떠난 뒤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테이지>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전국최고였던 마산과 인근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다. 마산문학관 학예사 한정호박사가 정리한 바 있다.

결핵을 앓다 죽은 대표적 문인들로는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임화, 권환,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권태웅 등이고,
한 때 결핵을 앓았던 문인들로는 백석, 구상, 박철석, 남윤철, 고은, 이형기, 김지하, 김혜순, 천양희, 박정만, 성찬경 등이다.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다.
「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그의 대표작「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엄혹했던 시절,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병원을 거친후 장편 시 비어(蜚語)을 발표,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결핵병원에 강제 연금 당했다.
그 시절 발표한 글이다.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우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김지하, 「편지」 전문-


마리아가 내게 은단을 보내왔다. 마치 사약을 내리듯이, 독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쓰는 일이다. 연필 한 자루와 한 뭉치의 종이, 그것이면 족하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 그리고 저기에 가득하다.  
                                           
-김지하, 「가포일기」중-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결핵 때문에 잃어야 했던 그 시절,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은 전 국민의 심경을 녹아내리게했다.
애절한 노랫말을 쓴 이는 마산사람 반야월이었다. 그는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가수 진방남으로 불렀던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이고,
작사자 반야월로 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처녀’ 등이다.

6·25 직후 반야월은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가 마산결핵병원 환자위문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한 곡 뽑았는데, 객석 맨 뒤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연 후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쓸쓸히 살아가는 미모의 젊은 여인에 끌려 작사자 반야월은 가사 한편을 남긴다.
이 글을 뒷날 마산결핵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겼다.
「산장의 여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


나이가 들어 울창하게 숲을 이룬 키 큰 나무들,
가포만에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
뚜렷이 남아 있는 병사(病舍)들의 잔해,
외롭게 살아갔던 여인이 남긴 애절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이만한 볼거리가 없다 싶었다.
애처로이 밤 새워 울었던 풀벌레와 행운의 별을 보며 속삭였던 그날 밤의 추억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숲이었다.

마산을 찾는 사람에게,
아니 마산을 찾고 싶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근대낭만유산이었다.

               <공용 화장실의 변기 / 건물 구조로 보니 여성용이었다>

                                    <현관 턱으로 보이는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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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3 09:03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10.02.03 23:13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적절히 참여하겠습니다.

  2. 삼식 2010.02.03 18: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나도향이 1920년대에 이병사에 있었다면,
    과연 결핵 병원의 최초 건립역사는 언제쯤인지요?

    • 허정도 2010.02.03 23:15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
      나도향은 약 3개월 동안 노산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나눈 자료에 있더군요.

  3. 김영철 2010.02.04 17:1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고향인 저로서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이네예.
    가포 결핵병원에 그렇게 슬픈 사연이 많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마산의 숨은 이야기 계속 부탁 드리겠습니다.

    • 허정도 2010.02.04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혹시 숨은 이야기 중 알고 계신 것 있으면 연락 좀 주십시오.

  4. 유림 2010.02.05 13: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매번 참석을 하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참 큽니다.
    가포 탐방도 참 좋았습니다
    비록 신발이 엉망이 되고 온 바지에 도둑놈(?)이 붙어서 귀찮았지만..

    스잔했던 그 숲이 떠오릅니다

    • 허정도 2010.02.05 14:06 신고 address edit & de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도시탐방대 참 좋은 시됴죠?

  5. 조원문 2010.02.05 18: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가끔 지나는 길인데,,이렇게 알고 보니 정말 새로운 기운이 남닙다,
    회장님 정말로 마산을 많이 배우고 싶읍니다,,

    함께 많은 시간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열심히 노력 하겠읍니다,,,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 허정도 2010.02.06 10:45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
      내가 늘 신세를 많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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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