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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09:35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흠모하다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십 수차례 드나든 중국이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유수한 역사를 가진 나라와 민족이 많지만 중국만큼 볼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다. 기기형형한 자연은 물론이고 추측하기 조차 힘든 거석과 미금의 조형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천하제일이라는 만리장성도,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는 병마용도, 사천성 여행의 도강언처럼 가슴 요동치는 감동을 내게 주지는 못했다.

근대의 힘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위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이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년대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수백 년 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황무지였던 성도평원을 일거에 옥토로 만든 이 수리시설은 진(秦)나라의 지방 관료에 불과했던 촉군 태수 이빙(李冰)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강언은 사천성 서북 고산지에서 발원하여 양자강 상류로 흐르는 민강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한 수리시설이다.
사천을 일러 흔히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부르지만 도강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사천지방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고산지대에서 시작되는 민강은 심산협곡을 지나면서 점차 수량이 증가해 사천의 성도분지에 이르러서는 물결이 세지면서 강의 규모도 커진다.
포악해진 강물은 낮고 약한 제방을 무너뜨렸고 범람한 물은 성도 평원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었다. 상류로부터 내려 온 흙과 모래가 강 곬을 높인 탓에 강물이 제방을 넘었던 것이다.

아직 미개했던 백성들은, 민강에 탐욕스럽고 독한 용이 살고 있어서 수마가 생긴다고 믿었다.
하여 독룡의 마음을 풀기 위해 매년 몸에 상처 나지 않은 깨끗한 처녀 둘을 산채로 물속에 떠밀어 희생시켰다.
사천 백성들에게 민강의 홍수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었다.

                    <도강언으로 강물이 수백 갈래로 나누어지는 모습>

천형(天刑)처럼 피할 수 없던 자연의 섭리, 그 숙명 앞에, 민강의 물길을 조절하여 수해를 막아 성도평원을 옥토로 만들겠다고 태수 이빙이 나섰다.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송두리째 빼았던 거대한 폭류를 잘게잘게 갈래를 나눠 순하고 유익한 농업용수로 바꾸는 대(大) 토목공사.
이것이 역사적인 도강언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도강언의 시설은 분수제(分水堤)의 역할을 하는 어취(魚嘴)와 수량과 토사를 조절하는 비사언(飛沙堰), 암산을 뚫어 물길을 돌린 보병구(寶甁口)가 있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취수와 배수, 토사배출 등 강물의 곡류현상과 침식, 운반, 퇴적의 원리를 고스란히 적용하였다.

물고기 주둥이를 닮은 어취에서 내강과 외강으로 나누어진 강물은 네 갈래 여덟 갈래 식으로 총 5백여 갈래의 인공 강으로 변했다. 물은 성도 대평원을 옥토로 관개하였으며 내륙수운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또한 경내에는 이 수리시설에 공을 세운 이빙에서부터 삼국시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언졸(堰卒)을 두었던 제갈량을 비롯하여 현대의 인물, 예컨대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등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도강언은 단지 수리시설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역사가 압축된 현장이었다.

한 공간 속에 자연과 역사와 과학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도강언은 중화민족문화의 깊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진리를 사실로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수리시설은 2천 2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천백성의 풍부한 농작물 생산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강언 때문에 얻은 사천성 민초들의 물질적 이익은 말로 헤아리기 어렵다.
이곳 사천성을 이른바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만든 것이다.

이빙이 관운장과 더불어 신앙의 대상으로 까지 추앙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대미문의 대 수리시설을 설계 시공한 이빙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평생에 관한 어떤 자료도 남긴 바 없다. 단지 견고한 제방만 남겨두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을 추측케 할 뿐이다.
2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위대한 수리시설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지만 정작 이를 만든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진(秦)이 촉(蜀)을 멸하여 이곳에 촉군(蜀郡)을 설치한지 60년 되던 해, 곧 기원전 256년 그가 촉군 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천문지리에 능하였고 실지 고찰을 중시하였다는 사실과 수맥에도 밝아 염정을 파서 촉군의 소금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천년의 복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말한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이미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지만 이곳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민중을 위해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뭄과 장마가 끊일 새 없던 사천 평원은 천혜의 조건을 가진 땅이 될 수 있었다.

중국민족에게 극심한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곳은 안온하게 민족을 보호하고 포근하게 적셔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과장됨이 없이 이곳은 영원히 중국 민족에게 생명의 물을 대어 주는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제갈량과 유비의 지략이 꽃필 수 있었고 이백과 두보의 시문이 존재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 가깝게는 이곳으로 인해 중국이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안정된 후방을 지닐 수 있었다.

이곳의 물줄기는 만리장성같이 화려하지 않지만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살며시 땅 속으로 스며들어 끝없이 이어진다. 따라서 그 길이로 보면 결코 만리장성보다 짧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이어진다.
만리장성의 문명이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조소(彫塑)라고 한다면, 이곳 도강언의 문명은 살아 숨 쉬는 생활 그 자체이다.

만리장성은 마치 오래된 자격증을 내걸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데, 이곳은 구석 한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마치 전혀 빛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고향의 어머니처럼 그저 무엇인가를 베풀기만 할 뿐이다.
이곳이 바로 도강언이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물리적 원리를 응용하여 완벽한 수리시설을 만든 공학적 능력, 자연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강인한 도전정신, 목민관으로서의 신념.

귀국한 후 한참까지 이빙은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새벽녘, 불모의 땅을 바라보며 한숨 토하는 이빙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느덧 그는 내게 큰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내 딴에는 눈 넓힌다고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지만 어떤 건축물 어떤 구조물에서도 이처럼 가슴 뛰는 경이로움을 맛보지는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인간에게 이만한 찬사를 보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짧았지만 긴 여행이었다.

누가 내게 ‘한 인간의 열정이 역사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답할 것이다.
‘도강언에 올라 이빙을 보라’

                                <첫 갈래의 시작점인 어취>
                      <도강언, 하나의 민강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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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0.02.18 20:4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설은 잘 쉬셨는지요.
    여러가지로 도움도 못드리고 심려만 끼쳐드려 지송합니다.
    참, 여행을 즐기시네요.
    좋은 결실 있길 바랍니다.

    • 허정도 2010.02.19 10:34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설 잘 보냈습니까?
      경인년에는 좋은 일이 많이있기를 바랍니다.

2009.09.17 09:59

300만명이 굶주리며 죽어가던 그때 뭘했냐고 묻는다면?


안녕하십니까? 허정도입니다.

오늘은 이 시대의 글 꾼 황석영의 『바리데기』라는 소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소설의 소재는 북한의 참상을 배경으로 쓴 뿌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글 솜씨가 워낙 뛰어난 까닭에 책장이 잘 넘어갑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주인공 바리를 통해 식량부족으로 겪는 북한의 참혹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90년대 중반, 대한민국의 지척에서 삼백만 명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간 바로 그 시기입니다.

한 대목 보겠습니다.


 

‘미이 언니와 두만강에 나갔다가 사람이 천천히 떠내려 오는 걸 보았다. 어린애를 업은 채 앞으로 처박힌 아낙네의 시체였다. 아기와 엄마가 함께 죽은 것이다. 나중에 그 강변에는 더 많은 시체들이 떠내려 오곤 했는데 맞은편 중국인 마을에서는 자기네 기슭에 닿으면 장대로 밀어내곤 했다.’

 


 

‘칠월 말부터 시작된 폭우는 팔월 중순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산비탈에 심은 옥수수며 남새밭들은 모조리 쓸어내려갔고 철길과 도로는 곳곳이 무너지고 끊겼다. 라디오방송에서는 나라 전체가 물구덩이 속에 잠겼다고 말했다. 홍수가 넘친 들판과 시 변두리에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어떻습니까?

저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한 굶주림이었습니다.

 

이런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바리는 할머니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고 중국을 거쳐 홀로 런던으로 가는 밀항선을 탑니다.

런던 차이나타운의 밑바닥 생활을 견디어낸 바리는 희망을 꿈꾸며 파키스탄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희망 앞에 또 다시 9·11테러와 영국 지하철 테러가 터지면서 소설은 미래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둘러싸인 인간세상의 위태로움을 예감하며 끝이 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대목 소개합니다.

바리가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한 독백입니다.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었을 때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한 것에 대해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나라 밖에서 내 나라 말이 통하는 유일한 나라, 북한.

같은 민족인 우리는 언제쯤이나 함께 살 수 있을까요.





 ※ 책 읽어주는 남자 9월 16일 방송입니다.


바리데기 - 10점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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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아시아방송 2009.10.02 03: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 이 글 링크를 자유아시아방송 Delicious account에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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