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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가 위험한 시위에 가담하지는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한 대답이 주어진 적이 없는 까닭은 참가자 개개인에 관한 탐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최초로 왜 하상칠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상칠의 경우 가장 궁금한 것은 315의거 당시 세 명의 자식을 가진 35세의 가장이었고 잘 나가는 얼음 판매업자였던 그가 왜 그토록 위험한,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잡혀서 거의 병신이 되거나 아니면 빨갱이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는 상황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는가라는 의문이다.

당시 경남도경 수사과장 김경술의 국회조사단 증언(증언록, 674)에 의거해 경찰에서 취급한 사건 관련자를 직업별로 구분해보면 232명 중 중고학생이 58, 무위도식하는 무직자가 50, 나머지 절반이 넘는 사람은 직공이거나 소규모 상인이었다.

요컨대 참가자의 다수는 창녀, 거지, 소 가게 직원 등과 같은 사회 하층민들이었다. 이러한 참여자들의 사회적 구성에 비추어볼 때 학생도 정치인도 실업자도 하층민도 아닌 사람이 시위에 적극 참여한 것은 희귀한 일일 뿐만 아니라 믿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가 부자 소리를 듣는 등 경제적으로 윤택한 중산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증언에서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하상칠, 2010, 478)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이처럼 높은 사회의식(정의감)과 참여의식(실천)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실마리를 찾아보는 방법밖에 없다. 예컨대 성격, 가족 구조, 가정 형편, 교육, 친구 관계, 직업, 사회활동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 오른쪽이 하상칠 선생>

 

하상칠은 초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고 서당 교육의 유무도 확인할 수 없어 학교 교육의 영향은 논외다.

역으로 그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식 교육만큼은 최대한으로 시켰고 수많은 조카들까지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재우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교육을 통한 개인의 신분 상승과 이로써 가문의 영광을 구현한다는 유교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어쨌든 그는 관직만이 출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자식이 정치와 행정이 아니라 학계나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거의 무관심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이는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체험한 권력의 무서움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작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한국인의 권력에 대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받은 가정교육이나 소년기와 청년기에 대해 뭔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생존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프로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어릴 때 지지리도 못 사는 속에서도 진양 하씨 가문이 간직한 선비 정신의 분위기 하에서 자랐다.

이것이 나중에 선비 가문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났고, 특히 오촌 당숙인 백촌 선생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받은 교육의 효과를 추정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해도 그가 자식들에게 제공한 가정교육을 통해 역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다.

자식들은 그가 불의를 보고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조모(조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자식 중 하나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삐딱한 행동을 해도 자식들 전부가 단체로 야단을 맞거나 벌을 받았다.

꾸중을 할 때는 반드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모순을 예로 들었다. 그래선지 자식들도 사회적 불의에 대해 공동 책임감을 느끼고 잘못된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입바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셋째 딸은 198020세 때 창동의 모 상인의 횡포를 알리는 플랫카드를 들고 단독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서에 잡혀갔고 부친이 와서 풀려난 적이 있는데, 큰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하느라 고생했다며 칭찬을 들었다며 그때 아버지가 엄청 존경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친구 면에서 그의 성격이나 행동거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315의거 이전의 친구 관계는 전혀 알 도리가 없고, 92세로 장수해서 사건 이후에 사귄 친구도 이젠 찾기 어렵다.

사회 활동으로 얼음 판매업계 회장, 종친회 회장, 노인당 회장 등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조직의 장을 맡았다는 경력이 그가 무학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리더십과 불편부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가족들이 아는 한 그는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 정치적 색채를 띤 활동을 한 적이 없다. 315의거 참가 이후 그는 자신의 활동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모든 정치 관련 활동에서 의식적으로 멀리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경우회 자문위원 위촉은 의거 참가 이후의 일인데다 이 또한 의거 참가나 사상을 의심받지 않기 위한 보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이는 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용의주도하게 대처하는 성격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가족들은 그가 평소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언행을 일관되게 해왔으며 특히 전라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한다.

그의 반 전라도 감정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에 친하게 지내면서 잘 대해주었던 전라도 출신의 한 동료 포로에게 배신당한(자신의 돈까지 들고 튐) 경험과 나중에 마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전라도 출신자들과의 접촉에서 겪은 경험의 소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국가관이나 공동체 의식(의무감)과 관련해서는 약 3년간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반공포로 경력도 완벽한 비밀로 유지해왔기 때문에 거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들려줄 사람이 아예 없다.

그러나 당시 포로들의 생활과 거기서 벌어진 유혈 사태들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포로수용소는 훌륭한 정치 및 이데올로기 학습의 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친공과 반공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사상 투쟁을 보면서 국가와 민족, 정치와 이데올로기, 공동체와 사회적 정의, 옳고 그름의 분별, 이데올로기의 실천 등에 관한 나름의 의견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형성했을 것이다.

단지 처 신을순은 그가 다른 포로들에게도 반공포로로 분류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가 박정희 개발독재에 친화성을 보였지만 박근혜 국정 논단 사건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반공, (개발)독재 등 한국 보수주의의 핵심가치를 지지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 정의(법치와 법의 준수, 절차적 민주주의의 존중 등)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사고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반한 부정선거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선거 무효를 위한 개표 저지 활동은 선비 정신의 구현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뿌리와 가문을 중시하고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선호했던 보수주의자이면서 불의를 용인하지 못하는 하상칠의 성격은 정의 실현과 원칙 준수가 보수와 진보를 넘어 한 사회를 유지케 하는 공통의 기본가치임을 잘 보여준다.

당시 그는 마산의 도심 유흥가 업소들을 주 고객으로 얼음 소매업을 적어도 5년 이상 해왔다. 지방 도시의 도심 유흥가는 정재계를 비롯한 각계의 지역 유지들 사이에 정보 교환과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도 그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많은 부정부패의 현장을 보거나 관련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감과 저항심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유력한 상인이 되려면 편의주의(편법 활용), 보신주의(신상 안전)와 기회주의(이익 우선)를 키웠을 법한데 그는 달랐다.

상당한 부를 쌓았음에도 부동산 재테크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후회하는 말을 한 적도 거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땀 흘리지 않고 얻은 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그의 남다른 정의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공로자 심사에서 탈락한 후 줄기차게 재심을 요구하면서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진정서를 보냈으며, 면담은 못했지만 직접 보훈처장을 만나기 위해 본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노인의 아집이라기보다는 목적 달성을 위한 집요함과 공적에 대한 강열한 인정 욕구를 보여준다. 이는 달리 보면 그의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삶의 편린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의 시위 참가가 개인에게 체화된 강렬한 정의감에 기인하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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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5) - 개항이후

<마산포에서 제일 번화했던 곳은?>

1910년 경 마산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은 어디일까요?

복원도에 나타나는 1,157필지를 각각 그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 각 토지를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결과를 그림으로 나타내 당시 도시상황을 확인하였습니다.

토지과세가격과 비교하여 토지등급으로 지가(地價)를 분류해도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남성동(당시 元町) 1번지의 사정토지대장입니다.
노란색 원 안에 등급이라는 표기가 되어있는데 등급이 몇 차례 바뀐 흔적이 있습니다.




복원도의 땅 1,157필지는
최저 17등급에서 최고 77등급까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색깔이 짙을수록 비싼 땅, 번화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마산창을 중심으로 서굴강과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남성동 해안 일대가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남성동 파출소 아랫길(전 중소기업은행 앞 도로)이 가장 요지(要地)였는데 이 도로변에 1920년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 「원동상사」가 창업하여 20년대 말 사옥을 신축하였습니다.

중심상권은 중국인 땅이 많았던 부림동과 창동의 경계가 되는 현 경남은행 부림동 지점 앞길로 이어져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창동 네거리의 동서방향 도로변도 지가가 높았습니다.

이러한 중심상권의 영향으로 창동․수성동․부림동․중성동으로 상권이 확산되어 있었지만, 마산포의 동쪽지역인 동성동 일대는 토지등급이 낮아 당시에는 주거지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지난 주에 포스팅한 일본인토지소유상황도와 비교해보면 일본인의 마산포 토지매입 현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비교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그림을 올리겠습니다.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어선창 일대 좁은 지역의 소규모 고가(高價)대지들은 한국인의 소유로 남아있었습니다만 요지(要地)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지가가 높은 51등급 이상의 많은 땅들을 비롯해, 특히 71등급 이상의 초고가 대지의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한일병합은 1910년 되었지만, 그 시기에 이미 마산포는 이만큼 일본인들에게 먹혀있었던 겁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2011/03/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2011/04/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2011/04/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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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한일병합 전, 마산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마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마산창과 관련된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기에 창동을 석정(石町)이라고 불렀는데 이 석탑들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당시 마산포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1년 창동 구 시민극장 뒷골목에 있었던 황영택 장로의 집에서 마산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최초의 모임이 있었다는 『문창교회백년사』 기록과
같은 해 마산 최초의 천주교 신자 김달시시오의 집이 오동동에 있었다는 『
天主敎馬山敎區設定10주년기념집』이 그것입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도로변을 제외한 골목 안쪽은 대부분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 창동의 옛 시민극장 자리에 마산민의소가 1908년 건립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며 1898년 마산창 내에 마산포우편물취급소가 설치된 후 1909년에 구마산우편소로 개칭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 남성동 일대에 마산금융조합과 진주농공은행마산지점 등의 금융시설이 있었으며 1909년에는 수성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가 생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06년 조창부지 서쪽에 일본인 등기공수(藤崎供秀)가 한인가옥 사이에 일본식의 점포를 2-3채 지어 세를 내주고 그 지역이 마치 제 지역인양 등기정(藤崎町)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908년에 마산포 영역인 서성동에 길천(吉川)이란 일본인이 사는 목조2층의 요정 '명월루'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등기공수(藤崎供秀)와 길천(吉川)에 대한 두 기록은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의 마산이주가 본격화되고부터 원마산에도 일본인들이 건축물도 짓는 등 상당한 진출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데 더 이상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산포의 시장은 번화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의 마산포(원마산)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두 장을 소개합니다.

조선통감부농상공부수산국에서 1910년 펴낸 『韓國水産誌』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책의 간행연도가 1910년(隆熙4년)이니 사진촬영 시기는 1908-1909년 혹은 그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구마산예시의 건염어점(舊馬山例市の乾鹽魚店)」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된 두 사진을 보면 좁은 시장통에 초가의 상점이 늘어서 있는 정경과 사람 수를 보아 상당히 성황을 이룬 거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조 흙벽에 초가를 얹었지만 늘어선 품새로 보아 시장이 번성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마산포 시장의 이런 모습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다음 글은 1908년 일본인 전연우언(田淵友彦)이 쓰고 박문관(博文館)에서 펴낸『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254쪽에 수록된 마산관련 글입니다. 

**************************************************************************************한인가(韓人街, 마산포)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 정(丁, 1丁은 109.1m, 町이라고도 함)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 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옛날 조공미를 모은 집산지로서 함경도의 원산, 충청도의 강경과 더불어 팔도 3대 항구 중 하나로 일컬어 온 곳으로서 경상남도에서는 시가(市街)로서 제3위를 점한다.

마산 개항 당시에는 일본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서 조선인들과 혼거하여 살았다. 또한 본 항 무역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곡은 가을과 겨울, 출하의 계절에 오직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므로 일본인들도 여기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은데 1904년 6월 현재 호수는 42호이고 남자89명․여자 56명이다.

구마산의 개시일(開市日)은 매월 3회로 5일․15일․25일에 열리는데 장날에는 부근 10 리 내지 20 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이 모인다. 특히 쌀이 출하되는 계절에는 조선화폐 취급고가 50,000관(貫, 관은 ‘괘’의 뜻으로 엽전 열 꾸러미, 곧 열 냥을 하나치로 계산하는데 쓰는 말이므로 1관은 10냥(兩)을 말한다) 이상 달하기도 한다.

구마산은 또한 어류집산지로서 염장어(鹽藏漁)를 위시하여 해삼․명태 등의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20여 호이며 매년 취급고가 수 십 만원까지 오른다. 어류는 일본어선 및 한국어선으로 공급하고 판로는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 방면까지 이른다.

일본인 중에서 구마산에서 일본어 학교를 열어 한국인 자제의 교육에 착수한 사람이 있다. 현재 학생이 수 십 명에 달하며 점차 발전하고 있다.




다음 글은『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보다 6년 먼저 나온『韓國 案內』의 마산기록 중 마산포의 도시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일본인이 쓴 근대기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일본인
香月源太郞이 쓰고 東京 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출간했습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는
『韓國 案內』를 '대한제국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여행객들을 위하여 한국의 개항장 등의 경제발전상황을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개하고 관광할 만한 명승고적과 은행 등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책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 마산포(舊 馬山浦) 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창원가도(昌原街道)에 있고 인가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호수는 2,000여호이며 감리서(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

에 나오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숫자는 다른 자료와 차이가 많아서 정확도에 의문이 생기지만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활발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산포의 세밀한 상황은 복원도를 포스팅할 때 소개하겠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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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里)의 위치는?>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1899년 간행된「창원읍지」에 나타나는 마산포 6개리>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에서 ‘마산포가 조창 설립 이후부터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6개리가 생겼다’고만 밝혔지 6개리의 경계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지명의 연속성에 근거해 동성리=동성동, 서성리=서성동, 중성리=중성동, 성호리=성호동, 오산리=오동동과 산호동 정도로만 짐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마산포의 범역 내에는 위의 동 외에 창동과 남성동․부림동․수성동․추산동 등이 있는데 이들 동과 마산포 6개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진바 없습니다.

아무도 조선시대 6개리의 경계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설령 알려고 했어도  알기 어려웠을 겁니다.
6개리 경계를 추정할만한 자료 찾기도 어려웠고, 복원에 필요한 마산포 원래 모습을 알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조선총독부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위하여 1913년 12월 2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호외를 통해 발행한 「마산부관할구역도」라는 지도 속에 6개리의 경계가 표기되어 있으며, 후자는 원마산(마산포)도시형태 복원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 복원자료는 다음 회부터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두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김경덕의 매립청원서에 첨부된 지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에도 해변을 낀 원마산의 리(里) 경계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행정구역개편이 끝난 뒤인 1910년대 중후반에 간행된 자료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자료들을 교차확인해본 결과 추정할 만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산부 관할구역도」에 표기된 마산포 6개리>

착안은「마산부관할구역도」에 나타난 6개리의 경계가 도로에 의해서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산부관할구역도」의 도로 형태에 가장 근접하는 위치의 도로를 당시 「원마산 복원도」에서 찾아내어 오버랩시켜 보았습니다.

「마산부관할구역도」는 「원마산 복원도」에 비해 정확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가장 근접한 위치의 도로를 기준으로 6개리의 경계를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이 이 방법으로 얻어낸 마산포 6개리 경계도입니다.

                              <사정지적도에서 재구성한 마산포 6개리>

이 그림은 1910년경에 개설되어 있던 도로를 기준으로 작성한 경계도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 후기부터 있었던 6개리의 경계와는 차이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위 그림을 이용하여 현재의「마산시가지도」에 당시 마산포 6개리의 위치를 개략적으로 표기한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현 시가지 도면에서 추정한 마산포 6개리 경계도>

이 그림으로 볼 때,
창동 네거리를 기준으로 남쪽인 제일은행․경남은행 창동지점․대신증권과 구 극동예식장 일대가 중성동이었으며, 북쪽이 성호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종거리의 동쪽인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 네거리 일대가 동성리였고, 동성리의 동쪽이 오산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호리와 중성리의 서쪽인 구 강남극장과 부림시장 그리고 현재의 수성동일대가 서성리였으며 그 서쪽이 성산리였고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동성리=동성동, 서성리=서성동이라는 식의 조선시대 동리명과 현재의 동명을 수평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위의 그림들은 옛 리(里)경계를 현재 도시상황 위에서 재현한다고 하는 기본적 한계 때문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마산이라는 근대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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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마산 최초의 근대 건축>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남단 해변의 전망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현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경술국치 전인 이 시기에 식민 지배를 위한 법원 등 관아와 교육시설․금융시설을 비롯하여 요정․상점 등의 상업용 시설들이 일본에 의해 들어섰으며 이 외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서 종교시설과 교육시설들도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양식은 대부분 의양풍(서양식과 유사한 형식) 혹은 일본식의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관아건물로 1908년에 지어 마산이사청으로 사용됩니다. 목조2층으로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1899년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을 헐고 지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한 부산법원 마산출장소 건물입니다.
목조2층 양식으로 마산시청 앞에 있는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개항기(1899년-1910년) 마산의 근대건축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상술의 논문자료입니다.
 

 

No

건 물 명

현 위 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일본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르네상스풍

 

1906년 마산이사청

2

러시아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식민지양식

 

현 월포초등교 내

3

마산우편국

월남동4가

1902

목조1층

의양풍

42평

1930.2.24중앙동이전

4

마산포교회

성호동

1903

벽돌조1층

개량한식

 

문창교회전신

5

심상고등소학교

장군동3가

1904

목조1층

의양풍

384평

일본인학교, 후 이전

6

마산공립소학교

 

1904

 

 

 

1901開校,성호초등교

7

마산병원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의양풍

75평

도립병원전신

8

마산 역사(驛舍)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일식

 

 

9

제일은행출장소

월남동3가

1907

벽돌조1층

의양풍

 

 

10

서전(西田)주조장

홍문동

1907

 

 

112평

마산最古酒造場

11

마산이사청

대내동

1908

목조2층

의양풍

 

1914년 마산부청

12

망월루

두월동1가

1908

목조3층

일식

96평

여관, 요정

13

심상고등소학교

중앙동

1908

양풍 平家

 

612평

이전하여 신축

14

창신학교

상남동87번지

1909

목조1층

의양풍

56평

호주선교사(신교)

15

마산신사(神社)

문화동

1909

 

 

 

 

16

마산헌병분대

월남동3가

1909

 

 

 

현건물은1926년신축

17

육군중포병대대

월영동

1909

기와

 

 

여러 채가 있었음

18

환서좌(丸西座)

신마산

1909

목조2층

 

 

5-600명 수용

19

마산 세관

월남동4가

1910

목조1층

의양풍

 

 

20

지방법원마산지청

중앙동4가

1910

목조2층

양식

 

 

21

성지학교

완월동206번지

1910

벽돌조1층

양식

 

프랑스선교사(구교)

22

부산감옥마산분감

장군동

1910

 

 

 

 


여기서 소개한 건물들은 그 시기를 대표할만한 것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외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전 글에서 밝힌 대로 보험회사․목재상․정미소․양조장등의 공업시설과 마산청과물 시장 등의 유통시설, 여러 개의 유곽과 30여 개소의 여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시기에 매우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표의 세번 째에 적힌 마산우편국(1902) 사진입니다. 의양풍으로 목조1층이었습니다.


여관과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망월루 사진입니다.
목조 3층 일본식 건물로 창원천변에 있었는데 사진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업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는 1906년부터 부산․인천․성진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 및 세관 설비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신마산 세관에 종래의 부두연장 84.5m에 돌제(突堤)의 연장 10m를 보강해서 등대를 설치하고 계단이 딸린 목조잔교를 설치했습니다.
다음 사진이 그 때 설치한 마산세관의 목조잔교입니다.


 

세관 구내에 목조 단충의 파상형(波狀形) 철판지붕으로 된 50평 규모 창고 1동을 건설했으며, 세관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목조 23여 평) 1동도 이 시기에 신축하였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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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마산창과 유정당>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으며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림처럼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입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조창 터와 바다 사이의 '이프, 남흥양복점, 수성목욕탕, 남성동천주교회' 등이 들어서 있는 터는 조창기능을 위한 작업 및 하역공간으로 추정되는 공지였습니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마산창은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습니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 우편물취급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본당이었던 「유정당(惟正堂)」입니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었으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1900년 4월 30일 오후 2시에 있었던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장면인데 미의회 도서관 소장 자료입니다.
(
마산포 개항 후 각국거류지 경매가 모두 다섯 차례 마산포 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회와 2회 경매까지는 당시 마산포해관으로 사용되던 조창건물에서 진행하였습니다만 3회부터는 1901년 1월 1일 신마산으로 이전한 마산포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 정황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경매 중이라 차일을 쳐 놓긴 했지만 조창건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글이 두 편있습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입니다.
김이건의 시 중 양창(兩倉)과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합니다.


  漕倉 惟正堂                조창 유정당             -박사해(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 漕船歌                     송 조선가           -김이건(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웅장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시공 수준도 높았던 건물로 보입니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고 했는데,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산도시의 발원지였던 마산창이 남겨 놓은 것은 없습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오가는 행인들은 알까요?
바로 이 곳이 오늘 마산도시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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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06:00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오산·서성·성산·성호 등 지금도 동명으로 사용되는 6개리가 그 때 형성되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다.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마산창과 유정당〉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경남지역 두 조창 중 하나다.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우편물취급소로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이다.

 
<마산창이 있었던 시기의 위치도 / 제일은행 자리에 유정당이 앉아 있었고 남성동 성당과 이프 등이 있던 곳은 해안공지, 남성동우체국 자리는 바다였다>


마산창의 본당은 「유정당(惟正堂)」이라 불렀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두 글이 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다. 김이건의 詩 중 양창(兩倉) 혹은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한다.


           
漕倉 惟正堂                朴師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漕船歌                    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웅장했고 시공 수준이 높아 섬세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니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원도에 의하면
유정당은 현재의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고 마산창의 정문은 현 중화요리점 북경성 자리, 거기서부터 남성동 성당까지는 해변공지, 남성동우체국 부지가 서굴강 즉 바다였으니 당연히 마산 앞바다가 보였을 것.
기가 막히는 그림이다.

아쉬운 것은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창부지는 1910년대 초 일본인들에 의해 세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지면서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유정당은 그시기에 헐렸다. 지어진지 150년 후의 일이다.
1918년,
그 자리에는 벽돌조 1층 근대식 건물의 조선식산은행이 들어섰고 이 건물은 현재의 건물을 짓기까지 사용되었다.
지금의 큰크리트조 제일은행 건물은 1970년대에 지었다.


 <위는 유정당 / 가운데는 1918년 건축한 조선식산은행 / 아래는 현 제일은행>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쓴 『마산항지』에 의하면 개항 직후인 20세기 초,
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이 많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이라는 지명은 해방 후에 생겼는데 조창과 관련한 송덕비로 추정되는 이 석탑들 때문에 일제기에는 이곳을 석정(石町)이라 불렀다.

마산창에서는 8개 읍, 즉 창원·함안·칠원·진해(지금의 진동)·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 동남면에서 보내온 대동미를 수봉(收捧)하였다.
모두 9,215석(石) 5두(斗)였다.
초 봄에 마산포를 출발한 조운선은 거제 견내량 → 남해 노량 → 전라도 영암 갈두포 → 진도 벽파정 → 무안 탑성도 → 영광 법성포 → 만경 군산포 → 충청도 태안 서근포 → 보령 난지포 → 경기도 강화 이고지포 →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 경 도착하여 임금께 세곡을 바쳤다.

사용된 조선은 판선(板船)이었고, 조세징수와 감독을 관장한 도차원(都差員)은 창원부사,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은 구산첨사였다.

조선(漕船)이 떠날 때는 풍악을 울리고 선원들에게 술을 대접했으며 대포를 쏘아 장도(壯途)를 축하했다.
그 축하의 자리가 지금의 남성동성당 터 정도 아니었을까?

                                 <매립이전 마산포의 위치도 >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올드시티(Old City)의 정체성과 한 도시공간에 녹아 있는 역사와 문화의 말 없는 몸짓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탐방이었다.

늦가을 토요일 오후,
무심한 길과 표정 없는 건물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그것들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끝>


                <부림시장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함께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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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부인권 2009.11.23 07: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은 옛것을 뜨올릴 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창원시는 그런 그림 자체를 떠올리기가 힘듭니다.

    개발이란 이름은 사람의 추억을 파괴합니다.

    • 허정도 2009.11.23 08:37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역사문화 자산은 마산이 많은 편이죠.

  2. 유림 2009.11.23 08: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역시 선배님 이시네요
    제 글에 조금 엮어 두겠어요

    반가웠어요

    북마산 탐방에 오실거죠?
    선배님 이야기 듣고 싶네요

    • 허정도 2009.11.23 10:59 신고 address edit & del

      즐거웠습니다.
      북마산 탐방, 당연히 참석해야죠.

  3. 林馬 2009.11.23 19: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요?
    헐고 부수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자산을 찿아 보존하여 역사성을 자랑으로 여기며
    관광자원으로 삼는 것이 더 나은 지역사랑이 될것이요.
    시민이 먹고 사는데도 더 기여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모델을 어제 벌교와 순천만을 둘러보고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 왔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08:2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늦가을 순천만, 환상적이죠?
      매립해 산업단지 만들려 했을 때 시민들이 힘을 합해 살려놓은 갯벌, 지금은 순천의 보물단지가 된 것으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4. 김정수 2009.11.23 2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한 마산의 재발견입니다.
    탐방대에 회원가입해놓고 한번도 못갔네요.
    그날 은행나무단풍을 찍고 있었지요.
    이 앞주도 그랬고...
    12월에는 시간내서 가봐야겠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08:2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도 계획되어 있다니 함께 걸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5. 이은진 2009.11.24 13:0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도와 같이 놓으니,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 프린트 해둘려고 하니,
    하는 방식이 없군요.
    아쉽습니다.

    요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는데
    그저 그리스 부근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인데
    전세계의 사람들이 읽고
    관광을 가고는 하는군요.
    우리와 지형이 비슷한 섬이 많고 해안이 복잡한 곳에서
    우리도 발굴하면 많은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17: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프린트해서 드리겠습니다.
      올드시티의 장점을 살린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게 참 많은 도시입니다.

  6. 김판균 2010.01.07 12: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무학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산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가진 도시라는걸 느낍니다.
    강과 바다가 접하며, 삼면이 산을 이루고, 바다엔 돝섬이 파도를 막아주니...

    저의 어릴적 기억으론 마산이 전국 두번째가는 어시장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마산포구엔 수백척의 배들이 정박을 하고, 진해,거제 외 남해안일대 고깃배들이
    수없이 드나들던 곳...청과시장이 같이 있어 창원,진동,함안 외 지역의 농산물이 전부
    마산으로 모였던 그런 도시가 마산인데...
    어쩌다가...지금의 마산으로!!!!!!!!!!!!!!!!!!
    도시 이야기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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