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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일본인이 계획한 신마산의 모습>

-마산전도(馬山全圖)*-
1907년 / 청목항삼랑(靑木恒三郞) / 율원경포당(栗原耕浦堂) / 1 : 4,500 / / 일본국회도서관

 

 

한일병합 직전 시기의 신마산 조계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제목인「마산전도」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을 ‘신마산’ 혹은 그냥 ‘마산’이라고 불렀으며 원래부터 한국사람들이 살았던 원마산(마산포)을 ‘구마산’이라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마산 최초로 개설된 중앙에 있는 도로를 진해본통(鎭海本通)으로 표기하는 등 도로의 명칭을 일본식으로 지어 사용하고 있으며 조계지 주변의 산 이름까지 일화산(日和山), 영성둔산(影星屯山) 등 그들 멋대로 지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지도가 제작된 시기에는 아직 개설되지 않고 계획 단계에 있었던 도로까지 표시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구분을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자료와 비교 분석해보면 산수상통(山手上通)이라고 불렀던 현 제일여고 앞 도로 이북의 지역은 도로가 개설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범례로 토지경매 때 나눈 등급을 표시하여 무색의 토지를 1등지(一等地, A급지), 유색의 토지를 2등지(二等地, B급지)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이는 다른 자료의 구분과 일치합니다.

그런가하면 그 때까지 경매되지 않았던 토지도 상세히 구분했는데 이에 의하면 제일여고 앞 도로인 고운로 이북의 토지는 그 때까지 미경매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토지는 등급별로 일련번호를 붙여 놓았습니다.

지도 최상부의 지점은 현재의 만날고개로 연결되는 위치인데 이곳은 무학산 너머에 있는 감천마을과 연결되는 고개입니다.

그곳에「함안도(咸安道)」라는 도로명칭이 적혀있고 함안도 아래의 직선도로,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앞 도로가 「함안신정(咸安新町)」이라는 것을 보아 옛 월영리와 함안의 연결도로가 만날고개를 지나 감천-중리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월영동에서 걸어서 함안까지 간다면 그 길이 가장 빠를 겁니다.

조계지 역역 안에 있었던 세 개의 하천에 11개의 교량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을 일화계(日和溪)로 불렀으며 신월천(깡통골목, 복개)을 신월계(新月溪), 월영천(경남대 앞 광장, 복개)은 월영계(月影溪)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창원천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래로부터 신월교․무학교․마산교․반룡교․대사교(大使橋) 등 다섯 개의 다리에 명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월천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는데 아래로부터 창원교․완월교․웅천교였으며․왼쪽 월영천에 있는 한 개의 다리는 진해교였습니다.
진해교는
현재의 진동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때만 해도 진동을 진해라 불렀기 때문에 진해교라고 한 것입니다.

일본인 전중 손(田中 遜)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4개의 콘크리트 교량은 그 시기와 위치를 보아 창원천에 있는 7개의 다리와 신월천의 3개 중 4개를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어느 다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중손은 일본궁내대신이었던 전중광현(田中光顯)의 아들입니다.
전중광현은 1906년 한황실 위문대사로 우리나라에 왔던 일본 고관으로 방문 당시 철도용지였던 마산 장군천 상류 일대 35만여 평을 100년 동안 농장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통감 이등박문과 임차계약을 하였습니다.
전중손은 바로 그 농장을 물려받은 자인데 그 농장이 월포원입니다.
전중손은 이 외에도 대규모의 가옥임대업과 건설업 및 수 백호의 소작인을 두고 농업경영을 하는 등 일제기에 마산을 호령했던 권력자이자 대부호였습니다.

함안신정(咸安新町)․본정(本町)․중정(中町)이라고 적힌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 갈래 길이 개항 초기에 ‘마산의 긴좌(銀座)’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변화했던 도로입니다.

이 지도를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해보면 매우 정밀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합방 이후 강점기가 진행되면서 개항 초기에 조계지내에 개설된 도로가 없어지거나 형태가 약간씩 바뀌었기 때문에 최초의 조계지 도시구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대단히 큰 지도입니다.

위 지도의 현재 모습이 아래 그림입니다. <<<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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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0 14: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11.01.10 16:57 신고 address edit & del

      오 기자, 반갑소.
      근황은 이야기 들었어요.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주세요.
      가족 모두 새해 좋은일 많이 있기 바랍니다.

2009.12.08 06:00

오래된 사진 두 장


삼광청주의 일제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마산에는 근대산업유산들이 제법 남아 있다.

유산이라 말할 정도가 아니라도 옛 사진에 나타난 과거의 모습과 현재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라져버린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자료이긴 하지만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마산의 옛 사진 두 장을 소개한다.

첫째 자료는 1910년 경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의 어느 시기 마산 전경사진이다.

                <맨 위가 일제기, 가운데는 10년 전, 아래는 최근 사진>

이 사진을 두고 개항기 마산사진이라고 소개한 곳도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이유는 사진에 나타난 시가지 형태다.
일본인들이 스스로 지칭한 소위 신마산이 이미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로의 개설 상태가 개항기를 훨씬 지난 1910년-1920년대 초반 경 어느 시기 임을 알 수 있다.

돝섬과 오른쪽 이시미곶, 그리고 건너보이는 산의 능선과 해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차분하고 아름답다.
이에 반해 최근 10-20년 동안 지어진 들쑥날쑥한 건물들이 얼마나 주변의 자연환경과 부조화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시미곶은 마산MBC송신소 자리다. ‘이시미끝발’이라고도 부른다. ‘이시미’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전설속의 구렁이 ‘이무기’의 방언이다.
이곳 지형이 마치 돼지(돝섬, 猪島)를 삼키려 접근하는 ‘이무기’의 모습과 비슷하다하여 붙인 지명이라고 전한다.
어떤가?
‘이시미’가 돼지(돝섬)를 먹으려고 서서히 물 위를 헤엄쳐 다가가는 것 같은가?


둘째 자료는 1910년대 중반 경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두월동 통술거리(쿄마찌, 京町) 남쪽 입구 사진이다.

<맨 위가 일제기 / 가운데는 10여년 전 / 아래는 최근, 빠른 속도로 낡아져간다>

두월동 통술거리(쿄마찌)는 당시 일본인들이 활거 했던 신마산 중심거리였다.
나무로 된 전봇대와 일본사람들이 반룡교라 불렀던 월남교의 난간이 뚜렷이 보인다. 보행자도 꽤 많다.
사진의 주인공 격인 오른쪽 건물은 마산시 두월동 2가 7-4번지 터로 모서리 땅이라 당시에는 상당한 요지였을 것이다.
70년대에는 2층이 제법 손님이 많았던 중국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직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언제 철거될지 시간을 다투고 있다.
일제기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상업용 건물인데 살려볼 길은 없을까?

<반룡교에 얽힌 이야기 하나>

이 다리는 일본인 전중손(田中孫)이 한일병합 이전 마산에 설치한 4개의 콘크리트 교량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쓴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의 기록을 참고한 추정이다.

전중손은 일본궁내대신이었던 전중광현(田中光顯)의 아들이다.
전중광현은 1906년 한황실 위문대사(韓皇室 慰問大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당시 철도용지였던 마산 장군천 상류 완월동 일대 35만여 평을 100년 동안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통감 이등박문과 임차계약을 했다.
경술국치 4년 전에 이미 '100년간 사용' 운운하는 이 따위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으니 '일제강점기 36년'은 순진한 계산법인 것 같다.
사실상 영원히 제것으로 하려는 꿍심이었다.

전중손은 아비로 부터 이 농장을 받고, 농장 이름은 ‘월포원’으로 지었다.
장군동의 장장군 묘가 월포원 내에 있었다고 하니 시내에 인접한 좋은 위치였다.
전중손은 대규모의 가옥임대업과 건설업을 했고, 수 백호의 소작인을 두고 농업경영을 하는 등 일제기 마산의 대부호였다.
1908년 5월 발족한 마산상업회의소 발기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된 것 외에도 일제기 마산기록물 도처에 전중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갑부에
일본제국의 궁내대신 아들이었으니 당시 마산에서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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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09.12.08 12: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오래된 사진을 보니 마산이 정말 오래된 곳이란 걸 실감하겠네요.
    특히 두번째 사진 오른쪽 기와집이 정겹네요.
    기왕이면 잘 보수돼서 오래도록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허정도 2009.12.08 13:0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이 집이라도 남겨서 공공을 위한 용도로 사용하면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라도 알 수 있겠죠.
      그나 저나 이 오래된 도시의 이름이 이제 없어진다니, 안타깝습니다.

  2. 파비 2009.12.08 12:5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우리 동네군요. 신기하게 100년 전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네요.

    • 허정도 2009.12.08 13:03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파비님 댁이 신마산 두월동 부근인가요?
      일제기에는 딸가닥 딸가닥 일본사람들의 게다 소리가 거리를 울렸던 곳에 사시네요.

  3. 골목대장허은미 2009.12.08 15: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별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길인데 역사기 있는 길이었군요

    • 허정도 2009.12.08 15:36 신고 address edit & del

      역사 없는 길 어디있고, 사연 없는 사람 어디있겠습니까?
      방문 감사합니다.

  4. 소벌도리 2010.03.11 06: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낙남산악회 최익환입니다. 마산의 미래를 디자인하다. 잘 읽고 있습니다.
    특히 마산의 역사에 관련된 궁금한 것을 많이 알았습니다. 미래의 마산을 디자인하시고 꼭 행복한 도시로 건축하시길 바랍니다.

    • 허정도 2010.03.11 07:39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최선생님.
      부족한 책을 좋게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을 계기로 마산에 큰 변화와 발전이 있도록 최선생님과 저,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힘을 모아야겠지요.

  5. 2010.04.27 22:10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6. 피노키오 2010.04.27 22:3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감사합니다. 숙제를 해야 했는 데 정말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0.04.28 12:57 신고 address edit & del

      피노키오님,
      방문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7. 마산중앙고생 2011.04.23 20: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제 집에 있던 책을 보다가 일제때의 마산사진을 보고
    고향 마산의 모습이 어땠는지 궁금해서 검색하다 우연히 들어오게되었는데,
    좋은글 감사합니다 . 남은글도 잘 보겠습니다 .
    윗글에 10년전 사진도 있는걸로 봐서 이 글의 연재를 10년전부터 계획하신건가요 ㅎㅎ

    • 허정도 2011.04.24 21:57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블로그 시작은 2년 정도 되었고요. 90년대 중반부터 마산연구를 했기 때문에 10년 전 사진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8. 우의영 2012.06.10 23: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 파란 기와집이 볼때 마다 좀 역사가 있겠다 싶었는데 과연 그냥 건물이 아니였네요

    • 허정도 2012.06.11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렇습니다. 저렇게 사그러지는 것이 아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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