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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한일병합된 1910년 마산 모습>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편이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서쪽으로 진동을 지나 진주로 가는 140리 길이었습니다.
좁은 오솔길로 여러 개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만 1908년 6월 폭 5m로 확장공사가 시행되어 1911년 3월 완성되었습니다(
朝鮮總督府 官報 第211號, 1911. 5. 16)

세 번째는 북쪽으로 칠원․창녕․현풍․성주를 지나 서울로 연결되는 길이었는데 확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음 그림은 병합 당시(1910년) 마산일대 도시상황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직전의 마산일대 지도(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를 기초로, 개항기 동안 간행된 각종 문헌을 자료로 활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지도의 아래 쪽 노란 색 칠한 부분이 신마산인데 노란색 중간 쯤 보이는 신월천(현 깡통거리)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하지만 개항 10년 후인 1910년 경, 이미 일본인들은 북쪽 원마산 방향으로 많이 뻗어나왔습니다. 근대식 도로도 현재의 장군천까지 건설되었습니다.

도시 중심에 길게 나있는 검은 선이 1905년에 개통한 철도 마산선입니다.
신마산 쪽에 마산역이, 원마산 인근(현 육호광장)에 구마산역이 있었으며, 이때 난 철로가 현 경남은행 본점 앞 중앙간선도로입니다.

지도처럼 마산포(원마산)와 신마산에만 도시가 형성되었을 뿐, 완월, 자산, 회원, 양덕, 석전, 합성지역 등은 그때까지 자그마한 자연취락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달 29일 이 사실을 정식으로 공포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신들의 땅임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한국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재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1911년 1월 1일 진해군항보호를 구실로 마산의 개항장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개항 당시에도 일본과의 교역 외에 타 국가와의 교역이 미미했던 마산항은 폐항이 된 이후에도 한국산 쌀의 대일 수출과 일제 소비성 물자 및 군수품 수입항으로 계속 활용됨으로써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습니다.

개항과 함께 찾아온 인구의 증가와 근대적 도시시설 출현,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등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마산포의 도시구조는 급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듯이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걸어온 마산도 1911년 진해에 군항이 설치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진해>

당시 진해 사정과 관련지어 마산도시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먼저 평정빈부(平井斌夫)가 쓴『마산과 진해만』의 기록입니다.

‘1911년 1월 마산의 개항이 폐쇄되면서 산업이 위축될 것 같았지만 원마산의 왕성한 교역과 상거래, 진해만 군사시설의 건축, 진해 신시가지의 건설 등에 의해 오히려 폐쇄 전보다 시장이 활발해졌다’ 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최근 친일 문제로 시끄러운 장지연의 『마산기행』기록입니다.

‘한 때 번성의 극치를 이룬 마산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한 이래 마산의 상인들이 진해 쪽으로 넘어가는 이가 많아 요사이는 오히려 1911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점포들도 활기를 과거에 비해 잃었다’
고 한 것입니다.

두 주장은 각각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항기 이후 발간된 자료들과 1911년에 시작되는 남성동 해안 매립공사 등을 보면 장지연의 글처럼 마산이 비록 ‘과거에 비해 활기를 잃었다’ 하더라도 마산도시 전체가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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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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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2011/03/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2011/04/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2011/04/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2011/04/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5)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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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비 2011.05.02 10: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진해의 모습이 훨씬 정도되고 좋은 것 같네요.

    • 허정도 2011.05.02 20:57 신고 address edit & del

      일제의 진해 건설 초기사진입니다.
      잘 계시죠?

    • blokken 2011.05.13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계시죠?

2010.11.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마산 최초의 근대 건축>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남단 해변의 전망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현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경술국치 전인 이 시기에 식민 지배를 위한 법원 등 관아와 교육시설․금융시설을 비롯하여 요정․상점 등의 상업용 시설들이 일본에 의해 들어섰으며 이 외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서 종교시설과 교육시설들도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양식은 대부분 의양풍(서양식과 유사한 형식) 혹은 일본식의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관아건물로 1908년에 지어 마산이사청으로 사용됩니다. 목조2층으로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1899년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을 헐고 지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한 부산법원 마산출장소 건물입니다.
목조2층 양식으로 마산시청 앞에 있는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개항기(1899년-1910년) 마산의 근대건축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상술의 논문자료입니다.
 

 

No

건 물 명

현 위 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일본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르네상스풍

 

1906년 마산이사청

2

러시아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식민지양식

 

현 월포초등교 내

3

마산우편국

월남동4가

1902

목조1층

의양풍

42평

1930.2.24중앙동이전

4

마산포교회

성호동

1903

벽돌조1층

개량한식

 

문창교회전신

5

심상고등소학교

장군동3가

1904

목조1층

의양풍

384평

일본인학교, 후 이전

6

마산공립소학교

 

1904

 

 

 

1901開校,성호초등교

7

마산병원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의양풍

75평

도립병원전신

8

마산 역사(驛舍)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일식

 

 

9

제일은행출장소

월남동3가

1907

벽돌조1층

의양풍

 

 

10

서전(西田)주조장

홍문동

1907

 

 

112평

마산最古酒造場

11

마산이사청

대내동

1908

목조2층

의양풍

 

1914년 마산부청

12

망월루

두월동1가

1908

목조3층

일식

96평

여관, 요정

13

심상고등소학교

중앙동

1908

양풍 平家

 

612평

이전하여 신축

14

창신학교

상남동87번지

1909

목조1층

의양풍

56평

호주선교사(신교)

15

마산신사(神社)

문화동

1909

 

 

 

 

16

마산헌병분대

월남동3가

1909

 

 

 

현건물은1926년신축

17

육군중포병대대

월영동

1909

기와

 

 

여러 채가 있었음

18

환서좌(丸西座)

신마산

1909

목조2층

 

 

5-600명 수용

19

마산 세관

월남동4가

1910

목조1층

의양풍

 

 

20

지방법원마산지청

중앙동4가

1910

목조2층

양식

 

 

21

성지학교

완월동206번지

1910

벽돌조1층

양식

 

프랑스선교사(구교)

22

부산감옥마산분감

장군동

1910

 

 

 

 


여기서 소개한 건물들은 그 시기를 대표할만한 것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외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전 글에서 밝힌 대로 보험회사․목재상․정미소․양조장등의 공업시설과 마산청과물 시장 등의 유통시설, 여러 개의 유곽과 30여 개소의 여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시기에 매우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표의 세번 째에 적힌 마산우편국(1902) 사진입니다. 의양풍으로 목조1층이었습니다.


여관과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망월루 사진입니다.
목조 3층 일본식 건물로 창원천변에 있었는데 사진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업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는 1906년부터 부산․인천․성진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 및 세관 설비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신마산 세관에 종래의 부두연장 84.5m에 돌제(突堤)의 연장 10m를 보강해서 등대를 설치하고 계단이 딸린 목조잔교를 설치했습니다.
다음 사진이 그 때 설치한 마산세관의 목조잔교입니다.


 

세관 구내에 목조 단충의 파상형(波狀形) 철판지붕으로 된 50평 규모 창고 1동을 건설했으며, 세관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목조 23여 평) 1동도 이 시기에 신축하였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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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0:00

도시 한복판에 동굴이?


도시 한 복판에 동굴이 있다면 믿어집니까?
최근 마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산 창포동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중 땅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5m 지점에 폭 3m, 높이 2m, 길이 20m 정도되는 반원형 동굴이었습니다.
벽이나 기둥, 지붕 등 동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인력으로 흙만 파내 뚫은 것이었습니다.
마사토와 황토가 섞인 토질이었는데 매우 견고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1899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마산이라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의 해관(현, 세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조계지를 조성 때 최초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부지였습니다.
사정(査定)토지대장의 기록에, 일제강점기 내내 이 터의 소유주가 국가(일본, 조선총독부)였던 걸로 보아 해방될 때까지 계속 공공시설로 사용된 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위치입니다.



연세 높은 이웃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동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어렸을 적 이 동굴 안에서 놀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원래는 동굴 양쪽으로 입구가 트여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까지 사람들이 이 동굴을 지나 다니기도 하고 무언가를 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일본인들이 방공호로 팠던 굴 같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평양1개소를 고시했습니다. 
그러다 6월 14일에는 전국의 중소도시 20 곳에 소개공지(
疏開空地)를 고시했는데 신의주 함흥 여수 대구 원산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마산에도  소개공지 1개소가 고시되었습니다.

소개관련 공지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는 중요시설 주변 30m∼50m내에 있는 기존건축물을 철거·소개하여 공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때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일제기의 '소개공지대'와 '소개공지'에 대해,
'도시계획의 눈으로 보면 소개공지대는 방공법에 의한 새로운 계획가로의 설정이었고 소개공지는 새로운 계획광장의 설정이었다'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굴이 '소개공지'와 직접 상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방직전의 급박했던 전황을 생각해보면 이 동굴은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 미공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던 그 때 팠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쟁흔적이니까 말입니다.

시청 관련부서에서 신속히 조치를 취해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폐쇄하지 말고 식민지시대 유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다 싶었지만 주변상황이 워낙 위험해 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한 번 보시죠.
----------------------------------------------------------------------------

도시 한 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습니다.


지하 1.5m 지점이었습니다.


입구 폭은 2.4m 정도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3m 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어 행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꽤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동굴을 막기 위해 준비공사를 시작합니다.
아래 큰 놈은 콘크리트 주입구이고, 위 작은 놈들은 공극을 없애기 위한 조치입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와 시멘트만 섞은 모르타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났습니다.
동굴 위에 2층 건물이 두 채나 있던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도시 한복판 땅 속에서 긴 세월 잠자고 있었던 이 동굴을 보며 지난 세기 이 도시 마산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조용했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밀고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신작로를 뚫고, 이 도시를 제 멋대로 삼켰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과 귀환동포에 도시가 북적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민들로 이 도시가 다시 들끓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지만 이 도시에 사연을 남기고 간 그 많았던 사람들,,,,,
그들의 음성이 귓전에 돌고,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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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마산이 문을 열다>

1899년 5월1일, 마산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이름으로 인근 신월리와 월영리(현, 신월동과 월영동)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조계지'의 위치는 마산포의 남쪽 약 2km 거리의 해안이었습니다.
 


개항은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 삶의 터전이었던 마산포의 도시구조에도 결정적인 변화와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마산포(원마산)의 모든 것들은 개항지인 소위 ‘신마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됩니다.

마산포 개항은 1898년 5월 26일 의정부 회의에서 찬성 7표 반대 3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사흘 뒤인 5월 29일, 대한제국 외부대신이 마산포․군산․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 중 평양은 연기되었고 마산포․군산․성진 만 시행되었습니다.

개항업무를 관장하기위해 구(舊) 조창전운사아문(漕倉轉運使衙門)이었던「마산창」자리(현 남성동 파출소 일대)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원군수 안길수를 창원감리서리로 겸임시킨 후 1년 이내에 개항준비를 마치도록 명령했으며, 해관(海關)측량사를 마산포에 파견하여 그 해 8월까지 조계지로 사용할 부지의 측량을 마치게 하였습니다.

외부대신의 명령을 받은 창원감리는 곧바로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 138,880여 평을 구획하여 각국공동조계지로 정하고 이를 1899년 5월 1일 각국 대표자인 부산세관장 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 이태리인)에게 인도함으로써 마산포 개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계장정의 조인은 같은 해 6월 2일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공사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스카글리오티는 각국공동조계지를 인도한 후 곧바로 창원감리서 내에 부산세관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출장소 주임에 독일인 아르노스(Arnous)를, 보조로 일본인 관세사 등본종태랑(藤本鍾太郞)과 고교가길(高橋嘉吉)을 임명하여 조계지 획성(劃成)업무를 보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신마산'은 개항기 때 설계한 '조계지'의 도시형태 그대로입니다. 현 마산도시의 공간구조가 '조계지'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항 당시 '조계지'의 설계는 현 마산도시구조의 근간이었습니다. 시내 간선도로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마산 조계지의 설계자가 네델란드인 스태든이라고 했습니다.

스태든은 일찌기 주한 초대 영국공사 파크스와 초대 경성총영사 아스톤(W. G. Aston)에 의해 고용된 측량기사입니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그들과 더불어 내한하여 마산조계지 외에도 인천 목포 군산 등 여섯군데 조계지를 설계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마산포에 파견된 해관측량사'가 스태든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의 그림이 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마산의 각국공동조계지 설계도면입니다.
설계도면에 그은 푸른색 안쪽 부분과 현재 도시 상황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개항 때의 도시계획이 이 도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계지가 확정되자 공동조계의 획정을 내용으로 하는 조계장정을 조인했습니다.

각국공동조계지로 구획된 토지는 제1등지(甲地區․A地區․Low Lying Lots․低地區), 제2등지(乙地區․B地區․Hill Lots․山地區․高地區), 제3등지(丙地區․C地區․Foreshore Lots․海邊地區) 3종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제1등지는 해안에 근접한 상업지로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동쪽 바닷가 일대입니다. 위 설계도면에 표기된 부분이 제1등지입니다.
제2등지는 제1등지가 근접해 마주보는 서쪽일대였으며, 제3등지는 제일여고 정문앞도로 주변의 경사지였습니다.

조계장정에는 조계지 주위 10여리를 개방하여 매매와 양도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조계지 내에는 경작을 금지하고 오직 건축만 하도록 했으며 위험하거나 고열을 취급하는 건물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조계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마산포각국조계(馬山浦各國租界)’라는 문자를 조각한 표목을 경계선 양단의 만조점에 각각 한 개씩, 그리고 조계지 구역 경계선이 꺾어지는 지점마다 한 개씩 세웠습니다.

마산에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살 수 있었던 최초의 땅 '마산포 각국공동조계지'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2010/07/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2010/07/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010/08/0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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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6 13:42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는 신마산의 조계지에 설치된 신작로를 따라서 유서 있는 건물들을 찾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건물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건물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시간속의 여행을 체험하는 색다른 의미가 있을것 같았다.

특히 조계지내에 설치된 세관은 개항과 함께 설치된 시설로서 그 위치가 변천하는 과정과  건축의 이력을  알아보는 것을 통해서,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추어 보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계지 지도 : 중앙하단부가 해관부지임(1907)

 

남성동 해관업무개시

해관은 110년 전 구한말인 1899년 5월 1일 마산항이 개항장으로 발족됨과 동시에 마산해관지서로로 창설되었다..
해관세무사는 조선말기 관세의 징수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개항장에 창설하였던 해관의 제반업무를 관정한 기관이다. 이후 해관이란 명칭은 1907.12.16부터 세관으로 개칭되었다.

마산해관지서가 처음으로 그 업무를 개시한 곳은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2층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시 창원감리서가 있던 곳,조선식산은행(이후 제일은행, 1918)

 

마산항 개항에 앞서 1898년 5월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마산포 개항사실을 조선 주재 각국공사에게 통고하고 마산포에 있는 유정당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다.
  창원부윤 안길수가 개항을 위한 감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별방에 마산해관지서가 남성동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

창포동 세관 이야기

이후 조계지내 가로가 형성됨에 따라 창포동 2가-31에서 1901년부터 업무를 보다가 1910년에 마산세관지서 건물을 지어 1946년까지 업무를 본 곳이다.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이며, 접안시설로 목조 잔교가 설치된 위치는 현재 창포경남맨션과 한백아파트 사이 길에 해당되는 곳이다. 당시 조계지 지도를 보면 이 두아파트는 바닷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해관이 있는 창포동은 조계지내에서 당시 영사관(현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 접하는 위치로 맞은편에 우체국(1902년 설립)과 함께 영사관과 업무연락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입지를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06년에 정부는세관의 해륙설비공사를 하기로 의결하고 08년에 추진하게 된다. 당시 공사예산액은 1만 천원으로 부두의 길이84.5M 돌제부 길이10M를 보완하여 등대를 설치하고 여기에 폭이 3.4M 길이9M의 목조잔교를 가설하고 해안의 세관구내를 간조면 위로 3.79M 와 5.76 높이로 땅을 정리하여  창고 1동을 세웠다. 해관 주위는 철조망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 1동도 신축했다. 마산항 최초의 항만시설이 완성된 것이다.


목조 잔교가 있는 해안 구내의 좌측에 목조 단층건물로서 아연도칠을 한 골함석을 지붕의 50평규모의 창고 한동이 있으며, 건평23평의 2층 목조건물인 세관지서장 관사 1동이 사진 우측에 나타나고 있다. 부두에 전신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은 1911년 이후에 촬영한 듯 하다.            
(마산에는 한일와사전기회사에 의해 1911년에 시작됨)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해관 목조잔교(1908-1910)

 

창포동에 소재했던 세관지서는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로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은 포치(현관부분)를 두어서 박공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산해관 마산지서전경(1910)

 

현재의 건물은 영생아파트와 1층에 수협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영사관에서 바로 보이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창포동 해관위치의 현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해관에서 영사관(경남대 평생교육원)을 바라본 모습

당시 세관과 영사관은 상당히 힘있는 사람들이 지나치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이 거리를 지나건만 그 때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

월남동 부두국 이야기

 

세관은 1943.12.18 폐청되고 조선총독부 교통국 산하에 부두국 소속됨에 따라 월남동에 월남동 46-4번지에 소재하는 부두국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창포동 세관이 이 곳으로 이전한 기록이 없다.
세관은 폐쇄되어도 마산항을 출입하는 모든 외항선들은 입출항은 일본인 마산세관장의 출입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보아, 양측에서 업무를 나누어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동 부두국 건물은 목조2층 구조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9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나 해안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현재 타이어상점이 들어서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월남동 부두국, 1943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두국 위치의 현재의 모습

 

해안도로의 확장에 의해 필지가 짤려지고 일부에 건물이 남은 모습이다.
이마저도 주변 아파트 재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땅의 흔적도 없어질 지경이다.

월남동 세관이야기

해방이후 1946.08.19 세관은 월남동2가 47번지(현재 마산식당)로 이전하였다. 여기로 세관을 옮긴 이유는 해방까지 해안의 매립에 부두가 현재의 해안도로변까지 확장됨에 따라 업무기능상 동선의 편의를 고려하여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월남동 마산식당 청사는 해방후 마산교회로 사용하던 것을 미군정청과 마산세관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사용하였고 한다.
그리고 원래의 창포동 해관자리가 59년에 마산교회의 자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산교회와 임대차 계약이후 창포동 건물과 교환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산식당의 건물은 다행히 당시의 구조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이력을 알아본 바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에 의하면 건축물 관리대장상은 1939년 등재되어 있으나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것을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개인영업(1939년 기준)에서 이 건물은 일이삼식당이란 상호로 古本露라는 사람이 요리집을 경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상공회의소 100년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의 마산식당 모습

당시 두월동에 여관이 유명한 곳으로서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여관은 요리와 숙박을 같이하는 지금의 호텔같은 기능을 하였기에 지어질 당시는 세관과 같은 업무기능은 아니었지만, 부두가 있는 해안으로 접근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건물은 원형이 잘보존 된 상태라서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주변개발에 포함되어 곧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울 뿐이다.

 


월포동 세관이야기

55년 8월 현재의 세관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1부두, 2부두, 중앙부두가 확장된 상태이었으며, 현 청사 부지는 당시에 보세지역으로 1951년 3월 2일 고시되었으나, 보세구역 및 창고는 조국해방에 따른 귀환동포 임시거처로 사용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임시세관으로 사용된 월포공립초등학교(1955)



 

당시 임시청사로 사용된 건물은 월포공립국민학교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미군이 보급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55년 4월 19일 징발한 것을 임시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을 보수해 사용하다 57년 사라호 태풍으로 넘어지자 1958.4.1.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신축했다. 지금의 청사는 1995년 1월에 신축한 건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58년 건축한 벽돌조 2층청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95년 신축한 현재의 마산세관

 

그나마 현재의 청사마저도 지방합동청사 추진계획에 의해 옮겨질 신세에 놓여 있다.

신포동 2만㎡ 부지 이달 입찰 공고·내년 6월 착공
2012년 완공…세관·검역소 등 6개 정부기관 입주
마산 서항 지구 해양신도시 조성 예정지에 산재해 있는 6개 정부 기관을 한 곳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지방합동청사가 신포동 1가 78 일대 2만6155㎡에 2012년까지 들어선다. 마산시는 3일 국비 482억원을 투입해 건물 연면적 2만4600㎡ 규모의 지방합동청사를 내년 6월 착공, 오는 2012년 3월 준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건물은 가만히 있으려 하나, 사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 꼴이다.
 
건물과 땅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한 건축물의 110년간의 이동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사람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동을 하게 되고 다양한 건물의 형식을 통해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세관건물은 물리적인 위치의 변경을 가지게 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한 장소에서 지어지는 건물의 수많은 흔적들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라는 도시를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독일의 요한 빙켈만 같은 고고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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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용팔 2009.11.16 08:4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시간이 지나고 그 발자취들이 희미해지는것을 보니 왠지 마음이 허 하네요.

    • 삼식이 2009.11.16 10:55 신고 address edit & del

      혹시 내 친구 용팔인지요?
      우리 지역에서 사라져간 것들을 하나씩 챙겨 놓으면, 다음에 허전함이 덜하겠지요!

  2. 2009.11.16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날 따라 신종플루도 아닌 것이 몸살기운이 심해 참석하지 못했네요. 아쉽군요. 그래도 이렇게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삼식이 2009.11.16 11:55 신고 address edit & del

      몸관리 잘하시죠, 이번주는 이승기 선생을 섭외중입니다. 아마 창동, 오동동의 숨어있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가 됩니다.

  3. 임민규 2009.11.23 18: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내용 감사합니다.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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