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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6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9) -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4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역사 연구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다. 술과 같은 음식문화도 그런 흐름을 타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사실 유교주의적 학문 세계 속에서 먹는 것이라든가 입는 것, 또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분야는 늘 소외되어 왔다.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 굶어죽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인 반면, 의리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역사에서는 국가나 민족, 이념, 엘리트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생활 그 자체 역시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최근에 이르러 인문학자들에게 중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음식문화는 국가라는 단위보다는 대체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지역사회를 이해하는데 좋은 재료가 된다.

마산 지역 사회는 해산물과 농산물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있고,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접점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매우 독특한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를 통해 이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종래와는 다른 역사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의례 중에 제천의식이 있다. 여기에서는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곧 음주가 하늘에 대한 제사 의식에서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곧 술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로 인식하였으며, 이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도 각종 의례에 빠짐없이 술이 등장하였다.

 

-술에 대한 기억들-

마산 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이곳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 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라 말한다..... 주객은 만날 때에 여러 번이나 잔을 든다”라고 읊었다.

두 사람 모두 바다와 산, 그리고 바위가 어우러진 마산의 풍광, 특히 유선으로 불린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 주변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시로 묘사하였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남긴 시에도 월영대와 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숙종 때에 행정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김이건이라는 사람은 “조창에서 곡식을 싣고 출발하기 전에 위로의 마음으로 음식을 내려주고 포구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어”라는 조금 색다른 시를 남겼다.

조운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한양까지 가는 일은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하였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관청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춤까지 추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술이 항해의 안전을 축원하는 용도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요정 망월관 (1908년)>

 

마산 지역 사회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술과 관련된 기록은 저 정도이지만, 1899년의 개항 이후에는 각종 기록, 특히 일본인들인 남긴 자료 속에서 술과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마산 지역에 진출해서 주목한 것은 좋은 물과 기후, 그리고 인근의 풍부한 물산이었다.

곧 양주업을 하는데 최상의 곳이라고 판단하였다. 예를 들어 물의 경우 마산의 물은 감로수와 같다고 평가하였다.

무학산 뒤편에 자리한 감천리의 물로 막걸리를 빗으면 청량 사이다와 같다던가, 세찬 완월 폭포의 물을 기관차에 넣으면 오르막길도 힘차게 올라갈 정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물에 대한 믿음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산 시내의 샘물 중에서도 광대바위 샘물(일명몽고정)을 비롯한 몇 곳의 샘은 1911년의 총독부 검사 결과 가장 우수한 샘물로 인정을 받았다.

물론 이 샘들은 1919-20년에 마산을 비롯한 전국을 휩쓴 콜레라 발생 이후 공동수도가 생기는 바람에 쇠퇴하였지만, 아직까지도‘물 좋은 마산’이라는 별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일제 강점 이후 일본식 술인 청주의 재료는 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야 했다.

마산 인근의 고성, 김해, 창원과 같은 넓은 들에서 필요한 쌀을 공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는기후도 술을 빗기에 좋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일본인만이 알았던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남부 지방은 조선조 말기에도 술도가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전통식 주조장은 전국에 모두 155,000개였는데, 이 중 경상남도에 22,853개, 경상북도에 26,298개가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경기도와 전남 및 충남에 각각 1만여 개, 그리고 북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대략 4,000개-7천 개 정도가 있었다.

곧 남부가 많고 그 다음이 중부, 그리고 북부의 순이었다.

조선시대의 술 제조 양도 남부 지방이 우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도 결국 물산과물, 그리고 기후 탓이라고 생각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술 제조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전략-

마산 지역이 술의 생산지로 양호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곧바로 술의 주생산지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재정수입 확보라는 식민지 경제전략이 마산을 술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사실 조선시대의 술은 대부분 주막과 같이 음식점과 숙박시설을 겸하던 곳에서 생산되거나 자가 소비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확보라는 측면보다 그야말로 음식의 일부였던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에 주세법을 제정하여 자가 제조의 술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술을 만드는 원료인 누룩에 대해서도 해당되었다. 누룩업을 통제하여야만이 주조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누룩제조조합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누룩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누룩은 대개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하였고, 일부는 경남지역에서와 같이 사원의 승려가 부업으로 이를 제조 판매하는 형국이었으나 이런 방식은 점차 소멸되었다.

새로운 일본식 주조 기술이 도입되었고, 이를 지도하기 위해 각 지방마다 기술관이 파견되었다. 또 주류협회를 조직한 다음, 이곳을 재정담당 관료가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34년에 이르면 주세는 국가 세입3할을 차지할 정도로 그 비율이 높아졌다.

또한 개항 이후 마산지역에 형성된 일본인 사회도 마산의 술 산업을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이 마산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러일 전쟁 이후였는데, 이때 이미 술 공장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1911년에 이르면 일본인이 세운 술공장이 14개나 되었다. 그와 더불어 술의 주종목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

일본인들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청주가 한국 사회에 도입되었다. 여기서 청주란 우리가 흔히 회집에 갔을 때 따근하게 데워달라고 주문하는 정종을 가리킨다.

이후 마산 지역에서 주로 청주를 생산하는 술 공장은 주인이 변하고 공장의 증감이 있기는 하지만 위의 숫자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들 청주업자들은 동업조합을 만들어 시내의 신사(神社)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모여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이들은 청주 질의 향상에도 힘을 쏟은결과 1920년대 초에는 일본에서 더 이상 청주수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930년대 중엽에 이르면 마산은 전국에서 최다의 술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지역 내 시장이 커진 탓도 있지만, 만주라는 큰 시장을 목표로 삼았던 덕도 있었다.

이것이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가 만주까지 ‘진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식 술 생산체제가 뿌리를 내리는 것과 병행하여 한국 술의 전통적 자가 생산 체제도 공장 생산 체제로 바뀌었다.

마산에서 탁주 회사가 설립된 것은 대략 1920년대 후반인 듯한데, 이후 주식회사나 합자회사 형태의 탁주회사가 주로 창동 일대의 마산포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청주 공장이 대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신마산 지역이나 중앙동, 장군동 등 중앙 마산 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진 것과 대비된다.

탁주 회사 자체가 대규모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므로 당연히 생산량도 증가하였으니, 1928년에 1,500(1석은 약 큰 말로 10斗)이던 것이 1938년에는 약 5만석으로 증가하였다.

술 제조업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산업으로 인식된 것이다. 마산 술 산업의 성장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 경제에서 마산 지역이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청주와 탁주-

일제의 경제전략으로 술 산업이 발전하면서 당시의 조선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도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의 술 정책이 농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191943일에 있었던 삼진 만세 시위 때, 연도의 마을에서는 각자 빚은 술을 시위대에게 제공하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만든 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국가의 통제 정책에 따라 집마다 전해오던 특별한 술이나 지방색이 강한 술은 사라져 갔다.

이 때문에 당시의 농민들은 오늘날 술맛은 변해있고 즐거움도 그만큼 줄어 들었다고 한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쓴 뒤 마산에 내려와 살던 장지연도 하루종일 술을 마시면서 세상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성동의 석교(石橋)양조장이라는 청주 공장에서 만든 대전 정종(大典正宗)이라는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우국지사라고해도 일본 술에 익숙해있었던 셈이다.

사실 일제 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 중에는 마산의 술이 이름났던 이유를 꽃 속에서, 그리고 마산만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특히 조계지를 가로지르는 대곡천(大谷川) 가에는 유명한 고급 술집과 함께 벚꽃이 화려하였기 때문에 꽃필 무렵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관광의 마산』이란 팜플렛 표지에는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일본풍의 술통과 벚꽃이 흐드러진 곳으로 마산을 그리고 있다. 마치 이상향과 같은 이미지이다.

<마산부에서 관광안내서로 간행한『觀光の馬山』의 표지이다. ‘술과 꽃의 도시’마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이다.>

 

지금도 그 당시에 명성을 떨쳤던 고급 술집이 마치 폐허처럼 남아 있지만, 이곳은 일본에서 들여온 기생과 음악, 멋진 음식과 술로 인해 마산의 명사들이 모이던 사교장 역할을 하였다.

마산포 일대에도 전통적인 조선식 술집과 더불어 중국식 술집, 그리고 일본식 술집 등이 잇따라 생기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여러 술이 민족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공존하는 새로운 술 문화가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식 청주는 지역의 ‘상류인사’에게 고급스런 술집에서 마실 수 있는 술로 선택되었던 것 같다.

국가의 기술감독, 기술자 초빙 및연구실 설치, 품평회를 통한 질의 향상, 그리고 고도의 영업전략 등 모든 수단이 동원된 결과였다.

이에 비해 영업전략을 갖지 못한 탁주는 그저 그런 술집에서 ‘보통의 한국인’들이 먹는 술로 인식되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위생이나 뒷맛 등의 이유를 들어 탁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산 거주 한국인들도 대체로 고급스런 청주와 그렇지 못한 탁주라는 술의 위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물론 해방 뒤에도 변형된 채 이어졌지만 술의 도시 마산이라는 명성은 점차 쇠퇴하였다.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그들이 즐겨 마시던 청주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일본인에 의해 이식된 주조 기술이 한국인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해방 이후의 식량난도 주조업에 타격을주었다. 술을 만드는데 쌀을 사용하기가 점점 힘들어 졌던 것이다.

근대기 마산의 술 산업은 본래 식민지 당국의 재정정책과 통제, 일본인 이주자들의 욕망, 지역의 자연과 물적 조건, 그리고 이에 부응한 지역사회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우러지면서 마산 사회의 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유장근 /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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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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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한일병합된 1910년 마산 모습>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편이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서쪽으로 진동을 지나 진주로 가는 140리 길이었습니다.
좁은 오솔길로 여러 개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만 1908년 6월 폭 5m로 확장공사가 시행되어 1911년 3월 완성되었습니다(
朝鮮總督府 官報 第211號, 1911. 5. 16)

세 번째는 북쪽으로 칠원․창녕․현풍․성주를 지나 서울로 연결되는 길이었는데 확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음 그림은 병합 당시(1910년) 마산일대 도시상황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직전의 마산일대 지도(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를 기초로, 개항기 동안 간행된 각종 문헌을 자료로 활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지도의 아래 쪽 노란 색 칠한 부분이 신마산인데 노란색 중간 쯤 보이는 신월천(현 깡통거리)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하지만 개항 10년 후인 1910년 경, 이미 일본인들은 북쪽 원마산 방향으로 많이 뻗어나왔습니다. 근대식 도로도 현재의 장군천까지 건설되었습니다.

도시 중심에 길게 나있는 검은 선이 1905년에 개통한 철도 마산선입니다.
신마산 쪽에 마산역이, 원마산 인근(현 육호광장)에 구마산역이 있었으며, 이때 난 철로가 현 경남은행 본점 앞 중앙간선도로입니다.

지도처럼 마산포(원마산)와 신마산에만 도시가 형성되었을 뿐, 완월, 자산, 회원, 양덕, 석전, 합성지역 등은 그때까지 자그마한 자연취락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달 29일 이 사실을 정식으로 공포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신들의 땅임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한국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재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1911년 1월 1일 진해군항보호를 구실로 마산의 개항장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개항 당시에도 일본과의 교역 외에 타 국가와의 교역이 미미했던 마산항은 폐항이 된 이후에도 한국산 쌀의 대일 수출과 일제 소비성 물자 및 군수품 수입항으로 계속 활용됨으로써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습니다.

개항과 함께 찾아온 인구의 증가와 근대적 도시시설 출현,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등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마산포의 도시구조는 급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듯이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걸어온 마산도 1911년 진해에 군항이 설치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진해>

당시 진해 사정과 관련지어 마산도시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먼저 평정빈부(平井斌夫)가 쓴『마산과 진해만』의 기록입니다.

‘1911년 1월 마산의 개항이 폐쇄되면서 산업이 위축될 것 같았지만 원마산의 왕성한 교역과 상거래, 진해만 군사시설의 건축, 진해 신시가지의 건설 등에 의해 오히려 폐쇄 전보다 시장이 활발해졌다’ 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최근 친일 문제로 시끄러운 장지연의 『마산기행』기록입니다.

‘한 때 번성의 극치를 이룬 마산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한 이래 마산의 상인들이 진해 쪽으로 넘어가는 이가 많아 요사이는 오히려 1911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점포들도 활기를 과거에 비해 잃었다’
고 한 것입니다.

두 주장은 각각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항기 이후 발간된 자료들과 1911년에 시작되는 남성동 해안 매립공사 등을 보면 장지연의 글처럼 마산이 비록 ‘과거에 비해 활기를 잃었다’ 하더라도 마산도시 전체가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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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3
  1. 선비 2011.05.02 10: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진해의 모습이 훨씬 정도되고 좋은 것 같네요.

    • 허정도 2011.05.02 20:57 신고 address edit & del

      일제의 진해 건설 초기사진입니다.
      잘 계시죠?

    • blokken 2011.05.13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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