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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2) -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5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1960년대 이래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온 임진왜란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의 승패논쟁인데 명과 일본측의 기존연구는 대체로 자국의 승전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었으며 조선에서는 패전관이 우세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승전론이 우세해지는반면, 일본측의 연구자들이 패배한 전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전쟁발발 원인과 관련한 성격 및 명칭에 대한 문제이다. 대부분 임진왜란을‘국가적인 규모의 왜구’들에 의한 약탈전쟁으로 보아 ‘임진왜란’ 혹은 ‘임진왜화(壬辰倭禍)’로 표현해 왔다.

이러한 입장의 이면에는 성리학적 사상을 지닌 조선관료들의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내재되어있다. 중국의 명나라가 중화이고 조선은 소중화였으므로, 일본의 조선침입은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전쟁이었으므로 ‘왜란’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탈피한다면 국가간의 전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일전쟁’ 내지는 ‘7년전쟁’ 등의 명칭을 고려해볼 수 있다.

임란의 초기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전쟁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11월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국측의 사신이 파견되어 왔을 때 영의정 등이 왕에게 올린 보고문이 주목된다.

중국에 보내기 위하여 작성된 이 보고문은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전황에 대한 허위나 가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의하면, 왜란이 발생되기 1년 전인 선조24년 여름에 일본에서 승려 현소(玄蘇)를 파견하여 무례한 외교문서를 전달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3월에 대마도의 추장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부산에 정박하였는데 첨사에게 전달한 글 속에는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어 이들을 변경에서 모두 쫓아내게 하였다.

그 후 413일에 적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고, 첨사 정발(鄭撥)·부사 송상현(宋象賢)·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이하 수만여명이 전사하였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성 밖에서 왜적과 교전하였으나 대패하였다.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로서 충주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수비하였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포위하였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자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강에 빠져 강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충주를 잃으면 서울을 지킬 수가 없는 상황인데 신립과 이일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험로를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승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자 선조는 전황이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개전초기의 상황은 파죽지세와 같이 왜적의 일방적인 승리로 전개되고 있었으며 국내의 희생 또한 컸다.

이런 상황에서 왜구는 거의 전국을 유린하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명의 원군과 국내의 경상 우도를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분전에 힘입어 사직을 지탱해 갈 수 있었다.

국가의 비상사태 속에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경상남도의 지역적 특성 속에는 왜란 발생 약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명 조식(아래 그림)의 삶과 그 사상적 감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점은 당시 의병장들의 대부분이 남명의 제자들이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즉 창원·마산을 포함하는 경남권에서 왜적과 맞서 끝까지 싸우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들의 고귀한 희생 속에서 이 지역의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16세기 남명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지역의 역사적, 인문적 환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치열 했던 전쟁터-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3로(路)로 나누어, 고니시(小西行長)는 중로, 가토(加藤淸正)는 동로, 구로다(黑田長政)는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이후약 7년간 조선 8도는 거의 전장화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경상도는 더욱 심하였다.

전쟁발발 2년경, 경상도에 적이 있는 곳은 울산의 서생포와 동래·부산·양산·김해·웅천·창원 등으로 주로 해안선에 집중해 있었다.

조선의 군사들이 왜적과 전투하다가 함안과 진주 사이에서 전사한 자가 무려 수만여명에 달하였고 왜적은 경상 좌도와 우도에 걸쳐 그 적세가 수백리에 뻗쳐 약탈을 자행하는 지경이었다.

창원지역을 내습한 왜적은 구로다의 제3군 휘하의 병력이었으며 김해와 창원·진주를 공략하였다.

마산은 고려 충렬왕 때 ‘합포’를 ‘회원’으로 개칭한 이래 조선건국 이후에도 회원현으로 존재하였으며 태종때 의창현과 회원현을 통합하여 창원부로 승격시켰다.

당시 마산은 창원도호부(都護府)에 속하여 창원의 한 구역이었다. 이 지역의 특성과 연관하여 임란기 항전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현(露峴) 및 창원성 전투 :

부산을 떠난 왜적은 김해성을 함락한 후 약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선조 259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약 2천여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일대(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25일 오10시경부터는 총포를 쏘면서 포위작전으로 진격해 왔다.

아군과 적의 병력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창원성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

그날 밤 늦은 시각에 적병들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상호 교전하였다. 그러나 창원성은 점령당하였고 왜적은 창원과 함안에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면서 진주성을 포위, 공격코자 하였다. 창원성은 왜적들이 서진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공격과 점령의 대상이 된 곳이었다.

의병장 최강(崔堈)이 분전한 안민고개 전투 :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여가 지난 선조 269월 하순경에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의 막료가 지휘하는 일부 병력은 함안방면에 나와 지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농작물을 약탈하고 있었다.

의령현에 있던 전라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대패하였다. 고성에 있던 의병장 최강이 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동중 안민고개에서 왜적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왜적의 기습으로 적의 포위망에 걸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최강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적을 공격하니 왜군은 일시 후퇴하였다. 그 틈을 이용하여 포위된 군사들을 이끌고 일시 후퇴하는 왜적들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합포해전 :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연합함대는 선조 25년 57일 옥포 앞바다에서의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적의 함선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뒤 거제 장목 해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오후 4시경 장목에서 멀지않은 해상에 왜군의 함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추격을 시작하여 합포앞(마산시 내서면 산호리)바다에서 교전하다가 적의 대형함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안골포해전 :

선조 25년 7월, 한산도해전에서 우리측에 대패하여 패주하던 왜군 함선과 부산포에서 지원, 증파된 왜군의 증원함선을 우리측의 연합함대가 웅천만에서 섬멸시킨 해전이다.

40여척의 왜의 함대가 안골포에 집결해있다는 적정을 탐지하고 710일 새벽 이순신의 함선 40척·원균의 함선 7척·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선25척 등 모두 72척의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여 왜함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10일 하루종일 계속되었으며 해질 무렵 왜군전함 20여척을 격파하는 전과를올리게 된다.

한편 임란기 왜적은 전쟁 장기화의 방편으로 남해안권에 성(城)을 수축 또는 축성하였는데 지금 마산 산호동의 용마산에 있는 왜성도 그 하나의 흔적이다.

<진해 안골포>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하지 않았다-

전후 7년간의 전쟁의 참상과 비극속에서도 외침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존과 자주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외세를 격퇴한 불굴의 저항의식과 희생정신은 이 지역의 전통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특히 임란기를 통하여 경남지역의 의병항쟁이 가장 활발하였으며 그 성과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장기간의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 지역사람들은 거의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한 사람이 없어 왜란후 창원을 행정과 군사상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 전통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내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6세기 일본은 각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실질적인 독립세력으로서 서로 경쟁하던 전국(戰國)시대였다.

이 혼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각지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도요토미는 이 다이묘들에게 배분할 새로운 영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국내 불만세력을 전쟁에 참여시켜 힘을 소모하도록 하는 것도 도요토미의 계책이었다. 대외교역의 확대를 원하는 일본 상공업자들의 요구도 전쟁의 한 원인이었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 내부상황에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건국 이후 약 200년만에 발생한 이 전쟁은 발 1세기전으로 되돌아가 보면 본격적인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속에서 연산군 4년 이후 사화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사화가 종결되는 시점에서는 사림세력 내의 자체분열현상이 있었다. 즉 선조 8년 동·서 분당을 기점으로 이후 300여년간 이른바 붕당의 정쟁이 주로 남인중의 경남(京南)과 서인 내의 노론계와의 사이에서 권력장악을 위한 다툼이 치열하게 지속되는 것이다.

관료들 상호간의 정쟁이 지속되면서 국력의 내실을 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역량이 쇠퇴해 가고 실천보다는 관념론적인 성리학의 이론과 예학에 치중하게 된다.

그 결과 임진년의 왜란과 같은 참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정쟁의 와중에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 피해와 부담은 거의 대부분 국가와 일반 민들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일반 민들의 처지는 18세기 이후 항쟁의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었으며, 19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치닫게 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반추해 보면서, 국가를 대표하는 자와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관료들의 책임의식을 촉구하지 않을수없다.

‘임진왜란’이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성은 이런 측면에서도 읽어질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16세기의 시대성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던 창원·마산 지역을 포괄하는 경남의 의병항쟁과 그 사상은 꺼지지 않는 역사의 빛이 될 것이다.<<<

최정용 / 당시 창원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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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1 13:05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0.06.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마산포에 조창이 서다>

조선은 태조 재위 중 고려 때 실시하였던 조창제도를 거의 복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전국 아홉 개 조창에서 세곡을 수납했습니다.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조창이 충주의 사흥창(司興倉)․원주의 흥원창(興原倉)․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황해도 백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의 다섯 개였고,
바닷길이 연결되는 조창은 충청도 아산(牙山)의 공세관창(貢稅串倉)․전라도 용안의 덕성창(德成倉)․영광의 법성창(法聖倉)․나주의 영산창(榮山倉) 네 개였습니다.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의 사흥창에서 수납하였습니다.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조운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선(漕船)의 빈번한 침몰사고와 민간인에게 운임을 지불하고 운송하는 임운(賃運)이 생기면서 조창의 기능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조창이 폐쇄되거나 관할구역이 축소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민호(民戶)를 기준으로 한 공물(貢物)과세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토지기준 과세인 대동법을 실시합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며 이 때 걷은 쌀을 대동미(大同米)라 불렀습니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경기도에 처음 실시한 대동법은 이후 강원도․충청도 등으로 확산 혹은 축소되기도 하다가 숙종 3년(1677년)에는 경상도에 시행되고 숙종 34년(1708년)에 황해도를 마지막으로 100년에 걸친 시도 끝에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후 영조 36년(1760년)에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이 경상도 지방의 대동미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한 조창을 세우도록 건의하여 결정됩니다.
그 때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창원의 마산창(馬山倉)과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곧 경상도 좌우 양창(兩倉)이 설치되었습니다. 250년 전 일입니다.
5년 뒤 밀양의 삼랑창(三浪倉)을 후조창(後漕倉)으로 설치하여 경상도에 3곳의 조창을 두었습니다.


마산창(馬山倉)의 위치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지금의 남성동 파출소 일대입니다.
당시에는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해안이었지만
지금은 매립이 되어 도시 한복판입니다.
-마산창의 터와 건물 등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히 올리겠습니다-

마산창 관할구역은 창원․함안․칠원․진해․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동남면의 8개 읍이었는데 거제와 고성은 1765년에 위치관계로 거제 견내량의 속창(屬倉)에서 관장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진해는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일대입니다. 진해라는 명칭은 1907년 일본에 의해 당시 웅서면이었던 현재의 진해시로 넘어갔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입니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하였습니다.
배의 기본 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습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경 도착합니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석두창 때문에 번성했던 포구였으며,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계획으로 한 때 동아시아의 군사거점도시이기도 했던 곳이 마산지역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조창 기능도 사라지고 몽고군도 떠나자 조선시대 마산포는 조용한 포구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런 마산포가 다시 도시적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마산창(馬山倉)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산창 건립은 오늘날 마산도시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마산창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집이 들어서고 길이 생겨 마산포가 도시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도심이라 불리며 도시재생의 대상으로 거명되기도 하지만,
250년 전에 들어선 마산창 주변인 창동, 남성동, 동성동 일대는 아직도 마산의 중심입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9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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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21 13: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림을오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역사와 어울어져 정말 멋진 자료인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21 13:50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데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10.07.22 23:2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0.06.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창원 탄생-합포성-임진왜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2008년에 창원시가 펼친 ‘창원탄생 600년’ 기념행사는 바로 이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7년이 지난 1415년(태종15년)에는 부(府)였던 창원이 도호부(都護府)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도호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포성'은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부원수 배극렴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병영입니다.
올해 초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합포성지 정밀지표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당시 합포성을 도면으로나마 복원하였습니다.
연구책임을 맡았던 이상길 교수는 "역사적 가치로 보아 소중히 보존해야할 유적인데 시민들로 부터 외면 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히더군요.

아래 사진은 193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당시의 합포성 사진이며 그 다음 것들은 각 시기별로 촬영된 합포성의 항공사진입니다.
1947년도 사진은 미군이 촬영한 것인데 흐릿하게 보이는 사각형 윤곽이 성지(城址)입니다. 1967년 이후의 사진은 국토지리정보원 보관자료이며 이상길 교수의 도움으로 올렸습니다.

                                       <1930년대 합포성 모습>

                                          <194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6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75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82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2008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합포성은 방어상 목적 때문에 해안에 바로 접하지 않고 내륙에 입지하였으며 내성과 외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인 '합성동'은 내성 외성을 합했다고 해서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합포성'을 줄여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성의 구조에 대해서『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관방조에는
「右道兵馬節度使營 在古合浦縣距府十三里 石城周四千二百九十一尺 高十五尺 內有五井 裵克廉築」이라고 하여,
우도병마절도사영은 옛 합포현에 있으며 창원도호부에서 서쪽으로 13리 거리에 있고 석성(石城)인데 둘레가 4,291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서 성안에는 우물이 5개소 있으며 배극렴이 쌓았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합성동 어느 주택 담벼락에 남아있는 합포성벽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합성동 155-42번지입니다.
가벼운 현대식 블록 담장을 떠 받치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석축이 내 눈에는 마치 '시간의 낙관(落款)'처럼 보입니다.





합포성 성곽유적 일부가 유형문화재로 남아 이처럼 보존되고 있습니다.

                                             <합포성 성곽 유적>


다음 그림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합포성입니다.

중앙 상부의 원형 표식 안에 '창원'이라 적은 것이 의창동에 있었던 창원읍성이고 그 좌하의 작은 원형 표식 위에 고병영(古兵營)이라고 적은 것이 합포성입니다.




다음 그림은 이상길 교수가 복원한 합포성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한 것입니다.

                                     
                                                 <합포성 위치>

창원시 의창동 일대에 있었던 창원읍성은 성종 8년인 1477년 완공되었습니다. 완공은 되었지만 창원도호부가 언제 신축한 부성으로 이전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아무튼 1408년 탄생한 창원부의 행정치소는 짧게보아 칠십년 이상 지난 뒤 마산에서 창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성(府城)이동이라는 도시의 대변화는 마산지역(당시 합포)에 있었던 행정과 군사의 중심기능이 창원(의창동 일대)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성이 이전하자 합포성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만 남았는데 이 영(營)은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6년(1603년) 진주로 옮겨갔습니다.

그 후부터 합포성은 역사적 소명을 상실하였고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치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존 받아야할 이 오래된 성곽은 '도시화'의 이름 아래 무너져 내렸습니다.
철도 마산선(마산-삼랑진) 개설로 1904년-1905년 사이에 성곽이 관통되었고, 이어서 1909년에는 마산-창원-부산을 잇는 신작로가 성곽을 관통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에는 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조성과정에서 합포성의 성벽이 매립용 골재로 사용되면서 성의 형태가 대부분 망실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마산시의 도시확장정책으로 동마산개발이 시작되면서 합포성은 형체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산의 기차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들이 현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기존의 철도는 광로(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 대로)가 되고 그 옆으로 새로운 철로가 생겨 합포성은 또 한 번 관통당했습니다.

우리 지역도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피해가 많았습니다.
마산인근지역의 대표적인 전투는 현재의 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인 노현(露峴)일대 및 창원성 전투, 의병장 최강이 분전한 안민고개 전투,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투입된 합포해전과 안골포 해전 등입니다.


전쟁기에 왜적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남해안 여러 곳에 성(城)을 수축했는데 마산 산호동 용마산에는 그 때 축성한 왜성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진왜란 중 우리 지역 주민들은 왜구의 침입에 불굴의 저항의식과 희생정신으로 민족 자존심과 자주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7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와중에서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관민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34년(1601년)에 창원도호부는 행정과 군사상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유는 임진왜란 때 보여준 창원지역민들의 높은 충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합포성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을 진주로 이전한 것이 대도호부 승격 2년 뒤인 것을 보면, 이 병영(兵營)이 떠나고난 뒤 약화될 창원지역의 행정과 군사적 비중을 강화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1408년에 시작된 창원부는 도호부를 거쳐 200여년이 지난 1601년 드디어 대도호부가 되었습니다. 1661년(현종2년)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1670년(현종11년) 다시 대도호부가 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임진왜란 때 단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하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이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으로 절대 권력을 두 번씩이나 쓰러뜨린 마산 사람들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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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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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14 09: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같은 장소를 시대 순 변천사 사진을 보니까 참 ...
    앞으로 2008년 뒤에 실릴 사진은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 지네요 ^^

    • 허정도 2010.06.14 10:00 신고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저 유적지가 미래에는 또 어떻게 변할까요?

  2. 옥가실 2010.06.14 10:1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보니,
    합성동이 마산 창원의 중심이군요.
    잘 보았습니다.

2010.06.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마산' 지명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작년 11월 9일 포스팅했던 글인데 연재라서 또 올립니다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
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습니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입니다.

그러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오른쪽 그림이 표지 제목) 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합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입니다.

박희윤은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현재 일본굴지의 도시개발회사 간부로 근무하는 마산사람입니다. 마산도시사연구는 국내에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작년 추석에 고향이라고 마산와서 쇠락해가는 도시모습을 보며 많이도 안타까워하더군요.

박희윤은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몽고군 1인당 말 4필로 보면 4만 필인데 이를 먹일만한 장소로 산호동 지역 바냇들 뿐이어서 이곳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정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현재 지도 위에 당시의 지리적 상황과 박희윤의 추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목마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바냇들의 면적은 약 25만여 평입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도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셈입니다.

600여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 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몽고군-말-목마장-용마산-마산포로 이어지는 연결이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몽고군이 ‘몽고정’만 남긴 것이 아니라 ‘마산’이라는 이름까지 남겼다는 주장, 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창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재위하던1408년에 탄생하였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1425년 세종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창원'과 '마산' 중 어느 지명이 먼저 생겼을까요?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요?<<<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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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역에 관한 좋은 자료네요 ...
    마산이 왜 마산일까 가끔 별생각없이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것 같은데...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11 15: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 골드 2010.06.11 10: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제 KNN 다큐"마산"에 나오시더군요. 박사님의 글을 보고 마산의 근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 허정도 2010.06.11 15:11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시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야 되겠지만, 마산시가 없어지는게 저는 참 서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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