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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0. 신문기자 대회

 

120. 신문기자 대회

 

 

1919년에 제등 실(齊藤 實)이 조선총독으로 칙임 후 종래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탈피함으로써 총독부 어용지 경성일보(日文) 외 각 도마다 일인이 경영하는 신문은 있어도 한국민 민영지는 전혀 없었다.

 

제등(齊藤)은 선심이나 쓰는 양으로 우리 민간지로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동아일보 그리고 친일분자 민원식이 국민신문을, 그리고 시대일보(후에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 등으로 어두웠던 근역(槿域) 삼천리의 언론계에 처음으로 일조(一條)의 여명이 비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방방곡곡에는 언론에 갈증 났던 열혈청년들이 솔선하여 각 사의 지국을 설치, 신문기자의 홍수시대를 이루었다.

 

때는 경향각지에 사회주의 사상이 팽창한 시절이라 조선일보 본사 간부급 대부분이 좌경사상에 침윤된 관계로 그러려니와 지국 기자라면 반드시 사회주의자이며 혹은 표면이라도 사회주의자 행세를 하지 않으면 진보사회에서 탈락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배일 감정을 가미한 사회주의라는 점에서 일경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이 점을 냉철하게 검토 분석하여 보면 묘한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 윤곽과 핵심은 다음 신간회부(新幹會部)에 미루어 두기로 한다.

 

1924년에 제1회 전선(全鮮) 일간 신문기자대회가 경성 청년회관에서 이상재 사회로 개최될 때 철도국에서 기자대회에 참가한 수백 명 기자에게 할인 5할로 파천황(破天荒)의 환대도 하였다.

 

이듬해 25년 벚꽃이 만발한 4월에는 마산에서 경남기자대회가 지금은 없어진 수좌(壽座, 옛 시민극장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참가 기자 대부분이 경성대회를 방불케한 조선일보 기자와 사회주의자였는데 초일(初日) 강연회 연사는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 시대일보 편집국장 홍남표(공산당), 개벽사 주필 이돈화이며 임석경관은 제3부 경시 고등과장인데 이날 밤 안재홍 1명만 1회의 주의를 받았을 뿐 무사히 마쳤다.

 

3일째는 사회주의자 중에서 명하였던 김해 인동철의 사회로 회의한 뒤에 분과별로 회의를 하였으나 이날 임석이 거부된 고등계 형사들의 초조함을 가위(可謂)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마산대회 뒤 군북에서 회의를 가졌었다. 동아일보도 경남지국의 기자만으로 마산에서 간담회라는 명목으로 개최하였는데 참석자는 사장 송진우, 편집국장 이광수 등이었다.<<<

 

 

<19241회 전선(全鮮) 일간 신문기자대회가 열린 경성 청년회관(현 서울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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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1. 제등만의 참사

91. 제등만(齊藤灣)의 참사

 

진해 해군통제부 앞 부두 있는 곳을 일인들은 제등만(齊藤灣)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성에 죽첨(竹添) 일본공사가 있던 곳을 죽첨정(竹添町), 장곡천정(長谷川町), 마산의 까치나루(작진, 鵲津 - 지금 발전소 있는 곳 / 현 남부터미널)를 일본 귀족원의장 근위(近衛)가 상유(賞遊)한 곳이므로 일인들은 하마(近衛濱)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조선총독(元朝鮮總督) 제등 실(齊藤 實)이 과거 진해 요항부(要港部)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을 인연해서 제등만(齊藤灣)이라 명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후로 일반 민간선박은 일체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통제부 앞 솔섬 사이와 날부리(비봉, 飛鳳) 현동으로 작은 배들은 관통하였다.

 

<아래 지도는 1945년 미군에서 발행한 것인데, 제등만이라고 적혀있다. 지금은 매립되어 만이 깊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곳을 제등만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1928년 창원-진해선 철도(일본 千葉공병대 병사들에 의해 완공)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412일 벚꽃 시기를 점쳐서 진해읍 주체로 공진회(共進會)를 개최하고, 철도 당국은 이날 하루만은 손님들에게 무임승차로써 봉사하게 되었다.

원근 주민들이 떼를 지어 진해로 몰려들었으며 먼 곳은 진주에서, 통영, 고성 방면 주민들로, 떠 마산만을 완상(玩賞)코자 하는 사람은 기차보다 배를 이용하는 수가 폭주하여 진해를 왕래하는 배는 초만원이었다.

이날 천신호회조점(天神號廻漕店)은 제1부터 제3호까지의 발동선은 다른 항로는 결항하고 진해에만 총집중케하였다. 물론 타 회사와 유객(誘客) 경쟁도 여간이 아니었다.

마침 정오 조금 전에 제3 천신병환(天神並丸)은 정원의 수배를 싣고 출항했는데, 이 배를 탄 사람들 중에는 자기 배가 먼저 가는 것이 기뻐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기뻐하고 춤추던 것이 불과 한 시간 뒤에 커다란 악마에게 휩쓸릴 줄은 신이 아닌 그들이 꿈엔들 어찌 알았으랴!

3 천신환(天神丸)이 해군부두에 접안 준비로 로프를 격류봉(擊留棒)에 던지고 있을 때 승객들은 서로가 먼저 상륙하려고 덤볐다.

배의 좌우현으로 돌며 무질서하게 서로가 찧고 까불고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접안되는 쪽으로 몰렸다. 배는 중력을 잃고 일시에 기울어지면서 승객들을 모조리 바다로 쏟아버렸다.

이날 수병들은 만일에 대비해서 있었지마는 너무나 돌발적이라 다소의 시차는 있었으나 구조 작업은 신속했다.

결국 이 날 부녀자 25명만은 불행하게도 불귀의 객이 되어 시체로 인양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소녀 3명과 진주 강모라는 부호 부인과 가족 2명 일가 3, 그리고 고향에서 며칠 후면 화혼을 올릴 마산시내 사탕 도매상의 장녀 24세의 하야(河野) 모 양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지방 기자들의 센스도 둔하여서 시체 구경만 하는 기자도 있었는가 하면, 조선일보 마산주재 기자 같은 사람은 다중이 모이면 사건이 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인지 전보 패스를 소지하였던 덕으로 즉각 기사 송고를 했다.

조선일보 본사에서는 사건 당일 석간 발행 전 장문의 호외를 발행하였다.

경쟁지인 동아일보를 압도하였으므로 적체지대(積滯紙代)를 도무 상쇄해 주는 은전을 입은 일도 기억에 새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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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46. 보천교, 47. 김차랑 문고

46. 보천교(普天敎)

 

중성동 내에 소재(번지 미상)2층 목조건물은 전대미문의 총각회 사건으로 한때 전국적 화재가 되었지만 총각회 변고로 집 주인은 어디로인가 가버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비어있던 이 집에는 회색 도복에 행근을 찬 상투쟁이들이 날이 갈수록 삼삼오오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대체 이들 3,40명 되는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하여 이런 차림의 사람들을 처음 보는 동네 어른 아니 할 것 없이 의아그럽고 기이하게도 여겨 구경꾼들이 뜰 안으로 붐비었다.

말하자면 장꾼보다 풍각쟁이가 많았다. 지식층은 대개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보천교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유사 종교의 교도들이다.

이 교의 요술에 걸려들면 깍가쟁이(삭발) 신사로 자처하던 자도 양모자발구식(養毛仔髮舊式)으로 돌아가며 전지가옥(田地家屋)이 탕진되어도 아까운줄 모른다고 한다.

교주 차천석(車天錫)은 정읍에 본궁(?)을 짓고 교세 확대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교도들에게 갈구리질을 용서 없이 하여 거부의 위치에 올랐으며,

때로는 대문짝 같은 명함을 가지고 당시 조선총독 제등실(齊藤實)을 항시 면회할 수 있었으니, 이것 보천교주 차천석은 호랑이 몸에 날개 달린 격이 되었다.

제등(齊藤)은 제등대로 고등정책이라 할까 이러한 교로서 조선인의 정신을 미혹케 하여 반일 사상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속셈으로, 이런 우매하고 사기적인 인물을 만나게 하니,

총독을 빙자하여 양민의 재산 약탈, 양민 부처녀(婦處女)의 정조를 멋대로 골라가면서 유린하는 자와는 멍군 아니면 장군인 꼴이다.

이리해서 교세는 욱일승천하기도 했는데 공중 높이 솟은 태양이 점점 이웃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1923년경에 전기와 같이 포교소를 설치하고 밤이나 낮이나를 가리지 않고 주문만 암송하므로 인근 주민들에게 미음을 사고 있었는데, 그때 청년들 사이에는 한창 반종교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때다.

더욱이 태을교나 보천교 등 혹세무민하는 유사 종교단체 두상(頭上)에 가일봉(加一棒)이 없을 수 없던 시기라 팽삼진 등의 총각단 외 김기호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직접 행동을 잠행하였으니 대항할 사람도 없이 패주하여 버리고 교()의 집기, 간판 그리고 교도 등이 혼비백산한 것도 시세(時勢)의 적의(適宜)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1926년에 간행된 보천교 전라북도 일반문서>

 

 

47. 김차랑(金次郞) 문고(文庫)

 

현재 동명으로 신창동 북서쪽 회전무대가 가설된 일인 극장 환서좌(丸西座) 건너편 목조 단층 아담한 곳에 소규모의 도서관이 있었으니 명칭은 김차랑 문고라 하였다.

비교적 한적한 위치에 있었고 공기가 맑아 독서자에게는 호적(好適)의 곳이다.

설립자의 씨명(氏名)은 잘 기억되지 않으나, 설립자에게는 독서를 좋아하던 귀한 자식이 불행히도 요절함에 따라 어린 자식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정신으로, 노부부의 거실만 남겨놓고 주택 전부를 독서실로 개조하여 노후 은거 생활비 외의 남은 재산은 모조리 도서구입비에 충당하였다.

도서는 무료로 편람케 하였으며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영원히 그리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도록 긴지로오(金次郞) 문고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장서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소위 금서인 사상서적도 구비되어 있어 이해할 수 있는 자에게는 공람(供覽)케 하였고, 동경 삼성당 출판 후 대백과 사전이 평범사에서 발행되는 즉시 구입하여 빈한(貧寒) 서생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감회 깊은 일이다.

인구 3만 미달의 조그마한 도시에 개인 문고가 설치된 것도 타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인데 하문려 이 문고에 비치된 서적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저 동경제대 헌법 교수 미농부달고(美濃部達告) 박사 저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이란 케케묵은 책이 있었다.

내용은 학자 입장에서 타의 없는 학구적인 저술로 되어 있으며, 그 강의도 학생들은 그저 평범하게 들어 넘겼을 뿐이었는데 때마침 일본 귀족원(현 참의원)의회가 개회되자 국수파 우익의원들은 이것을 정사(政事) 도구로 삼아 진보 사상가들을 타도하게 되니

전국 각 일간지는 연일 대서특필로 보도함으로써, 일본 각지 고본상(古本商), 특히 신전구(神田區) 일대는 천황기관설을 찾는 학자, 지식인들로 길을 메웠으며 책대(冊代)도 고본(古本)이면 1, 2원에 불과하던 것이 10, 20원까지 뛰어 올랐다는 것이다.

그 인기 높던 문제의 서적이 이 김차랑 문고에 있었던 것이다.

이 문고도 설립자의 운영을 떠난 노년기의 무상과 허무를 느꼈음인지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문고는 마산부가 인수하여 종전까지만 해도 매년 평균 열람자 6천명 내외 중 아동이 4천명 정도였으며 장서는 약 35, 6백 권이었다.

부의 예산은 겨우 2백원(소화 13년경)이었으니 운영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예산이 풍족하였다 하더라도 때는 전쟁을 벌인 일본 군국주의 치하에서 별다른 진전은 볼 수 없었을 것이므로 부 당국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부 직원 모씨와 그 친지들에 의하여 완전 폐허가 되고 만 것은 두고두고 원통한 일이다.<<<

<미농부 달고(美濃部 達告) /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 일본어:てんのうきかんせつ 덴노키칸세쓰)은 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확립된 일본의 헌법 학설이다. 통치권(주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으며, 일본 천황은 그러한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도움을 얻어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독일의 공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로 대표되는 국가법인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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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혹은 소위 조선인 연맹 이사장이니 또는 동·반장이란 감투로 크게 우쭐거리던 천식배(淺識輩)들의 강제 동원에 시달려서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값싼 친일배가 아니면 경찰 끄나풀들이 참배치 않은 사람을 밀고하여 욕보이기도 했다.

이외에 이주회(唎酒會 / 술맛 콘테스트 ; 옮긴 이)가 있을 때는 부내(府內)의 양조장과 다수 지방 유지들이 몰려와서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 앞에서 성대한 제를 드린다. 이리해서 세월은 흘러 만주, 지나사변을 일으키자 신사는 물론 조선인 전국 사찰에까지도 타도(打倒), 귀축영미(鬼畜英美) 기무운장구(祈武運長久)를 대서특필하였고, 조석으로 염불하였던 것이다,

전국 각지 일제히 기독교 신자들만 꼬집어 신사 참배를 폭력으로 임하였으나 백중구구(百中九九)는 굴하지 않았다.

마산도 예외일 수 없고 헌병대, 경찰서 고등계에서 불굴(不屈)하는 기독교계 학교는 모조리 폐쇄령을 내렸고, 신자들은 걸리는 대로 고문과 투옥으로 불행하게 옥사한 신자도 상당수였던 것이다.

마산 신사는 지금 제일여중·고가 되어 있다.

 

<강점기의 신사 정문과 현재의 제일여중고 정문>

 

 

26. 도리이(鳥居)를 닮은 문

 

마산 신사 정문으로 향하는 참도(參道)에 당시 조선 총독 제등실(齊藤實)의 휘호로 높은 석조 도리이 좌우 기둥에 ‘봉납(奉納)’이란 음각이 있었고 정문에도 도리이가 있었다.

종전 직후 얼마 동안은 수십 주의 벚꽃나무가 온존(溫存)하였으나 어느덧 도끼날의 서리를 맞아 자취를 감추었고, 도리이도 무참히 도양(倒壤)되었다.

진정한 배일 민족 사살의 발로라고 할까? 신사 본전은 지금은 윤환(輪奐)의 미를 자랑하는 모 여자 중고교가 자리 잡고 있다.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의 현대식 건물인데 그 정문은 어떠한가를 한번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도리이란 한국의 홍문(紅門)과 흡사하여 한국의 경우로 말하면 국가의 고관이나 왕과 왕손의 능에 한하여 세워지는 것이지만, 이와 달리 일본의 도리이는 일본 독특한 신을 상징하여 이를 숭앙하기 위하여 세워지는 것이며, 일본인들은 해외에 살더라도 그 집단권에는 반드시 규모 여하를 막론하고 신사를 조영(造營)하여 그 앞에 도리이를 건립함으로써 대화혼(大和魂)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출입하는 전기(前記) 학교의 정문이 선입관 때문인지는 모르되 도리이의 모양을 닮았다는데 있어 구안자(具眼者)로 하여금 다소 회의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날 기존하던 도리이라면 과거를 회상하여 수긍이 갈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30년이 가까운 오늘에 와서는 일본의 잔조(殘糟)란 모조리 불식되고 없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비록 신사의 본전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 도리이를 너무도 닮은 문이 과거의 신사를 연상하게 함은 심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식민지였던 암흑시대, 무수한 조선인,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신사 참배 문제로 하여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초를 상기해 보았다면 필자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신사 앞을 통과할 때 직립부동(直立不動)의 자세로 최경례(最敬禮)를 올리지 않으면 일경(日警)에 붙들려가서 매를 맞아야 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의 우상 숭배 배척 관념에서 오는 신사 불참배 문제는 전국에 비화(飛火)하여 최고형을 받고 옥사한 목사의 순교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지 아니한가?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각 소·중학교정에 있던 덕천(德川)막부 시대의 이궁존덕(二宮尊德)이나 충군의 권화(權化)라는 남정성(楠正成)의 동상 같은 것도 모조리 철날(撤捏)하였다는 판국인데, 하물며 한국의 남단 마산의 한 학원에서 일본 패전 전의 복고 인상을 주는 것과 같은 처사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교 당국의 좀 더 적극성을 띤 도의적인 관여가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현재의 정문이 일본 수만처(數萬處)에 현존하는 도리이 중 명신신사(明神神社)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하여 둔다.

(주 ; 위 제일여고의 설립자 이형규 학원장에 의하면 이 문은 도리이를 본뜬 것이 아니고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 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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