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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6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6) -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1 중성리에서 쿄마찌(京町)까지

 

조선 중기, 대동법이 시행되자 해로가 연결되는 전국 각지에 조창(漕倉)이 설치 되었다.

경남에는 영조 36년(1760년)에 창원 마산창과 진주 가산창(駕山倉)이, 1765년에는 밀양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었는데 마산창 관할구역은 인근 8개 읍이었다.

고려시대에도 마산포구에 석두창이란 조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없어지고 이때 다시 신설되었다.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파출소 주변 1,700여 평의 부지에 총 8동, 53칸(間) 규모에 ㄷ자 형태로 바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조창이 설치되자 먼저 관원과 상인들이 찾아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점차 동리를 이루었다.

동성, 중성, 오산, 서성, 성산, 성호 6개 리(里)가 그것인데 그때의 지명 대부분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倉洞)이란 지명도 조창에서 따온 것이다.

<마산창의 유정당 / 1760년>

 

조운(漕運)제도는 그 때까지 미미했던 전국적 유통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조창을 둔 지역은 교통요충지나 화물집산지로 부각되었으며 정기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마산포도 도시적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윽고 19세기말  경에는 중서부 경남의 대표적 곡물집산지로, 화폐경제와 함께 발달한 굴지의 시장으로, 동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원격지 상업의 중심지 역할까지 하는 유수한 항구로 성장했다.

20세기 초, 마산포에는 약 2천여 호의 가옥이 조밀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상점들도 많았으며 해변에 면한 가로에는 선박화물이 가득했다.

조창 일대, 즉 남성동지역이 상업중심지였으며 현재의 동성동 일대는 배후주거지였다.

당시에 사용하던 길은 손수레나 지게 정도가 겨우 다녔을 정도로 좁고 꾸불꾸불했는데 이 골목은 지금도 동성동 일대(코아 양과점에서 아구찜 골목까지)에 존속하고 있다.

해변에는 오산선창, 어선창, 백일세선창, 서성선창 등 4개의 선창과 동·서 두 굴강이 있었다.

그러나 항만시설은 천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인위적 시설이라고는 석축돌제로 된 원시적 접안시설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외부로 연결되는 도로는 창원·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길과 칠원·창녕·현풍을 지나 서울로 가는 길, 그리고 삼진지역(당시는 진해라고 불렀다)을 거쳐 진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이처럼 마산포에는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약간 벗어난 곳들, 즉 자산동에서 서남으로 이어진 현재의 신마산 방면과 북동쪽 일대는 민가가 산재한 경작지였다.

 

-일본인의 마산 진출-

189951일, 마산은 개항이라는 대전환을 겪는다.

마산포 남쪽 2km거리에 있는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후에 신마산이라 부르게 되는 계획도시가 들어섰던 것이다.

<마산포 약도 / 1899년>

 

같은 해 111일, 부산해관 마산출장소로 사용되던 남성동 조창건물에서 시행된 제1차 경매를 시작으로 총 네 차례의 경매를 통해 조계지는 외국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1차 경매에서는 무려 토지정가의 100배까지 응찰할 정도로 외국인의 마산 선점욕은 극에 달했다.

1·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하여 공동조계 성격이 있었지만 뒤에는 일본이 독차지해 버렸다.

1900년, 조계지에는 도로폭이 8m 이상이어야 된다는 조계장정에 따라 마산 최초로 신마산지역에 남북을 가로지르는 폭 14m의 신작로가 뚫렸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방향의 몇 갈래 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마산의 일본인은 15여 호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조계지의 비싼 지가와 그들의 생업 때문에 대부분 마산포에서 살았다.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80여 호 26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들 중 조계지에서 상점을 차린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러일전쟁으로 모여든 군인들과 그들을 대상으로 생업을 가지게 된 일인들이 생기면서이다.

1904년 이후 일인 소학교(현 월포초등학교)와 병원이 생겼고 이사청과 일본제일은행출장소 등 공공시설들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인 어업이민촌 지바무라(千葉村)가 가포에 들어선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일본인의 마산진출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 그리고 마산과 삼랑진 사이에 건설되었던 철도 마산선의 개통으로 본격화되었으며 이 변화의 물결은 마산포에도 밀어 닥쳤다.

원래 마산선은 한국 민간인이 설립한 영남지선철도회사가 착공한 마산과 삼랑진간의 철도였다.

이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을 빌미로 사업권을 강제 접수하고 일본에서 기술자를 동원, 19055월 개통하고 11월부터는 민간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산선 철도는 경부선과 경인선에 이어 설치된 것으로서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킨 것은 물론, 해로와 육로를 통해 마산을 일본과 한반도 내륙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때 들어온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일본의 유곽도 들어왔다.

이때까지도 마산포와 조계지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중앙부는 대부분 논밭으로 인가가 거의 없었고 진주가도라 불렸던 꾸부렁한 외길만이 두 지역을 연결하고 있었는데 바로 크리스탈 호텔 앞 길이다.

1910년경, 신마산에 정착했던 일본인들의 영역은 조계지 북측경계를 훨씬 넘어 마산포 쪽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912년에는 조계지의 중심도로와 폭이 같은 도로가 마산포와 신마산을 연결하였다.

현재 마산시청 앞을 지나는 장군로인데 두 도시의 왕래 수단은 주로 인력거였다. 같은 시기에 지방법원지청을 비롯하여 현 마산시청 자리의 전기회사 등 공공건물이 일부 건축되기 시작했다.

이는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두 지역을 관장하기 위한 공공업무지역을 도시 중앙부에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거시적인 도시계획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고-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대 전반기, 마산포에도 두 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1911년 남성동 해안 11,640여 평이 일본인 하사마 후사다로(迫間房太郞)에 의해 매립되기 시작해 1914년 준공된 것이다.

이 매립으로 마산상권의 중심이었던 선창의 위치와 소유가 일본인으로 바뀌는 일대변화를 겪는다.

둘째는 오랫동안 존속해 왔던 조창 건물이 헐리고 1,500여 평의 직사각형 조창 부지와 그 부근 일대에 격자형으로 폭8m, 10m의 근대적 도로가 뚫린 것이다. 하사마의 매립과 때를 맞춰 시행, 매립지와 연결되었는데 현 남성동 파출소 앞 도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도시 변화는 자연발생취락의 마산포가 근대적 도시구조로 개편되는 변화와 격동의 시발점이었다.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마산의 도시변화는 그 벽두에 실시된 조선회사령 폐지로부터 시작된다.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일본 자본의 한국진출은 마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법에 묶여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는 등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옥기환의 원동무역주식회사도 이 때 설립되었다. 크고 작은 공장들과 부정(富町, 부림동)공설시장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한편 가용부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립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20년대 중반, 조계지에는 서쪽 고지를 제외하고 일본식 건물이 가득해 일본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었으며 장군천 주변까지 일본 가옥이 상당할 정도로 들어서 있었다.

그렇지만 장군천 이북에는 예로부터 있었던 완월동과 자산동의 자연취락과 현 시청부근의 공공시설을 중심으로 약간의 건물만 있었을뿐 민가는 많이 없었다.

1910년대가 창동과 남성동 일대의 중심부 도로망이 건설된 시기였다면 1920년대는 중성동, 오동동, 동성동으로 도로망이 늘어나는 시기였다.

회사령 철폐 이후 급증한 도시인구에 부응하고 자동차라는 유통기구에 적절하도록 도시구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의 마산도시의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철도 경남선의 신설이다.

철도 경남선은 1923년 마산과 군북 간을 우선 개통했다가 2년 뒤인 1925년 진주까지 개통했다.

비록 군사적 목적이긴 했지만 진해와 창원을 연결한 진창선(鎭昌線)도 274월에 개통되어 이미 설치되어 있던 마산선 철도와 함께 마산의 유통영역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7년에 시작된 상수도공사도 1930년에 완공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마산선의 구마산역(현6호광장)과 경남선의 북마산역(현 회산다리 남쪽)이 지역유통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마산포는 북쪽 교방천 부근까지 그 영역이 많이확장되었다.

도시의 기원과 사회적 배경을 달리하는 마산포, 신마산 양 도시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확산·통합되었던 것이 일제강점기 마산의 도시변천과정이다.

그러나 자산동 입구, 즉 몽고정 부근이 움푹 들어간 해안선과 툭 튀어나온 환주산 때문에 가용대지가 잘록해서 두 도시의 지형적 연결이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두 가닥의 철로와 신마산과 마산포를 잇는 간선도로(현 장군로)까지 지나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미 신마산은 마산포 쪽으로 그 영역이 넓어져 자산동까지 확장되었으며 마산포에도 변화가 많아 사방으로 민가가 확장되어 있었지만 이런 지형적 조건이 두 도시의 공간적 연결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산의 교통도 / 1932년>

 

 

바로 이곳(현 신포동 일대)에 20년대 말부터 시행된 대규모 매립공사가 1935년 완공되어 그때까지 노선(路線)만으로 연결되던 두도시는 지형적으로도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1930년대 말, 국내의 사회 경제적 상황은 최악의 상태가 되었고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인한 도시 인구 급증으로 대부분의 도시는 질적 수준이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마산은 위치가 전선과 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접점이면서 군수물자 공급창이라는 기능 때문에 새로운 매립도 시도 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1945년, 마산선과 경남선 두 철도와 현 장군로를 중심으로 마산포와 신마산이 선형(線形)을 이루고 있었다.

<구마산 역사 / 1936년>

 

경관은 마산포에 한옥, 신마산에 일본식 가옥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었으며 그 외 시가지의 주변부와 농촌은 대부분 초가였다.

해방 당시 마산 인구는 일본인 6천여 명을 포함해 6만여 명이었으나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인구가 급증해 전쟁 직후에는 13만여 명이 되었다.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버린 인구는 도시를 기형적으로 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허정도 / 건축사, 창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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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2) - 강점제3시기

<1941년에 세운 ‘상이군인요양소’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일본제국주의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년)에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 1941년, 조선총독부는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마산에 결핵전문병원을 세웠습니다.

마산 가포지역에 있는 현 국립마산결핵병원의 전신입니다. 시작은 상이군인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 변화를 거듭해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 되었습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지역은 한 많은 땅입니다.

110여 년 전, 한반도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며 ‘지바무라(千葉村)’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업이민의 전진기지가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포는 20세기 초입에 강대국의 발톱에 찍힌 치욕스러운 현장입니다.

병원의 본관 건너편 숲속에는 가요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한 산장의 흔적이 있습니다. 키 큰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아래, 오래 전 사라져간 결핵환자들의 외로움과 절망과 눈물을 담아냈던 그 산장의 흔적은 지금도 처연히 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장이란,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숲속에 카테이지 10동과 부속건물들이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잔해는 그 건물들의 흔적입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지금은 잔해만 남아 있습니다.

다음 사진이 당시 사용되었던 카테이지(cottage) 이고, 그 아래 사진은 현재 남아 있는 이 건물의 잔해입니다.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습니다.

결핵은 가난 때문에 생긴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가 ‘결핵왕국’이었습니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습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유명했던 마산지역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6·25전쟁 시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습니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폐결핵이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습니다. 마산을 두고 '결핵문학의 요람'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습니다. 가요「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마산결핵병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산사람 반야월 선생이 노랫말을 짓고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입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 가네

 

1941년 일제가 ‘상이군인요양소’를 건축할 당시만 해도 가포지역은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원 앞 바닷물은 수정처럼 맑았고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웠습니다.

가포해수욕장이 있었던 시절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결핵요양소가 들어섰던 겁니다.

하지만 그 맑았던 바닷물과 아름다웠던 경치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누런 흙들과 아스팔트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 도시를 위해 바다를 메웠다는데,,, 정말 그럴까요? 

어릴 때, 여름만 되면 가포해수욕장가는 일이 큰 낙이었는데,,, 그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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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4 10:15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고급 수산업기술은 당시에 전파된 것이다.

마산어시장에 멸치가 입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당시 이순란, 김성칠씨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그 그 기원이 된다. 일본상인으로부터 수입된 멸치는 중개상인을 거쳐 대구, 김천 등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남해안에서 생산된 멸치의 대부분은 하관(시모노세키)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다.

해방전까지 일본사람들로 구성된 '히로시마 온망조합'에서 멸치의 9할 이상을 생산하였다 하며 해방  5년후 한국인 최초로 온망어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제의 진정률이었다고 한다. 이후 멸치의 주생산은 통영을 중심으로한 기선권현망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마산의 어업이민
마산의 율구미 해안마을(지금의 가포동 일부)은 일본 지바현 어민들이 집단이주해 와서 살던곳으로, 일본 어민촌을 지바무라(千葉村)라고 불렀다. 1905년 1월 지바현의 수산조합 이사 吉野文吉은 어민 20명에게 보조금 4,000원을 보조금으로 주며 어업이민을 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어민들은 모두 어획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멸치 권현망, 도미 연라망, 수조망어업등에 종사하였다. 현재 가포의 장어구이로 유명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과 그 일대에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안의 죽방렴 사진)

멸치의 일상성.
멸치를 두고 회자되는 얘기들이 많다. 하챤고 짜잔한 대상을 두고 멸치도 생선이냐?는 얘기도 더러한다. 그건 멸치의 실상을 잘모르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구조상, 아가미, 지느러미 심지어 이빨까지 일반생선과 다를바 없이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이다.

멸치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선이다. 각종 국물맛을 내는데 멸치를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김장의 멸치젓갈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가장 만만한 술안주로 마른 멸치와 고추장 그리고 갓 잡은 굵은 알배기는 회 무침으로, 멸치쌈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몸값은 어떤가? 
키로당으로 치자면 일반 생선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보통 키로당 2-3만원 정도이며, 죽방멸치인 경우는 30만원선이라고 한다. 이 만한 가격대의 생선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죽방멸치는 우리들에게 죽을때 잘죽어야 몸값이 제대로 나간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멸치를 만만케 보아서는 않될 듯 싶다.

멸 치     

죽방멸치의 똥은 쓰지 않다고 한다
비늘 한점 떨어지지 않도록

대나무 통발로 몰래 가둬

끓는 솥단지까지 곱게 모셔와

그 숨이 똑,

한번에 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똥이 쓰다는

아랫배 쪽에 흉터가 생긴

일반멸치는

그물에 몸이 걸린 채

온몸으로 苦悶死하므로

비늘도 상하고 속은

썩은 쓴 맛을 우려낸다는 것이다

종이그물에 몸이 얽힌 채

온몸으로 너무 고민한 잘 쓴 시들은

일반멸치의 맛이 난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게 관건이다

여러 번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만 못하여

비늘도 상하고 내장에 쓴 맛이 들어가는

일반멸치가 되는 것이니

시는 아무래도 말짱한 죽방멸치로 태어나야 한다


(정준영)

* 정준영시인은 죽방멸치를 멸치를 비유해서 죽기직전까지 살아있는 작가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정신과 죽방멸치, 멸치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대상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멸치의 어원
한자로는 멸치(蔑致),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 불리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멸치란 이름에 얽힌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인지라 한자어로는 수어(水魚)라 하며, 고유어로는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로 음운변화하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를 합성하여 멸치로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산물 검사법에 의하면 건조품 중 전장 7.7cm 이상을 대(大)멸, 7.6~4.6cm를 중(中)멸, 4.5~3.1cm를 소(小)멸, 3.0~1.6cm를 자(仔)멸, 1.5cm 이하를 세(細)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멸치의 어획방법
멸치를 어획하는 대표적인 어업은 권현망이다. 멸치는 기선권현망, 유자망, 정치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다양한 어업에서 어획되고 있지만 주로 기선권현망어업에 50~60%이상을 어획하고 있다. 이 권현망(權現網)이란 명칭은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의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따온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어살(漁箭)이다.  수심이 별로 깊지 않은 바닷속에 길이 5~10m 가량 되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이처럼 부채꼴로 박은 말뚝을 ‘살(삼각살)’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한 변은 길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 그리고 살 안쪽의 뾰족한 부분에는 참나무 말뚝을 둥그렇게 박은 다음,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서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짝이 매달려 있다. 이 문짝은 밀물 때에는 조류의 힘으로 활짝 열려 있다가 썰물 때에는 축 늘어져서 꽉 닫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불통 안으로 들어온 고기들은 다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죽방렴에는 날씨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가 드는데,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것 보다 곱절이나 높은 값에 팔린다. 그물로 잡은 멸치는 금세 숨이 끊어지는 데다 비늘이 다 벗겨지고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맛이 떨어진다. 반면, 조류를 따라 자연스레 죽방렴 안에 들어온 멸치는 산채로 곧장 삶아서 말리기 때문에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멸치잡이는 멸치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끌어 직접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대개 5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통해 이뤄진다. 본선 2척과 어로장이 탄 어탐선이 같이 항해하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 한척마다 길이 500m가량의 그물을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두척의 배가 그물을 끌면서 걸려든 멸치를 그물자루 끝쪽으로 모으고 한쪽으로 몰린 멸치들은 굵은 호스와 연결된 펌프로 빨려들어가 곧바로 가공.운반선으로 자동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선 2척은 다시 투망준비를 하면서 어탐선이 어군을 발견할 때까지 대기하고 가공.운반선은 펌프를 통해 보내진 살아 펄떡이는 멸치들을 즉석에서 대나무 발에 담은 후 팔팔 끓는 솥에서 3~4분 가량 삶는다. 배위에서 삶아진 멸치들은 곧바로 육상의 건조장까지 운반된 뒤 13~14시간동안 말려진 다음날 바로 시장에 판매된다.

- 이학박사 황선도님 글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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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이 2016.05.09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식인에 담아갑니다
    출처는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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