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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1) -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4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정동의 일이 시급한데 / 농삿일을 누가 생각하랴 / 사자는 끊임없이 이어져 / 동으로 서로 달리네 / 백성을 거두어가니 고을은 텅텅 비고 / 말들은 달려 강가로 향하고 있네 / 밤낮으로 나무베어 /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 한 자의 땅도 갈아놓지 않았으니 / 백성들은 무엇으로 목숨 이어가나 / 집집마다 묵은 양식 없고 /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 하물며 다시 농업마저 잃었으니/ 볼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위의 시는 원 간섭기를 살았던 수선사(修禪社 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당시 일본정벌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던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며 읊은 것이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토지의 황폐화를 가져와 삶의 터전을 잃고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고려 민중들에게, 일본정벌은 이들을 다시 헤어날 수 없는 파멸의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일본정벌은 정복전쟁이라는 민족적, 국가적 사업이기 전에 민중들에게 또다른 고통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고려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과 고려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지휘하에 4만의 군사가 900척의 전함에 나눠 타고 합포항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정벌에 나선 여원(麗元) 연합군의 우렁찬 항진이었다.

이제까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기만 했던 고려가 비록 원나라의 강요때문이기는 하였지만, 원정이라는 시험대에 오르고있었던것이다.

 

-합포, 고려의 군사항으로 떠오르다-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오늘의 마산, 곧 합포(合浦)는 그 전진기지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조그마한 항구였던 합포가 제국을 건설하려는 몽고의 의도에 따라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합포는 오늘날 김해지방인 금주(金州)의 속읍이었다. 신라때 골포현(骨浦縣)이라 하여 오늘날 창원의 속읍이었던 합포는 고려에 들어와서 김해의 속읍이 되었고 뒤에 가서야 감무가 파견되는 정도였다.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원의 지배가 시작될 무렵 합포는 이에 저항하는 삼별초 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원종 12년(1271) 2월에 삼별초가 합포에 출몰하여 감무(監務)를 생포해 갔으며, 원종 13년(1272) 11월에는 다시 합포를 공격하여 전함 22척을 불사르고 몽고의 봉졸(烽卒) 4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원종14년(1273) 1월에 다시 합포를 공략한 삼별초는 전함 32을 소각하고 몽고병사 10여명을 잡아 죽였다.

이같이 삼별초가 세 차례나 합포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해안 연안 고을이 그 영향권에 들어갔고 주민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합포가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서 역할한 것은 그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합포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남해안에서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몇 안되는 고장이었다. 이곳은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는 데다, 일본과의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하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조류를 감안할 때,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巨濟)를 거쳐 대마도-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정벌이 있기 전, 일본을 초유(招諭)하기 위한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게다가 합포에는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일단 이곳으로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에도 다른 연안지역보다는 훨씬 유리하였다.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합포를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조운로와 조창>

 

-일본 정벌의 험난한 길-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은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충렬왕 즉위년(1274)의 제1차정벌과 충렬왕 7년(1281)의 제2차정벌이 그것이다.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정벌에 앞서 여러차례 일본을 설득하여 무력사용없이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회유를 위한 사신을 자주 파견했던 것은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원종11년(1270) 경부터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흑산도를 비롯한 고려의 연해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기도 하고, 김해지방 등 10여 곳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군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고려정부에게 군량을 보조하도록 하고 전함의 건조를 독촉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여몽연합군은 일본정벌을 시작하였다. 본래 이 해 7월에 출격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5월에 이미 연합군이 합포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원종이 6월에 사망함으로써 연기되었다가 장례를 마치고 이때에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1차정벌에 동원된 여몽연합군은 군사 약 4만, 전함 90척이었다. 군사는 고려에 주둔해 있던 몽고군과 요동 및 한반도 북부출신으로 몽고에 귀부한 군인으로 구성된 몽한군(蒙漢軍) 25천명, 고려 군사 8천명, 뱃사공 67백명 정도였다.

지휘부는 원나라 홀돈(忽敦)이 도원수, 홍다구((洪茶丘)가 우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좌부원수였고,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도독사, 김신(金侁)이 좌군사, 김문비(金文庇)가 우군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103일 합포항을 출발한 연합군은 거제도를 거쳐 5일 밤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서해안 사스우라[佐須浦]로부터 공격을 개시, 대마도를 정벌한 뒤 14일에는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구주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19일 하카타만[博多灣]으로 들어가 20일 미명에 하카타·하코사키[箱崎]·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만인 21일 연합군의 선단이 하카타만에서 사라졌다. 여원연합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절반이 넘는 13500명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1차정벌을 일본에서는‘문영(文永)의 역(役)’이라 부르고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여원연합군의 일본공격 루트>

 

1차 일본원정이 이렇게 실패로 끝났음에도 원 세조는 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충렬왕 2년(1276) 예부시랑 두세충(杜世忠)을 일본에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는 한편, 전쟁준비를 계속지시하였다.

충렬왕 5년(1279)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어느 정도 여력을 갖추게 되자 다시 일본정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탐라(耽羅)에 목마장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書省)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그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에 원나라는 충렬왕 7년(1281) 제2차 일본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여원연합군은  동로군(東路軍)·강남군(江南軍)의 양군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明州)·정해(定海)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다.

동로군은여·원연합으로 편성되어 총병4만명에 전함 9백척이었다. 그 중 원나라가 3만명, 고려가 1만명이었으며 전함과 사공 15천명, 군량 11만석, 무기 등은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강남군은 총병력 약10만 명에 함선 약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제1차 때와 같이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하에 512일 합포를 출발, 거제도에 15일 정도 대기하여 있다가 526일 대마도에 도착한 후, 이키도를 비롯해 구주 연안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향해 공격하였다.

출발이 늦어진 강남군은 원장(元將) 범문호(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다자이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730일 저녁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밤중이 되자 폭풍우가 일면서 다음날인 윤 71일 하루 내내 폭풍우가 밀어닥쳐 연합군을 강타하였다.

2차원정도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전함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당시 북구주의 해안에는 파괴된 선박과 익사한 시체가 겹겹이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원사』일본전에는 10만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3명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는 원정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 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각각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다.

                 <당시 몽고군에 의한 우물이라고 알려진 마산 자산동의 몽고정 표지석>

 

-정벌이 드리운 그림자-

두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조는 여전히 일본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해지방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고려에 전함과 군량을 준비하게 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살피는 등 제3차 정벌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에서는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고려에는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동계(東界)로 침입해 철령을 넘어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양평)을 휩쓸고 충청도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강화로 피난하는 한편, 원나라에 원병을 청해 여원연합군으로 연기(燕岐)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러 몰아냈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고려에는 합단이 침입해 사태가 복잡해진데다가 세조가 죽음으로써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정벌은 어느 쪽의 승리도 없이 원, 고려, 일본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시도한 것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국가 목표를 실현하자는 것이었고, 고려와 일본 모두를 견제·약화시키면서 동아시아 사회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벌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목표와 위신에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고려는 주도적으로 정벌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 역사상 최초의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남으로써 오히려 인명의 살상과 경제적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에 따른재정적 부담을 안아야했다. 물론이 모든 것은 민중의부담으로돌아오는것이었다.

일본은 여원연합군의 대함대를 막아냄으로써 일단 원에 의한 종속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전쟁이 모두 태풍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신풍(神風)’의 가호를 받는 나라로 이미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마도의 경우가 더 심했다. 연합군이 들이닥쳤을 때 보이는 사람은 모두 타살되었다 하며, 처자를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가 숨으면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목졸라 죽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의 마산, 곧 합포는 일본정벌 기간 동안 군사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함 건조 등 요즘으로 치면 군수업체가 생겨났을 것이고, 이곳 저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게다가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이 집산되어 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충렬왕이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마치 임시수도와 같은 규모였을 것이다.

정벌이 끝난 후 정부에서 합포를 회원(會原)으로 고치고 현령을 파견한 것도 그 공로를 인정해서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국왕, 고급관료, 장수들의 왕래가 결코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포를 비롯하여 인근지역은 정벌준비에 쉽게 동원되어 가혹하게 조세를 부담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원감국사 충지는 일본정벌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영남의 쓰라린 모습 /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 역역은 삼년에 걸쳐 /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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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원중 2014.08.06 13: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오늘도 감사히 배우고 갑니다^^

  2. 박진섭 2014.08.16 11:4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언제나 경천애민의 마음을 가질수 있을까요?

2011.01.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천혜의 바다에 매립이 시작되다>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아래 두 그림 중, 왼쪽은 매립 전 자연상태의 마산만이고, 오른쪽은 현재 계획하고 있는 마산해양신도시(푸른 점 부분)와 가포신항만 일대에 계획된 매립까지 완공되었을 때의 마산만입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제도 이 땅을 지배하면서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일찍부터 마산을 점찍었습니다.
일본과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할 수있는 중요 항구로, 자국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탈의 대상으로, 전쟁 때는 후방의 병참기지항으로 마산을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자본가들에게 마산해안의 간석지는 손 쉽게 삼킬 수 있는 고급먹잇감처럼, 저비용으로 고수익을 올려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원시적 축적수단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마산의 매립지 중 어느 한곳도 공공용지로 사용되었거나 도시발전을 위한 기반시설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앞의 이익을 챙겨주는 돈벌이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제의 군수용품 수송부두을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매립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일본 사기업과 개인의 돈벌이 수단이었습니다.

일제만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사정은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매립한 땅에서도 이 도시의 미래를 위한 공공용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매립지는 공장을 짓거나 분양해 돈만 챙겼습니다. 가장 최근에 매립한 구항과 서항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보았던 마산만과 해방 후 이 나라 지배층들이 보았던 마산만은 여전히 탐욕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마산만 매립은 완공기준으로 개항기 4회, 1910년대 2회, 1920년대 3회, 1930년대 이후 15회로 총 24회 325,000평 규모였습니다.
그 결과, 갈대밭과 갯벌로 아름다웠던 이 도시의 해안선은 해방 때 전부 석축으로된 직선 호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든 매립의 주체는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민간인 등이었습니다.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했으며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매립한 사례도 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 농지, 공장용지, 군용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하기도 했고 기업과 개인에게 분양과 임대를 목적한 매립도 있었고 자신의 사업장을 확대하기 위한 매립도 있었습니다.

한 밑천 잡기위해 매립에 뛰어들었다가 막차를 타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산만 매립은 내용과 형식이 다양했습니다.

단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면 그 주체가 모두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개항 직후 한국인이 매립을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약해져 버린 국력 탓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회 부터 포스팅할 글에서는 매립에 대한 이야깁니다.
매립과정과 공법․비용 등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도시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매립의 시기와 위치․규모․시행자 정도로 한정해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시기의 기준은 공사가 완공된 일자로 하며 완공일자는 토지대장의 기록을 기준하겠습니다.

일제기 마산매립에 관한 자료는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공법, 비용, 회의록, 설계도서 등 매우 구체적인 자료들이 남아있습니다.

개항 직후의 시기에 매립계획은 세웠지만 실제로 시행되지 못한 사례가 5건 있습니다.
그것들까지 포스팅하겠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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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1.01.17 06: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날씨가 너무 춥네요.
    누가 그러더군요.
    빙하기가 시작돈 게 아닌가 하고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 허정도 2011.01.19 08:52 신고 address edit & del

      날씨 때문에 참 걱정입니다.
      인간들 욕심이 만든 자연재앙이 앞으로 점점 더 커질 텐데,

  2. 임종만 2011.01.17 11: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매립의 진실, 새롭고 흥미로운데요 ㅎㅎ
    다음 포스팅 기대됩니다.

    • 허정도 2011.01.19 08:54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1910년 이전까지의 매립부터 실어보겠습니다.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십쇼.

2010.05.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전쟁, 그 이후의 고통>


두 번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우리 연안을 처음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으로 여원연합군 1차 전쟁 50여 년 전입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노략질이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가장 심해 무려 452회나 침략을 받았습니다. 고려기 전체 침입 484회의 90%가량이 이때에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열부입강(烈婦入江) 부분입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정절을 지키려고 강으로 도망쳤다가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은 열부의 행실을 칭송한 그림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습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 노략질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에 수천 명이 타고와 침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산 인근에는 고종 14년(1227년) 5월 웅신현에 침범한 일이 최초이며 2차정벌 1년 전인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 합포로 침범해 고기잡이 하던 어부 두 명을 잡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모두 소규모 노략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에는 20여 척의 배를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에 불을 질렀고, 공민왕 1년(1352년) 9월에는 5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끌고 와 합포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왜구 침입사상 이곳 합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에 왜선 350척이 합포를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 때 왜구들은 별 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군영(軍營)과 병선(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무려 5천여 명의 인명을 해친 다음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왕 2년(1376년) 11월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은 경남지방의 진주,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울산, 진해, 반성 등이 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구가 이곳에 상륙하여 의창현과 회원현의 관가를 공격하고 민가를 불살라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범이 마산지역에 특히 많았던 사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합포가 두 번에 걸친 일본 정벌의 원정기지였기 때문에 받았던 일본의 보복성 공격이라고 해석합니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마산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이곳이 두 번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발진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마산이 동아시아의 군사적 중심도시로 부각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가치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주요 루트가 김해였던 사실에 비추어, 13세기 여원연합군의 대선단이 지금의 마산항을 발진기지로 설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자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동행성으로 사용되었던 자산성에 대해서조차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자원을 보존, 활용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설화도 사실인양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 세상인데, 있는 자원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일본이 하카다(博多) 일대에 당시 몽고군과의 전쟁 유적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역사문화관광지로 다듬어둔  사실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기념탑 옆에는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일제기였던 1930년대 몽고정의 사진이며 아래 사진은 80년 뒤에 찍은 지금 모습입니다.


몽고 군사와 말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모양 석물이 한 개 있는데 몽고군 전차바퀴이거나 물을 길을 때 발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초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이 우물은 원래 ‘고려정’으로 불렀으나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6년경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여원연합군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마산포의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우물이었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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