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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부터 1945까지 15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3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일제의 병참기지가 된 한반도>

이 시기는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전쟁수행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 시기입니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발한 경제공황은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파급된 대공황이었습니다. 대미무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일본 경제도 여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업생산이 위축되고 임금체불 노동자의 대량 해고로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고, 그 여파가 농촌에까지 이어져 몰락하는 농가가 속출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일본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31년 만주에 대해 무력 침공을 감행하게 되며, 만주 침공 후에는 중국본토시장을 둘러 싼 열강의 대립으로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까지 확대시킵니다.

일본의 독점자본은 1931년 만주 침공시기부터 중일전쟁 전․후기까지 전쟁 수행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한국에 급속히 진출하여 광물자원의 약탈적 개발과 군수공업을 이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전시경제체제하에「대륙전진 병참기지로서의 한반도」역할이 강조되어 산업구조의 군사적 개편이 진행되었습니다.

식민지 권력과 유착한 일본 독점자본의 이식은 일본제국주의가 절실히 요구하는 화학공업․금속공업․광업 등의 군수산업부문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한국에는 급속하게 대형 공업시설이 들어왔습니다.

이 때 한국에 진출한 일본독점자본은 당시 일본 3대 재벌이었던 三井(미쯔이)․三菱(미쯔비시)․佐友(수미모토)를 비롯해 野口(노구치)․日鐵(닛데츠)․東拓(도다쿠)․伊藤(이토)․片倉(가다쿠라) 등의 중견재벌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화학공업․금속공업․광업 등의 군수산업에 집중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5억 엔을 들여 1944년에 준공한 압록강 수풍댐 수력발전소입니다.

두 번째 사진은 1942년 준공한 흥남 조선질소비료공장 전경이며,

마지막 사진은 대전에 있었던 군시제사공장(郡是製絲工場)입니다. 부지면적 26,750 건물 5,085평 제사기 400대, 종업원 약 600여명, 연간 조업일수 344일로 1930년 기준,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제사공장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제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만주 및 중국의 철․석탄 등의 지하 자원과 콩을 비롯한 농산물과 각종 군수물자의 수송 등 전시수송력 증강을 위해 한국의 철도와 항만건설에 주력하였습니다.

남북 1,000㎞에 달하는 부산-신의주의 대륙간선(大陸幹線)의 복선화가 이 시기에 실현되어, 1942년에는 철도 총 연장이 약 4,536㎞로 1919년의 2,197㎞ 보다 2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1876년 개항과 동시에 각 개항지에 그들의 우체국을 설치했던 한국의 통신수단을 정비하고 그 독점적 지배도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신지배는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군사․정치적 지배, 특히 그들의 소위 치안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마산도 개항 때문에 체신의 역사가 매우 빨랐습니다. 개항 6개월 후인 1899년 11월 4일 당시의 행정 구역으로 창원시 외서면 중성리(현 마산합포구 중성동)에 부산우편전신국 마산출장소가 발족하여 12일 후인 11월 16일 사무를 개시하면서 우편과 일어문 전보를 취급했으며, 이듬해인 1900년 4월 15일 마산우편국으로 승격되어 6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개시되고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산된 식민지 후기에는 「대륙전진기지로서의 한반도」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전시 경제체제가 한층 더 강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자본의 한국진출이 보다 활발해지고 한국 내의 공업도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산업발전에 필요한 원료․자재․노동력은 일본인 소유의 대형군수공장으로 집중된 반면, 한국 민족계 산업자본에 대해서는 오히려 통제와 억압이 가중되어 대부분의 한국인 중소기업은 쇠퇴해 갔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는 강압 폭력정책으로 치닫고 국내의 사회 경제적 상황도 이에 맞물려 최악의 상태로 변했습니다. 또한 기반시설을 갖추지 못한 도시에 피폐한 농촌에서 유입된 이농인구 때문에 도시문제는 점점 더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줄여 말하면, 한국내의 도시들은 ① 일본자본주의 도시의 상품시장 및 유휴자본의 투자대상지 ② 군사적 목적을 위한 세력 거점지 ③ 식민지 내 기생적 매판세력의 중심지 ④ 식량 및 원료집산지라는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15년 간,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직물, 술, 부식 등 군수품을 보급하기 위해 공장들이 들어섰고, 마산에서 생산된 물자를 전장으로 나르기 위한 부두가 건설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지금도 돝섬으로 연결되는 마산여객터미널 일대의 제1부두, 제2부두, 중앙부두가 바로 이 시기에 건설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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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천혜의 바다에 매립이 시작되다>

마산도시변천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립은 마산의 도시규모를 키웠고 교통과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도시중심권을 이동시키기도 했습니다. 매립이 지도만 바꾼 것이 아니라 마산시민의 생활까지 바꾸었습니다.

특히 근대도시 형성기였던 일제강점기의 매립은 마산도시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키쳤습니다. 그러므로 마산만 매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산도시변천과정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아래 두 그림 중, 왼쪽은 매립 전 자연상태의 마산만이고, 오른쪽은 현재 계획하고 있는 마산해양신도시(푸른 점 부분)와 가포신항만 일대에 계획된 매립까지 완공되었을 때의 마산만입니다>


일찍부터 마산이 항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마산만 주변을 둘러싼 자연조건, 즉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의 위치와 피항에 적합한 지형 때문입니다.

멀리 고려시대 조창인 석두창(石頭倉)과 일본정벌을 꿈꾸었던 정동행성, 그리고 조선시대 마산창(馬山倉)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 조정에서 마산항을 중시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제도 이 땅을 지배하면서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일찍부터 마산을 점찍었습니다.
일본과 한반도와 대륙을 연결할 수있는 중요 항구로, 자국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탈의 대상으로, 전쟁 때는 후방의 병참기지항으로 마산을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자본가들에게 마산해안의 간석지는 손 쉽게 삼킬 수 있는 고급먹잇감처럼, 저비용으로 고수익을 올려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원시적 축적수단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마산의 매립지 중 어느 한곳도 공공용지로 사용되었거나 도시발전을 위한 기반시설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앞의 이익을 챙겨주는 돈벌이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제의 군수용품 수송부두을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매립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일본 사기업과 개인의 돈벌이 수단이었습니다.

일제만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이런 사정은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매립한 땅에서도 이 도시의 미래를 위한 공공용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매립지는 공장을 짓거나 분양해 돈만 챙겼습니다. 가장 최근에 매립한 구항과 서항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보았던 마산만과 해방 후 이 나라 지배층들이 보았던 마산만은 여전히 탐욕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마산만 매립은 완공기준으로 개항기 4회, 1910년대 2회, 1920년대 3회, 1930년대 이후 15회로 총 24회 325,000평 규모였습니다.
그 결과, 갈대밭과 갯벌로 아름다웠던 이 도시의 해안선은 해방 때 전부 석축으로된 직선 호안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든 매립의 주체는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민간인 등이었습니다.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했으며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매립한 사례도 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 농지, 공장용지, 군용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하기도 했고 기업과 개인에게 분양과 임대를 목적한 매립도 있었고 자신의 사업장을 확대하기 위한 매립도 있었습니다.

한 밑천 잡기위해 매립에 뛰어들었다가 막차를 타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마산만 매립은 내용과 형식이 다양했습니다.

단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면 그 주체가 모두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개항 직후 한국인이 매립을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약해져 버린 국력 탓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회 부터 포스팅할 글에서는 매립에 대한 이야깁니다.
매립과정과 공법․비용 등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도시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매립의 시기와 위치․규모․시행자 정도로 한정해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시기의 기준은 공사가 완공된 일자로 하며 완공일자는 토지대장의 기록을 기준하겠습니다.

일제기 마산매립에 관한 자료는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공법, 비용, 회의록, 설계도서 등 매우 구체적인 자료들이 남아있습니다.

개항 직후의 시기에 매립계획은 세웠지만 실제로 시행되지 못한 사례가 5건 있습니다.
그것들까지 포스팅하겠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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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1.01.17 06: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날씨가 너무 춥네요.
    누가 그러더군요.
    빙하기가 시작돈 게 아닌가 하고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 허정도 2011.01.19 08:52 신고 address edit & del

      날씨 때문에 참 걱정입니다.
      인간들 욕심이 만든 자연재앙이 앞으로 점점 더 커질 텐데,

  2. 임종만 2011.01.17 11: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매립의 진실, 새롭고 흥미로운데요 ㅎㅎ
    다음 포스팅 기대됩니다.

    • 허정도 2011.01.19 08:54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1910년 이전까지의 매립부터 실어보겠습니다.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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