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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6. 박애의 두 간호원

96. 박애의 두 간호원

 

 

현재 마산시 가포동에 있는 국립마산병원은 소위 대동아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 해군 당국에서 상이군인 요양소로 발족한 후로 해방과 함께 오늘에 이르렀다.

 

이 병원의 위치에 있어서 요양지대로서는 전 동양적이라고 한 독일 의학도로부터 지적당한 곳이다.

 

전쟁 중반기부터 남방에서 부상한 육·해군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치료하던 곳으로 많은 환자들이 회복소생한 곳이다.

 

워낙 숫자가 많이 밀려와서 완전한 치료도 해 받기 전에 8·15가 닥쳤다.

 

한국에 있던 일인들은 세화회(世話會)’의 주선으로 그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곳에 입원환자 역시 목선을 빌려 귀국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이요양소는 원장을 필두로 일인 용원까지 앞을 다투어서 떠난 뒤에 맨 끝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함경북도 출신의 해군지원병 두 사람과 두 환자를 위한 일인 간호부 두 사람, 모두 네 사람이었다.

 

두 사람 조선인 지원병은 악성 결핵환자라는 것이다.

 

넓은 병사에는 환자가 많은 때라도 시체 수용실에서 도깨비불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어 간호원들은 그곳을 지나가기를 모두 꺼려했다.

 

백주에도 죽은 듯이 적막한데다 눈이나 비 오는 밤이면 공허한 각 환자실은 무시무시한 적막감에 휩싸였다.

 

두 처녀 간호원은 죽음길을 달리는 두 환자를 위해 일일천추(一日千秋)로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맘을 억누르고 이러한 병원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오직 간호에만 열중했었다.

 

갸륵한 그들은 천사적인 박애감과 나이팅게일 정신 그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보람 없이 이듬해 두 젊은 환자는 때를 전후하여 운명하였다.

 

두 사람의 시체를 경건히 입관시킨 다음 병원의 뒷산에 안장했다. 두 사람의 명목을 빌면서 가포 동민들의 석별의 정을 뒤로 그들은 고국으로 떠났다.

 

해방 후 요양소 인수 만 10년 기념식 때 마산의사회(당시 회장 제길윤)에서 그들을 표창하고자 서둘렀으나 8·15 전후의 혼란기라, 그들의 주소 성명을 아는 사람을 찾을 길이 없었다.

 

동경 조일신문(朝日新聞)에까지 주소 탐문을 의뢰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다는 신문보도였다.

 

꼭 찾으려면 일본 적십자사에 조회하는 길 뿐인데 이들이 생존하였다면 이미 60을 넘은 고령일 것이다.<<<

 

아래 사진은 한국결핵사에 실려있는 국립마산결핵병원 전경.

병원 너머 넓은 터가 비어 있는 걸로 보아 한국철강이 들어오기 전 사진이다. 연기가 나는 큰 굴뚝은 현 남부터미널에 있던 마산화력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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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2. 묘락좌의 화재사건

92. 묘락좌(妙樂座) 화재 사건

 

1931310일은 일로(日露) 전쟁에 승전한 육군기념일로 진해 군항에서는 아침부터 축제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읍내에 있는 목조 2층 건물인 영화관 묘락좌(妙樂座)에서는 무료 영화를 공개하는데 조선인을 제외한 일인, 읍민, 군인, 소학생만으로 소위 대입(大入)’ 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한창 상영되어가고 있을 때, 2층 영사실에서 돌연 화재가 일어났다.

그 당시의 필름은 가연성 물질이어서 가끔 인화의 화를 입게 되었으므로 필름을 취급하는 자는 각별히 주의를 했어야 했다.

그날 묘락좌(妙樂座)의 경우를 보면 무료 입장이라 장내는 발디딜 틈이 없었고, 영사 도중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비상구는 물론 출입문까지 꼭 잠가버린 뒤에 불이야소리가 났으니 장내의 소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화재는 삽시간에 사방으로 점화하여 연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목조 2층 건물은 완전 소진되었는데, 성인 몇 사람이 겨우 탈출하여 생명을 건졌을 뿐 일인 소학생 150명이 모조리 소사(燒死)하였고, 그 중에는 아기를 보는 조선인 여아가 단 한 사람 희생이 되었다.

<희생자를 150명이나 낸 진해소학교>

 

그 후 소사자(燒死者)의 수는 더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국에서는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은폐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이건 여담이지만 이 화재사건을 보도하기 위한 일본 국내 양대지(兩大紙)의 치열한 경쟁을 여기에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예나 지금이나 동종의 사업 치고 경쟁이 없는 것은 없었듯이 국내의 동아·조선지도 그랬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대 조선신문(일본 야당계 수산경장收山耕藏 주간)도 그랬다.

일본의 양대지 대판매일과 자매지 동경매일(지금은 지명을 붙이지 않고 매일신문으로 발행)은 정부 어용지로서의 대신문이지만 동경 대판의 조일신문(朝日新聞)은 지사적인 인물만 모인 절대 자유주의적인 신문이란 점만 보더라도 하나에서 열까지 대립될 소지가 많았다.

전기(前記) 진해 극장 대화재를 예를 든다면,

당일 이 급보를 대판매일 부산지사에 제1신을 알린 부산일보 마산지사장 겸 매일신문 통신원 고교무웅(高橋武雄) 기자는 진해 현지에서 취재 즉시 그 시간에 부산지사에 출근하고 있던 김근호와 접선, 부산 체신국으로 달려가 부산, 일본간 해저전선을 대절함으로써 김근호 특파원발 특급 전보가 매일(每日) 본사로 입전(入電)하여 지급(至急) 호외가 되어 도하 각지에 살포되었으며, ·석간에 호외 재록(再錄)까지 할 수 있었으니 본사 간부 일동은 보도 승리를 자축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오직 조일지(朝日紙)의 청산(靑山) 특파원은 도경찰부에 들어오는 현황 보고에만 의존하여 전신과에 당도하니 경쟁지의 특파원은 벌써 본사에 연락하고 난 뒤라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타전코자 하면 여전히 전보선 대절이란 방해에 부닥쳐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매일(每日)의 전격적인 선수에 위축된 것은 조일 외 제국통신 등 2,3개 전신사로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진해사건은 매일(每日)이 완전 독점함으로써 치명상을 입은 특파원 청산(靑山)에 대해서는 경고 또는 퇴사론까지 대두되었다고 하며 김근호 특파원에게는 본사가 표창을 한 것은 물론 정사원으로 임명됨으로써 언론계의 한 때 화제 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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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2. 금융계의 공황 63. 각 관공서의 한동

62. 금융계의 공황(恐慌)

 

1927(소화2) 전국 금융가를 휩쓸던 모라토리엄(moratorium : 지불유예 또는 지불정지)은 금융가 뿐 아니라 국민생활에 일대 공황을 가지고 왔다.

때는 동녕 422일자로부터 대만은행을 제외한 전 일본 영토를 포함한 은행과 금융기관(조선의 금융조합도 동일)에 예치한 금액을 향후 3주일간, 512일가지 5백운 이상은 지불 유예하기로 긴급 칙령 96조로서 공포했던 것이다.

당시 마산 식은(殖銀)지점과 조선은행 출장소 문전에 게시한 공포문은 다음과 같다.

 

사법(私法)상 금전 채무의 지불 및 수형(手形) 등 권리보존 행위의 기한 연장을 하는 건이 바로 모라토리엄이라 해 놓고는

1. ··(··) 그 외의 공공단체의 채무지불.

2. 급료 및 임금의 지불.

3. 급료 및 임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은행 예치금의 지불.

4. 그 외의 은행 예금의 지불로서 일일 5백원 이하에 대해서는 적용치 않음.

 

<모라토리엄 공포문을 붙였던 식산은행 마산지점 / 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이상과 같이 지불 유예 또는 지불 제한이라는 선풍의 진원이 된 것은,

동경에 본점을 둔 대만은행이 스즈기(鈴木, 령목)이라는 개인 상사에 35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부당 대부하고 회수가 불능하여 파산에 직면하였던 터라, 이 구제의 일책으로서의 공포 시행하였던 것인데

이 격랑은 불과 수 년만에 정치문제에까지 비화하여 당시의 여당이던 정우회 전중(田中)내각이 도각(倒閣)되고 전중 총리는 자살까지 하였으며 철도상 소천(小川), 문부상 교본(橋本) 외 삼토(三土) 4, 5명의 거물급이 구속되는 등 일본 정계에 추한 파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 지불유예 소동으로 인한 일본 상공계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던가?

소화 3년호 조일신문(朝日新聞) 발행의 조일(朝日)연감을 인용하면

상공성(商工省)의 의촉(依囑)을 받은 동경실업조합연합회는 422일부터 3주간의 지불 정지의 실제적 방면을 조사한 것을 다시 동경상공회의소에서 엄밀히 재겸토한 결과 그 손해 견적액은 714904천원인데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최인고감소(取引高減少)에 의한 확정액                              485,450,000

2. 상품상장(商品相場)하락에 의한 손해고                              215,177,000

3. 수형지불연기(手形支拂延期)에 의한 이불(利拂) 손실고         12,780,000

4. 매잔품(賣殘品)에 대한 보관료에 의한 손실고                         1,415,000

 

63. 각 관공서의 한동

 

1935(소화10) 한여름 동안 전국 각 관공서에 토요일이 아니라도 평소 출근일은 정오 시보를 알리면 한동이라 하여 일제히 퇴근, 각기 취미에 따라 행동하게 되므로 공무원들을 기쁘게 한 일이 있었다.

한동이란 말은 일본말 반()오란다(네덜란드의 일본식 표현)말인 과 합해서 반휴일(半休日)이란 뜻인데 원래 오란다어 존다그(Zondag)라는 것은 휴일이라는 뜻인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돈다그로 발음을 와전해온 것이다.

그들 발음대로 전휴일을 반휴일이라 하기 위하여 이라한 것이다. 그들 말대로 한돈을 시행한 후의 사세(事勢) 능률이 매우 신속하고 청내 분위기가 명랑할 뿐 아니라 오후의 피로가 한결 줄어지고 건강에 좋은 영향이 있었다고 하나 그 후로 전쟁 준비 관계였던지 중단되고 말았다.

* 부기 ; ‘한돈중에 사무계통은 정오까지 집무하고 운전수는 오전과 오후 교대로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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