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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72114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원본>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 녹취/2010107)

 

나는 19603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을 본 후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35세로 얼음소매상을 하며 마산시 산호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투표권이 있었으며, 내가 어느 당을 찍고 어느 입후보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인데 왜 선거에 개입해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관여를 하고 위협을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컸고, 그래서 이 선거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투표함이 집결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정남규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후 내 머리에는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 민주당원들을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가 더해 갔다.

나는 부림시장을 지나 시청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섰다.

630분경 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지프와 소방차 등을 배치, 방어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몰려들었.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정선거 개표가 시작되고 있는 마산시청을 점령하기위해 수차례 전진 후퇴를 계속했다. 경찰은 우리를 막기 위해 공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 그곳을 피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근처 길가 무릎높이의 하수구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경찰 쪽으로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그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멀리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얼굴이 노출되어 데모주모자로 잡히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기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시민들은 이제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투석전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나는 데모 군중들과 함께 시청 쪽으로 가서 투석을 하다가 경찰이 총격을 가해오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총소리를 피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뒤 법원 골목 어딘가에 있을 때였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달려오면서 "저 총 맞았어요. 총알이 제 팔을 관통한 것 같아요" 했다.

살펴보니 다행히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총을 맞은 학생을 보고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이제 정말 전쟁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청 앞에서 투석전과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총소리가 시민들을 물러나게 하는 공포사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우리들 심장을 겨누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사격을 가해오는 경찰들의 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적개심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총상을 당한 학생을 살펴본 후 치료를 권유하며 가까이에 도립마산병원이 있음을 알려주고, 나는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투석전을 계속하며 자산동 쪽으로 이동해 나왔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중과부족으로 점점 자산동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때 소방차 한 대가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인지 마산시청에서 자산동 쪽으로 달려왔다.

자산동 무학국민학교를 조금 지나 지금 경남데파트가 있는 곳 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것이 벼락 치는 소리나 대포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는 총이 아니라 아예 시민들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일까 생각하니 전쟁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빛이 확 하고 번지며 온 천지를 밝혔다.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설명하는 걸 들으니 북마산파출소에 불이 나 불 끄려고 가던 소방차가 데모대의 돌 세례를 맞아 그만 전봇대를 들이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연이어 아름드리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간이 8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정말인가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그 현장을 보았다.

정말 세 동강이가 난 전봇대가 큰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넘어진 전봇대를 옮겨 일단 길을 막도록 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당시 나는 크고 무거운 얼음 판매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힘이 꽤 좋았다. 따라서 전봇대는 내가 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고 당기며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동강난 전봇대를 무학초등학교 앞길에 가로놓게 함으로써 길을 차단해 경찰의 접근을 막고 또 데모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땅에서 줍지 말고 철길에 있는 자갈을 사용하자고 말하면서,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로 올라갔다. 학생들에게 돌은 함부로 쓰지 말고 일단 차들이 철길 밑을 지나갈 때 뒤를 보고 퍼붓자고 시켜놓았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예상한 것처럼 조금 있으니 선거함을 실은 차가 북마산 지역에서 성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시청 쪽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다가 왔다. 그 차 안에는 모자를 눌러 쓴 4~5명의 경찰이 타고 있었고, 선거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듯 했다.

그 시간으로 봐서 아마 마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개표를 위해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함을 실은 차는 시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철길 밑을 통과하자 철길 위에서 우리가 퍼붓는 돌 세례에 다급히 차를 되돌려 도망쳤다.

우리들이 던진 돌 세례를 피하기 위해 선거함 뒤로 숨거나 선거함을 뒤집어쓰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0여 분 후 9시경이 되었을까, 또 지프 한 대가 다가왔다. 형상으로 보아 좀 높은 사람들이 타고 또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차를 향해서도 돌 세례를 퍼부었으나 덮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 투석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내 바리케이드 앞에 다가와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곧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시 조금 지나서 차가 한 대 현장에 도착했다. 세히 보니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이 차도 바리케이드로 인해 더 이상 가지못하고 다른 차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머물러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철둑에서 내려와 보니 젊은이들이 달려들어서 벌써 총을 모두 뺏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유혈 사태로 갈 우려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우리가 대치하는 원인과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군인들이 무조건 명령에 움직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으로 간주하여 가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정신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먼저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렇게 항거하는 것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인데, 너희들이 만약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명령이라면서 총을 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 젊은 너희들은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렇게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총을 잃고 가면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총은 돌려주겠다. 여기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너희 부모와 형제들이다. 록 군복을 입었어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며 빼앗았던 총을 돌려주었다.

군인들은 "고맙습니다" 며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군인들을 돌아가게 했을 때, 시청 쪽의 총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드디어 우리 가까이서 총을 쏘아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들 심장이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숨어 대항해보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없이 어둠 속에서 무학초등학교 담을 넘어 철길을 따라 겨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경찰들은 데모대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날뛰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옷이 물에 빠진 듯 젖어 있고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가 나를 기억할까 너무도 두려웠다.

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자라면서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선두에 서서 사태를 주동한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위해를 가해올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때 셋째 딸을 갓 출산했었고,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렇게 건장했던 몸이 사흘 동안 어깨와 팔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잠을 자면 온 몸이 가위에 눌리었고, 정말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에 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당시 실제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붙잡히면 혹독한 벌을 받았으며, 공산당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연일 이어졌다.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였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처벌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날 밤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간혹 세상이 달라지는 듯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음속에 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고 모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밤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3·15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하상칠이 참가했다고 증언한 3 15의거 당일 시청 앞 야간 시위는 3 15의거의 백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그의 증언 중 이미 확인된 사항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의 증언으로 새로이 밝혀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시해두고자 한다.

그는 오후 6시 경 집을 나와 시청으로 가던 중 오동동빠 근처에서 정남규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것을 (증언록, 474) 보고 선거무효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시각에 정남규는 민주당원이 주도한 가두시위 중 오후 3시 반경에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음은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므로 다른 사람을 착각했음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시각에 오동동빠 근처에서 누군가 연행되었다는 증언은 우리가 알기에 다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기에 사실이라면 최초의 언급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증언 중 유일하게 사람이나 시간 또는 장소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항인데 사건 후 50년이 지났고 85세 노인의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후 8시쯤 지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동강이 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소방차가 북마산파출소 화재 진압 차 출동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다수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북마산파출소 화재는 930분경으로 알려져 있고, 시청 앞 도로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경찰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살수를 하던 여러 소방차 중 하나가 갑자기 데모군중 쪽으로 돌진해왔다는 것이고, 이 돌진의 이유가 운전수의 돌발 행동인지 지휘자의 지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3 15의거사』 300쪽에 살수를 하면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 중 하이라이트는 첫째 동강난 전신주를 직접 옮겨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트를 친 것, 둘째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 위로 올라가 이 길을 통과하려던 두 대의 차량에 투석해 되돌아가게 만든 것, 셋째 마지막으로 세 번째 차량을 타고 온 군인들에게서 시위대가 총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이들을 설득해 총을 되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에게는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설득해 유혈사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요지의 진술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거의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소문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참가했거나 옆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사건 중 두 개가 국회조사단 앞에서 도경수사과장 김경술의 증언 속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권종림은 ... 9시 경 무학초등학교 앞 노상에 쓰러져 있는 전주로서 국도를 차단하고 동시에 박주복은 구한오를 지휘, 구마산 방면으로 통과하는 쓰리코타 운전수인 육군502 장거리 통신대 마산 파견대 소속 상사 이재중을 구타하여 동 인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 일정을 탈취하고 실탄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본인에게 반환하고..., 구한오는... 오후 9시경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군 쓰리코터에 대한 투석사건에 가담하였고 군인 이재중의 총기를 박주복, 정상숙과 같이 탈취했다가 반환한 제정수(시당 감찰위원)... (315의거 증언록, 676)'이라고 말했다.

김경술의 증언은 경찰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당시 경찰은 빨갱이의 소행이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여기서 지목된 각 사건의 행위자를 실제의 행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들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증언은 이들 사건에 대해 시위 참가자 측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세한 전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사기록과 모든 증언을망라한 면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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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길었고, 나머지 대부분도 자유당 각료들과 국회의원들 이야기였으며, 조병옥, 장면 등 야당정치인 몇명의 이름도 본 것 같다.

거기에 이용범도 올라있는 걸 기억하는 건 당시 그의 이름이 마산 창원을 통털어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많이 쓰는 신사정치인정도 내용이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여당에 오히려 누가 될 희작이 되었겠지만, 그때 나의 머리엔 그런 인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엔 여당성향의 우리집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 1,2년 때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단체관람하면서 느꼈던 감동의 일단도 기억에 남아있어 약간의 부끄러움을 환기시켜준다. 담임선생님이 여늬때와는 달리 반강제적이라 할 만큼 적극 권유했던 영화였다.

 

이승만역으로 김진규가 나왔고, 김승호, 최무룡, 최남현, 허장강, 주선태 등등,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이름깨나 있다는 배우는 다 동원되었던 영화였다.

일제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좌절함이 없이 애국지사들을 영도하여 투쟁의 길에 매진하는 독립투사의 근엄하면서도 처절한 모습, 김진규의 생김새와 연기가 그 역에 잘 어울려 그런 분위기를 더 느끼게 했던 것 같다.

특히, 양팔과 양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해떠오르는 동해가로 한발 두발 걸어가며 민족의 미래를 다짐하던 끝장면은 그 후 한참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감동을 재현시켜주곤 했었다.

자유당이 적극적 친일행위자들을 중심으로 이룩된 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자도, 심지어 반대당이 뿌린 유인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내 고3때 전개되었던 정부통령 선거운동 기간 내내 전국의 담벼락들에 도배되다시피했던, 민주당의 부통령후보 장면에 대한 비방 벽보(구국철혈동지회란 명칭 밑에 일본 고위관료나 작위수여자가 입었던 금빛 제복 차림의 장면이 의자에 앉아있는 사진)가 더 나의 눈길을 끌었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선거기간 중에 위암으로 사망했으니 부통령 자리만 쟁점이 되었던 시기였다.

 

나는 친구들이 이승만이나 이기붕을 비난하면, 애국지사 이승만은 물론 스마트한 양복차림의 이기붕까지 근거도 없는 외교력을 내세워 옹호했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던 민주당구호보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자유당구호의 합리성을 더 강조하기도 했었다.

이승만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그해 전교생을 의무적으로 참여시킨, ‘이대통령 탄신 00주년 기념 글짓기대회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평소 한번도 문재를 인정받아 본 경험이 없었었는데, 이때 시조형식을 빌어 그 감동을 표현했더니 분외의 평가가 따라와서 놀랐다. 학교에서 뽑히고 시(市)에서 뽑혀 도(道)에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전국 예심을 통과하진 못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으며, 심지어 나에게 뛰어난 문재가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했다.

그것이 종당엔 이과 출신인 내가 문과인 국문과 지망을 하게한 단초가 되기도 했었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사고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 일생의 삶을 지배했으니 참 우습기도하다.

이승만 관련 행사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인잔치다.

매년 이승만의 생일날 전국의 지자체별로 노인들을 모아놓고 술밥간에 대접하며 축하잔치를 벌였었다. 주로 무학초등학교에서 많이 벌였다고 들었는데, 푸짐한 상차림과 술추렴에 대해 다녀온 노인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 자리에선 주로 공무원들의 주도로 이승만에 대한 찬사와 후계자 이기붕에 대한 칭찬이 머리에 박힐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찬사경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다못해 입바른소리를 하다가 멱살 잡혀 끌려나간 노인 이야기도 들은 일이 있다.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해 손톱이 다 뽑혔다느니, 지금의 일본정권은 이승만만 보면 두려움에 떤다느니 하는 말들이 끊임없이 들려왔고, 학교 아침조례 때 항시 있은 교장훈시’에서도 그런 내용으로 삼사십분에 걸쳐 침을 튀기던 여러 교장들을 보았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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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구경한 일도 없다.

거기서 이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도 길을 가로지르는 어린내(어린천, 현 삼호천, 마산종합운동장 옆을끼고 내려오는 하천)’가 있어 다리가 놓였으나, 그건 양덕교보다 훨씬 뒤였고, 규모도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합포초등학교 1학년 때 간 팔룡산 소풍 길에서 어린천 징검다리를 선생님 도움 받아가며 건너던 영상이 어렴풋이 남아있기도 하다.

후에 놓인 다리의 모습도 내의 양쪽을 간단하게 이어놓은 형태라 할까. 그래서 다리가 파손 되었을 때에도 차도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길옆을 무너뜨려 만든 길로 냇바닥으로 다녔다.

큰 물 흐르는 날도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위 아래쪽의 제방들이 큰 공사한 흔적 없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되어있었다.

<70년대 어린교(위 사진 ; 70년대 초, 아래 사진 ; 70년대 말) / 사진 왼편에서 어린교로 뻗어나오는 도로는 현 마산고속버스터미널(75년 건립) 앞 도로>

 

그런 여건 때문에 어린교 이삼십 미터 아래쪽부터 바다 초입에 걸쳐(지금 삼각지 남단일대) ‘갈치막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갈치막이란 당시 산호동 봉암동 일대 사람들이 만든 조어로서, 갈치 배를 갈라 내장과 아가미는 젓갈로 만들고, 갈라진 몸통은 말려 건어물로 상품화시키는 작업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몇 집이 모여 했으니 전후의 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십 년대 후반에는 조그만 마을을 이룰 정도가 되어, 장마철에는 덜마른 생선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주위로 풍기곤 했었다.

<부산 감천마을에 있는 갈치건조장(갈치막)>

 

양덕교는 어린교 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다리였다.

지금의 양덕 오거리까지 매축지라고 앞에서 얘기했거니와,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만든 물길이 바다에 닿도록 돌로 쌓은 방죽이 있었는데, 동쪽 것은 청수들 둑으로 연결되고, 서쪽 것은 갈치막까지 나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지금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래서 밀물 때는 바닷물과 냇물이 합수되는지라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하천 폭을 넓혔기에 다리 길이가 긴 것은 이해되거니와, 높이가 왜 그렇게 높았던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제방보다 사오 미터 높아 보였으니 지금 다리보다 이삼 미터 혹은 삼사 미터 높게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거기 고개도 당시엔 꽤 높게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다리에 파손이 생긴 일이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바닥에 구멍이 생겨 거기로 아래 냇물을 신기한 느낌으로 본 것도 여러 번이요, 여기저기 금간 자국 때문에 아예 다리 아래로 가교를 놓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시공사를 욕했지만, 막연한 투덜거림일 뿐 회사명과 대표 이름 따위는 몰랐던 것 같았는데, 이용범이 창원에서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급격히 퍼졌던 것 같다.

대동공업사가 전쟁으로 떼돈을 벌었으며,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의 자금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는 다리 고장 때 마다용벰이 다리가 그렇지 뭐’ ‘시멘트는 다 빼돌리고 밀가루로 발랐으니등의 비아냥이 사람마다의 입에서 예사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오늘 인부들 시켜 다리 들고 있게 하고는 공사비 타내고, 내일 놓아버려도 또 공사비 다 타내니하는 등등의 우스갯말도 많이 오갔었다.

그런 야유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담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자유당 몰락 후 몇 년에 걸쳐 나왔던 기록물들을 통하여 확인했던 것이다.

창원 동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돈 벌어 와서 대동공업사를 세워 미국 막사 지어주고 잘 보여 전시 토건공사로 떼돈을 모아 집권 자유당 실권자 이기붕의 돈줄을 자임함으로써, 창원에서 돈 봉투와 고무신, 막걸리로 2선을 하고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까지 하다가 결국 혁혁한 코미디를 남겼다.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 투표에서 의 구분을 못해 반대로 찍음으로써 2/3 득표를 못한 자유당이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한국 정치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부를 남겨 놓은 것이다.

양덕교나 어린교 공사를 대동공업사가 한 것인지 확인된 바는 없었겠지만, 저간의 이런 저질적 정치행위로 하여, 부실공사에는 의례 용벰이다리딱지가 따라 다녔으리라.<<<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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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이들 3파는 해방 이틀 후인 19458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으로 바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원장 명도석)를 함께 결성해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건준은 해방 후 지역에서 생겨난 최초의 자치기구인 동시에 사회단체였다.

이처럼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에는 친일혐의가 있는 일제하의 시의원 출신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미군정과 함께 두 갈래로 나뉜 사회운동-

이같은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산의 사회운동은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좌우익 분열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사회주의자들은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3·15의거 당시 반공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의 모태가 됐다.

한편 건준에서 우익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들은 특히 1946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에서 12~17명, 창원군에서 5명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3·15의거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보다 훨씬 대규모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2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마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의 휴전반대 시위 / 1953년> 

 

-10월 봉기 이후 저항세력 일소-

그러나 이들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대부분을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는 물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19603·15 정선거를 계기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3·15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운동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5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전국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노현섭(우측 사진)씨는 전국유족회장을 맡아 이 운동을 주도하지만 이듬해 5·16데타 직후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좌절되고 만다.

4·19에서 5·16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혼란기로만 알려져 있다. 많은 운동단체가 생겨났고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니 위정자의 입장에선 혼란기로 볼만하다. 그러나 이는 억눌렸던 요구의 자연스런 분출이었다.

4월혁명 때 민중이 흘린 피의 댓가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연히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이승만 장기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같은 국민의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의 배려하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뺑소니를 쳤지만 그 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이들을 단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의사당 앞에는 대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매일같이 몰려가 데모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에 의하여 국회해산 데모가 일어났다.

4·19이후 석방된 정치범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도 발생했다.

과도정부가 자유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던 자들을 모두 석방은 했으나, 그들

에 대한 공민권을 회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 직후는 과연 혼란기 였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잠재돼 있던 평화통일 논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비롯,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긴 남북학생회담 추진이그것이다.

마산의 혁신세력은 196055일 <마산일보>에 ‘한국 혁신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7일 혁신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지만 1961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요인물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사회대중당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역시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 김해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간다.

 

<1960년 영세중립화평화통일추진위원회 결정 / 현, 경남은행 창동 지점 앞>

 

특히 이 단체가 116일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해 마산시민의 높은 통일 열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4월혁명 이전까지 전국의 교사들은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3·15정선거 때도 어김없이 동원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도 정권의 지시에 따라 데모를 막는 데 앞장섰다.

명 이후 자괴감을 느낀 교사들이 앞장서 교원노조를 결성, 교육민주화투쟁에 나선 것은 교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산에서511일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발족되고 18일에는 성호초등학교 강당에서 공식 출범식을 갖는다.

초등위원장은 성호초교 교사였던 황낙구씨였고, 중등위원장은 마산고 이봉규씨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민주당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은 그 태생에서부터 친일파와 수구·반공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후신이었으니 4월혁명을 제대로 수행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기가 죽은채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3·15부정선거 원흉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7·29총선에 출마하는 등 반혁명세력의 준동이 되살아났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산 3·15부정선거의 원흉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이용범의 재출마였다.

마산의 3·15청년동지회(회장 강대인)와 한얼동지회(회장 김봉세) 등 단체들은 창원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한 이용범을 규탄하며 오동동 자택 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사회운동은 19615·16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5·16 군사 쿠테타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의 김문갑,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교원노조 이봉규 씨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정당·사회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린 군사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연맹 등 관변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사회도 다시 우익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3·15의거와 4·19혁명 직전까지 이승만 독재에 빌붙어 그의 선거유세를 다녔던 마산의 문화권력 이은상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또한 쿠데타의 주체세력 중 한명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지역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게된다.

이들 권력자와 각종 관변단체에 의해 장악된 마산의 지역사회는 1979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무저항의 도시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마민주항쟁이후 ‘민주성지’로서 체면을 되찾았지만, 해방직후와 3·15거 직후의 활발했던 진보적 사회운동의 명성을 회복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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