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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구경한 일도 없다.

거기서 이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도 길을 가로지르는 어린내(어린천, 현 삼호천, 마산종합운동장 옆을끼고 내려오는 하천)’가 있어 다리가 놓였으나, 그건 양덕교보다 훨씬 뒤였고, 규모도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합포초등학교 1학년 때 간 팔룡산 소풍 길에서 어린천 징검다리를 선생님 도움 받아가며 건너던 영상이 어렴풋이 남아있기도 하다.

후에 놓인 다리의 모습도 내의 양쪽을 간단하게 이어놓은 형태라 할까. 그래서 다리가 파손 되었을 때에도 차도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길옆을 무너뜨려 만든 길로 냇바닥으로 다녔다.

큰 물 흐르는 날도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위 아래쪽의 제방들이 큰 공사한 흔적 없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되어있었다.

<70년대 어린교(위 사진 ; 70년대 초, 아래 사진 ; 70년대 말) / 사진 왼편에서 어린교로 뻗어나오는 도로는 현 마산고속버스터미널(75년 건립) 앞 도로>

 

그런 여건 때문에 어린교 이삼십 미터 아래쪽부터 바다 초입에 걸쳐(지금 삼각지 남단일대) ‘갈치막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갈치막이란 당시 산호동 봉암동 일대 사람들이 만든 조어로서, 갈치 배를 갈라 내장과 아가미는 젓갈로 만들고, 갈라진 몸통은 말려 건어물로 상품화시키는 작업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몇 집이 모여 했으니 전후의 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십 년대 후반에는 조그만 마을을 이룰 정도가 되어, 장마철에는 덜마른 생선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주위로 풍기곤 했었다.

<부산 감천마을에 있는 갈치건조장(갈치막)>

 

양덕교는 어린교 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다리였다.

지금의 양덕 오거리까지 매축지라고 앞에서 얘기했거니와,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만든 물길이 바다에 닿도록 돌로 쌓은 방죽이 있었는데, 동쪽 것은 청수들 둑으로 연결되고, 서쪽 것은 갈치막까지 나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지금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래서 밀물 때는 바닷물과 냇물이 합수되는지라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하천 폭을 넓혔기에 다리 길이가 긴 것은 이해되거니와, 높이가 왜 그렇게 높았던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제방보다 사오 미터 높아 보였으니 지금 다리보다 이삼 미터 혹은 삼사 미터 높게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거기 고개도 당시엔 꽤 높게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다리에 파손이 생긴 일이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바닥에 구멍이 생겨 거기로 아래 냇물을 신기한 느낌으로 본 것도 여러 번이요, 여기저기 금간 자국 때문에 아예 다리 아래로 가교를 놓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시공사를 욕했지만, 막연한 투덜거림일 뿐 회사명과 대표 이름 따위는 몰랐던 것 같았는데, 이용범이 창원에서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급격히 퍼졌던 것 같다.

대동공업사가 전쟁으로 떼돈을 벌었으며,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의 자금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는 다리 고장 때 마다용벰이 다리가 그렇지 뭐’ ‘시멘트는 다 빼돌리고 밀가루로 발랐으니등의 비아냥이 사람마다의 입에서 예사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오늘 인부들 시켜 다리 들고 있게 하고는 공사비 타내고, 내일 놓아버려도 또 공사비 다 타내니하는 등등의 우스갯말도 많이 오갔었다.

그런 야유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담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자유당 몰락 후 몇 년에 걸쳐 나왔던 기록물들을 통하여 확인했던 것이다.

창원 동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돈 벌어 와서 대동공업사를 세워 미국 막사 지어주고 잘 보여 전시 토건공사로 떼돈을 모아 집권 자유당 실권자 이기붕의 돈줄을 자임함으로써, 창원에서 돈 봉투와 고무신, 막걸리로 2선을 하고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까지 하다가 결국 혁혁한 코미디를 남겼다.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 투표에서 의 구분을 못해 반대로 찍음으로써 2/3 득표를 못한 자유당이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한국 정치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부를 남겨 놓은 것이다.

양덕교나 어린교 공사를 대동공업사가 한 것인지 확인된 바는 없었겠지만, 저간의 이런 저질적 정치행위로 하여, 부실공사에는 의례 용벰이다리딱지가 따라 다녔으리라.<<<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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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이들 3파는 해방 이틀 후인 19458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으로 바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원장 명도석)를 함께 결성해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건준은 해방 후 지역에서 생겨난 최초의 자치기구인 동시에 사회단체였다.

이처럼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에는 친일혐의가 있는 일제하의 시의원 출신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미군정과 함께 두 갈래로 나뉜 사회운동-

이같은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산의 사회운동은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좌우익 분열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사회주의자들은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3·15의거 당시 반공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의 모태가 됐다.

한편 건준에서 우익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들은 특히 1946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에서 12~17명, 창원군에서 5명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3·15의거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보다 훨씬 대규모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2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마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의 휴전반대 시위 / 1953년> 

 

-10월 봉기 이후 저항세력 일소-

그러나 이들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대부분을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는 물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19603·15 정선거를 계기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3·15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운동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5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전국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노현섭(우측 사진)씨는 전국유족회장을 맡아 이 운동을 주도하지만 이듬해 5·16데타 직후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좌절되고 만다.

4·19에서 5·16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혼란기로만 알려져 있다. 많은 운동단체가 생겨났고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니 위정자의 입장에선 혼란기로 볼만하다. 그러나 이는 억눌렸던 요구의 자연스런 분출이었다.

4월혁명 때 민중이 흘린 피의 댓가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연히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이승만 장기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같은 국민의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의 배려하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뺑소니를 쳤지만 그 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이들을 단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의사당 앞에는 대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매일같이 몰려가 데모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에 의하여 국회해산 데모가 일어났다.

4·19이후 석방된 정치범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도 발생했다.

과도정부가 자유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던 자들을 모두 석방은 했으나, 그들

에 대한 공민권을 회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 직후는 과연 혼란기 였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잠재돼 있던 평화통일 논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비롯,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긴 남북학생회담 추진이그것이다.

마산의 혁신세력은 196055일 <마산일보>에 ‘한국 혁신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7일 혁신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지만 1961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요인물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사회대중당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역시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 김해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간다.

 

<1960년 영세중립화평화통일추진위원회 결정 / 현, 경남은행 창동 지점 앞>

 

특히 이 단체가 116일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해 마산시민의 높은 통일 열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4월혁명 이전까지 전국의 교사들은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3·15정선거 때도 어김없이 동원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도 정권의 지시에 따라 데모를 막는 데 앞장섰다.

명 이후 자괴감을 느낀 교사들이 앞장서 교원노조를 결성, 교육민주화투쟁에 나선 것은 교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산에서511일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발족되고 18일에는 성호초등학교 강당에서 공식 출범식을 갖는다.

초등위원장은 성호초교 교사였던 황낙구씨였고, 중등위원장은 마산고 이봉규씨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민주당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은 그 태생에서부터 친일파와 수구·반공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후신이었으니 4월혁명을 제대로 수행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기가 죽은채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3·15부정선거 원흉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7·29총선에 출마하는 등 반혁명세력의 준동이 되살아났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산 3·15부정선거의 원흉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이용범의 재출마였다.

마산의 3·15청년동지회(회장 강대인)와 한얼동지회(회장 김봉세) 등 단체들은 창원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한 이용범을 규탄하며 오동동 자택 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사회운동은 19615·16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5·16 군사 쿠테타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의 김문갑,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교원노조 이봉규 씨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정당·사회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린 군사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연맹 등 관변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사회도 다시 우익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3·15의거와 4·19혁명 직전까지 이승만 독재에 빌붙어 그의 선거유세를 다녔던 마산의 문화권력 이은상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또한 쿠데타의 주체세력 중 한명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지역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게된다.

이들 권력자와 각종 관변단체에 의해 장악된 마산의 지역사회는 1979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무저항의 도시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마민주항쟁이후 ‘민주성지’로서 체면을 되찾았지만, 해방직후와 3·15거 직후의 활발했던 진보적 사회운동의 명성을 회복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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