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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4) - 강점제3시기

 

120회부터 시작된 1930년대 이후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 강점 제3시기는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전쟁기로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한 시기로,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잠재우기 위하여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을 폈습니다.

1930년의 마산 인구는 27,885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36,429명이었습니다. 비율로 보면 30.6% 증가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목포가 85.2%, 부산이 70.9%, 진주가 71.9% 증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강점 후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 조성계획은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중앙동 2가와 3가, 즉 중앙간선도로 주위 지역에 시행되었고, 1930년대에는 고운로를 기점으로 그 아래 부분에 개설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운로의 바깥 지역, 즉 지금의 자산동 일대는 해방 직전인 1944-1945년경에 시행되었습니다.

둘로 나누어져있던 마산의 도시구조는 이처럼 중앙마산지역이 조성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현 신포동 일대에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시행된 대 규모 매립공사가 완공되면서 크게 바뀌었습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이 지형적으로 하나로 연결된 겁니다. 연결시기는 1935년경이라 볼 수 있고 이로써 마산은 대상형(帶狀型)도시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는 도시의 한쪽(신마산)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원마산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던 관공서 건물들이 하나 둘 씩 이곳 중앙부로 옮겨와 공공업무지역이 본격 형성되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시도했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였습니다만 계획대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강점 막바지였던 1942년에 마산은 부산과 함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마산에 인접한 창원군 내서면 내의 5개 동리와 창원면․구산면 내에서 각각 1개 동리씩을 마산부에 편입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사령 폐지 이후 시작된 마산의 산업시설도 주조 및 장유공장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는 대형 방직공작과 창고 등이 들어섰는데 이러한 산업시설은 주로 군수산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마산에는 ‘건설업계가 지금 황금시대를 맞았다’고 할 만큼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용도도 다양했으며 건축의 양식도 도회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조가 많았습니다. 건축이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크게 변화했던 시기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된 마산만의 매립은 1920년대 후반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마산 매립의 절정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강점 제3시기에 시행된 매립 횟수만 하여도 부두조성을 위한 매립을 포함하여 15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매립이 도시의 전체적인 균형과 발전을 위해 거시적으로 일관되게 계획되어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매립 주체인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립된 부지 중 어느 곳도 도시의 균형발전을 위한 도시기반시설이나 공공용지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부터 해방까지의 시기는 원마산 범역의 확산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해방 무렵에는 북서쪽으로 상남동을 지나 회산교까지 원마산과 이어졌으며, 그 범역이 산호리까지는 못 미쳤지만 오동교까지 건물이 가득 들어었습니다.

도로 개설은 20년대에 비해 많지 않았다만 외곽으로 그 영역이 많이 넓어졌고 이미 개설된 도로의 폭을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을 기준으로 볼 때 원마산의 일본인 소유 대지는 36.2%로서 1930년의 38.8%에 비해 다소 낮아졌습니다만 기업 몫까지 합하면 42.3%로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이처럼 기업 소유의 대지가 많아진 까닭은 일본인의 토지 지배가 강점 후기로 갈수록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은 1945년 마산지도입니다.

1930년, 1920년, 1910년, 1899년 개항 당시의 지도와 함께 올리니 비교해보기 바랍니니다.

<1945년>

 

<1930년>

 

<1920년>

 

<1910년>

 

<1899년>

-----------------------------------------------------------------------------

이것으로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2차 게재' 중 '강점 제3시기(1930년부터 1945년까지)'가 끝났습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음처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포스팅할 계획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1차 ; 고대부터 개항(1899년)까지

2차 ; 개항이후부터 해방(1945년)까지

3차 ;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미 완료한 '1차 게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 ------ 9회

조선시대----------- 4회

개항기------------- 12회

합계--------------- 25회 완료

 

'2차 게재'는 다음처럼 구성하기로 했으며 이번 포스팅을 끝으로 네 번째 순서를 마쳤습니다.

개항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총 32회 (26회부터 57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총 27회 (58회부터 84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2시기(1921년부터 1930년까지)----총 35회 (85회부터 119회까지) / 완료

일제강점 제3시기(1931년부터 1945년까지)----총 75회 (120회부터 194회까지) / 완료

이 계획과 달리 앞으로 몇 차례 2차 게재(1899년부터 1945년까지)된 부분을 정리한 내용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3차 게재' 계획입니다.

산업화 이전시기(1945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도약 및 전성기(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체 및 쇠락기(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 본 연재는 마산도시를 연구하면서 확보한 자료를 공유하자는 목적도 있습니다.

  혹시 좋은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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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한반도 최초의 도시계획>

마산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구조 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30년대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품 공급창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해안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매립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중앙마산이 완성됨으로써 이전까지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었으며, 원마산은 철도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범역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법은 1934년 6월 20일자로 만들어진「조선시가지계획령」입니다. 이보다 앞서 1920년에 시가지계획령을 입안한 일이 있으나 시기상조란 이유로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도시계획과 관련한 법제 중 가장 이른 것은 한일병합(1910) 이전에 개별 건축물을 규제하는 장치로 만든「건축규칙」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규칙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와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도시 관련정책으로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시달한「시구개정훈령」으로, 시가지 내의 도로․교량․하천 등의 관리를 위한 내용으로 시행된 바 있습니다.

1913년에는「시가지건축취체규칙」이 제정되어 개별 건축물의 방화․위생․건축선 등 건축 경찰적 의미의 규제가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제도가 근대화 여명기에 있었던 우리나라 도시 관련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정책은 최소한의 도시 관리에 그친 정책이었으며, 대규모의 도시개조와 개발은 주로 군사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초법적인 식민지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1930년대 초까지 지속되다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이 법은 크게 다섯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① 도시계획의 수립 ② 도시계획사업의 집행 ③ 지역․지구의 지정 ④ 건축제한 ⑤ 구획정리사업에 관한 사항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계획령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도시계획․건축․도시개발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도시 관련 법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동경시구개정조례(1887)」보다 47년, 일본의 도시계획법(1919)보다는 15년 늦게 제정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21년에 서울․부산․대구․평양 등 중요 도시에 대하여는 도시계획실시를 전제로 한 도시계획조사가 진행된 바 있지만 구체적으로 시행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최초로 적용된 도시는 나진이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도청소재지는 이보다 2년 뒤인 1936년부터 적용하였으며 해방되기까지 전국의 총 42개 지역의 도시계획을 이 계획령으로 수립하였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제정의 직접적인 동기는 나진 개발의 긴급성과 당시 전국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 현상이었습니다.

나진 개발의 긴급성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만주사변(1931)의 결과로 일본에게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가 생긴 것은 1932년 3월 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경제수송로로 일본본토-해로-나진항-만주국내 도문-길림-신경(현재의 장춘) 노선이 결정되었습니다. 1931년 말 현재의 인구 4,520명이었던 빈한한 어촌 나진을 갑자기 이렇게 결정하자 1931년 경, 평당 12-13전 하던 땅값이 1932년경에는 40원 이상 급등하였습니다. 이런 토지투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 당무자들이 땅을 사지 않고 계획적으로 조성하는 방법, 즉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시가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두고 나진 개발의 긴급성이라 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나진의 땅값이 얼마나 요동을 쳤던지, 1932년 11월 13일 동아일보 나진 르포기사에 나진 일대 부동산에 투자하여 수백배의 차익을 남긴 동일상회 두취 김기덕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기존 시가지의 개량보다는 신시가지의 창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한반도 내 많은 신시가지가 이 계획령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긴급히 시행한 까닭에 여러 가지 문제도 야기되었습니다.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의 미 분리, 그리고 경험의 미숙 등으로 인해 오히려 무질서한 시가화를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집행으로 형성된 전국 신시가지의 형태는 기존 시가지와의 관계에 따라 ① 구 시가지의 정비확장형(서울․평양 등) ② 신․구 시가지의 분리입지형(부산․목포 등) ③ 신도시형(신의주․진해 등)의 세 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서 ①의 유형은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던 도시들로서 기존도로망의 확장․포장․직선화가 도시계획의 중요한 실적이었으며, 기타의 도시에서는 일본사람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의 형성이 중요한 도시공간의 변화였습니다.

이 도시 마산의 경우는 ②의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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