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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72114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원본>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 녹취/2010107)

 

나는 19603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을 본 후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35세로 얼음소매상을 하며 마산시 산호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투표권이 있었으며, 내가 어느 당을 찍고 어느 입후보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인데 왜 선거에 개입해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관여를 하고 위협을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컸고, 그래서 이 선거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투표함이 집결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정남규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후 내 머리에는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 민주당원들을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가 더해 갔다.

나는 부림시장을 지나 시청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섰다.

630분경 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지프와 소방차 등을 배치, 방어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몰려들었.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정선거 개표가 시작되고 있는 마산시청을 점령하기위해 수차례 전진 후퇴를 계속했다. 경찰은 우리를 막기 위해 공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 그곳을 피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근처 길가 무릎높이의 하수구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경찰 쪽으로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그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멀리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얼굴이 노출되어 데모주모자로 잡히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기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시민들은 이제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투석전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나는 데모 군중들과 함께 시청 쪽으로 가서 투석을 하다가 경찰이 총격을 가해오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총소리를 피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뒤 법원 골목 어딘가에 있을 때였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달려오면서 "저 총 맞았어요. 총알이 제 팔을 관통한 것 같아요" 했다.

살펴보니 다행히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총을 맞은 학생을 보고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이제 정말 전쟁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청 앞에서 투석전과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총소리가 시민들을 물러나게 하는 공포사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우리들 심장을 겨누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사격을 가해오는 경찰들의 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적개심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총상을 당한 학생을 살펴본 후 치료를 권유하며 가까이에 도립마산병원이 있음을 알려주고, 나는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투석전을 계속하며 자산동 쪽으로 이동해 나왔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중과부족으로 점점 자산동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때 소방차 한 대가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인지 마산시청에서 자산동 쪽으로 달려왔다.

자산동 무학국민학교를 조금 지나 지금 경남데파트가 있는 곳 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것이 벼락 치는 소리나 대포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는 총이 아니라 아예 시민들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일까 생각하니 전쟁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빛이 확 하고 번지며 온 천지를 밝혔다.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설명하는 걸 들으니 북마산파출소에 불이 나 불 끄려고 가던 소방차가 데모대의 돌 세례를 맞아 그만 전봇대를 들이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연이어 아름드리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간이 8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정말인가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그 현장을 보았다.

정말 세 동강이가 난 전봇대가 큰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넘어진 전봇대를 옮겨 일단 길을 막도록 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당시 나는 크고 무거운 얼음 판매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힘이 꽤 좋았다. 따라서 전봇대는 내가 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고 당기며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동강난 전봇대를 무학초등학교 앞길에 가로놓게 함으로써 길을 차단해 경찰의 접근을 막고 또 데모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땅에서 줍지 말고 철길에 있는 자갈을 사용하자고 말하면서,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로 올라갔다. 학생들에게 돌은 함부로 쓰지 말고 일단 차들이 철길 밑을 지나갈 때 뒤를 보고 퍼붓자고 시켜놓았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예상한 것처럼 조금 있으니 선거함을 실은 차가 북마산 지역에서 성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시청 쪽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다가 왔다. 그 차 안에는 모자를 눌러 쓴 4~5명의 경찰이 타고 있었고, 선거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듯 했다.

그 시간으로 봐서 아마 마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개표를 위해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함을 실은 차는 시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철길 밑을 통과하자 철길 위에서 우리가 퍼붓는 돌 세례에 다급히 차를 되돌려 도망쳤다.

우리들이 던진 돌 세례를 피하기 위해 선거함 뒤로 숨거나 선거함을 뒤집어쓰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0여 분 후 9시경이 되었을까, 또 지프 한 대가 다가왔다. 형상으로 보아 좀 높은 사람들이 타고 또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차를 향해서도 돌 세례를 퍼부었으나 덮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 투석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내 바리케이드 앞에 다가와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곧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시 조금 지나서 차가 한 대 현장에 도착했다. 세히 보니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이 차도 바리케이드로 인해 더 이상 가지못하고 다른 차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머물러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철둑에서 내려와 보니 젊은이들이 달려들어서 벌써 총을 모두 뺏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유혈 사태로 갈 우려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우리가 대치하는 원인과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군인들이 무조건 명령에 움직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으로 간주하여 가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정신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먼저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렇게 항거하는 것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인데, 너희들이 만약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명령이라면서 총을 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 젊은 너희들은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렇게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총을 잃고 가면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총은 돌려주겠다. 여기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너희 부모와 형제들이다. 록 군복을 입었어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며 빼앗았던 총을 돌려주었다.

군인들은 "고맙습니다" 며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군인들을 돌아가게 했을 때, 시청 쪽의 총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드디어 우리 가까이서 총을 쏘아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들 심장이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숨어 대항해보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없이 어둠 속에서 무학초등학교 담을 넘어 철길을 따라 겨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경찰들은 데모대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날뛰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옷이 물에 빠진 듯 젖어 있고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가 나를 기억할까 너무도 두려웠다.

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자라면서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선두에 서서 사태를 주동한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위해를 가해올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때 셋째 딸을 갓 출산했었고,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렇게 건장했던 몸이 사흘 동안 어깨와 팔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잠을 자면 온 몸이 가위에 눌리었고, 정말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에 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당시 실제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붙잡히면 혹독한 벌을 받았으며, 공산당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연일 이어졌다.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였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처벌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날 밤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간혹 세상이 달라지는 듯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음속에 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고 모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밤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3·15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하상칠이 참가했다고 증언한 3 15의거 당일 시청 앞 야간 시위는 3 15의거의 백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그의 증언 중 이미 확인된 사항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의 증언으로 새로이 밝혀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시해두고자 한다.

그는 오후 6시 경 집을 나와 시청으로 가던 중 오동동빠 근처에서 정남규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것을 (증언록, 474) 보고 선거무효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시각에 정남규는 민주당원이 주도한 가두시위 중 오후 3시 반경에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음은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므로 다른 사람을 착각했음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시각에 오동동빠 근처에서 누군가 연행되었다는 증언은 우리가 알기에 다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기에 사실이라면 최초의 언급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증언 중 유일하게 사람이나 시간 또는 장소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항인데 사건 후 50년이 지났고 85세 노인의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후 8시쯤 지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동강이 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소방차가 북마산파출소 화재 진압 차 출동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다수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북마산파출소 화재는 930분경으로 알려져 있고, 시청 앞 도로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경찰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살수를 하던 여러 소방차 중 하나가 갑자기 데모군중 쪽으로 돌진해왔다는 것이고, 이 돌진의 이유가 운전수의 돌발 행동인지 지휘자의 지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3 15의거사』 300쪽에 살수를 하면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 중 하이라이트는 첫째 동강난 전신주를 직접 옮겨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트를 친 것, 둘째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 위로 올라가 이 길을 통과하려던 두 대의 차량에 투석해 되돌아가게 만든 것, 셋째 마지막으로 세 번째 차량을 타고 온 군인들에게서 시위대가 총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이들을 설득해 총을 되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에게는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설득해 유혈사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요지의 진술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거의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소문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참가했거나 옆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사건 중 두 개가 국회조사단 앞에서 도경수사과장 김경술의 증언 속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권종림은 ... 9시 경 무학초등학교 앞 노상에 쓰러져 있는 전주로서 국도를 차단하고 동시에 박주복은 구한오를 지휘, 구마산 방면으로 통과하는 쓰리코타 운전수인 육군502 장거리 통신대 마산 파견대 소속 상사 이재중을 구타하여 동 인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 일정을 탈취하고 실탄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본인에게 반환하고..., 구한오는... 오후 9시경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군 쓰리코터에 대한 투석사건에 가담하였고 군인 이재중의 총기를 박주복, 정상숙과 같이 탈취했다가 반환한 제정수(시당 감찰위원)... (315의거 증언록, 676)'이라고 말했다.

김경술의 증언은 경찰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당시 경찰은 빨갱이의 소행이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여기서 지목된 각 사건의 행위자를 실제의 행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들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증언은 이들 사건에 대해 시위 참가자 측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세한 전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사기록과 모든 증언을망라한 면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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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7) -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 7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마산에서의 3.15의거는 그 뒤 4.1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은 도시의 지식인층이나, 학생들, 중간층들에게 반이승만, 반자유당이라는 성향이 투표로 나타났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인하여 2.28 대구에서의 학생시위, 제1.2차 마산봉기, 그리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4.19항쟁, 4.26 교수단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오동동 불종거리의 민주당 마산당사를 뛰쳐나간 민주당 소속 정남규 도의원을 비롯한 간부와 당원 등 20여명은 당사 앞에 모여든 군중을 뚫고 “민주주의 만세”등 구호를 외치면서 해안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자유와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항쟁은 시작되었다.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불발 최루탄이 박힌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면서(아래 사진) 항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경찰은 김군의 시체에 돌을 달아 바다 속에 던져 버렸던 것이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살인경찰을 잡아라”고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해가 질 무렵 “이승만정권 물러가라”,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계속했다.

마산에서의 1.2차에 걸친 항쟁은 전국민의 항쟁이었던 4.19로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승만정권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타도했던 마산항쟁은 부산의 항쟁소식을 접한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아래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 상황으로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학생이 중심이었던 시위대들은 1979년 10월 18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양덕동 공화당사와 관공서, 파출소를 공격했다.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상당수의 고교생이 참여한 마산시위는 부산지역보다 한층 격렬했다.

유신정권은 민중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10월 19일 마산 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항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마산의 항쟁은 이틀만인 20일 새벽에 진압되고 말았다. 조직적인 항쟁의 지도부가 없었던, 다만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항쟁은 정권의 무차별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79년 10월의 부산지역과 마산지역의 항쟁은 4.19이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과 다수 시민이 봉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의 억압적 통치구조와 부정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그 뒤 1986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계속 이어졌다.

마산.창원지역은 한국사회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그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은 한국산업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노동운동 등이 어떤 다른 지역보다 힘차게 계속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한국사회의 자주와 평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은 언제나 한국사회발전의 중심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발전과 함께 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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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크하우스 2014.07.07 00: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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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