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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 한자가 많아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옮긴이)

 

개항 이래 일본인들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 소유권의 약탈과 아울러 광산권까지도 침탈해 가게 되었다.

마산에 이웃한 창원군 북면에 있는 구룡산 아래 고암동(古巖洞) 동광(銅礦)20년의 역사를 가진 유명한 것이었다.

 

<창원군 의창구 북면 고암리 위치 / 아래 산이 룡산>

 

이를 탐낸 일본인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이라는 자가 전 광무감리(礦務監理) 김위섭과 결탁하여 정부에도 알리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19016월부터 기계와 재력을 투입하여 약 5년 한()으로 채굴을 시작하였다.

이를 탐지한 내장원(內藏院)19022월 철광(撤礦)을 명령하였다.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은 투자를 구실로 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감리보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접광무위원(現接礦務委員) 서병정 보고하온즉 내개본부경내(內開本部境內) 구룡산하(九龍山下) 고암동(古巖洞) 동광(銅礦)은 개채지(開採地) 20여 년이온바 거년(去年) 6월 전광무감(前礦務監) 김위섭이 일인(日人)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를 청래(請來)하와 불복정부(不服政府)하옵고 기계와 재력으로 5년 약한(約限), 개채(開採)이옵더니 동년 2월 내장원(內藏院)에서 이를 탐지하고 철광(撤礦)하라 하오니 일인 마목(馬木) 왈 개채기삭(開採幾朔)에 인비(人費)가 지위(至爲) 8천여 원이고 종불폐지(終不廢止)오며 전관개채(專管開採)이온즉 자()에 보고하오니 조량(照諒)하시어 일인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이 김위섭 공문을 거()하와 본부(本府) 구룡산 동광고용(銅礦雇用)을 불폐(不廢)하므로 외부(外部)에 거보(擧報)하시와 조량(照亮)하시어 여하조치(如何措置)를 훈시(訓示)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4821 

창원감리 한창수

  의정부찬정외부대신(議政府贊政外部大臣) 박제순 각하

 

김위섭과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의 장정조약(章程條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정조약(章程條約)

1. 구룡산 반야동(班也洞)은 물론, 은동광(銀銅礦)하고 피차(彼此) 자본전(資本錢)은 각출기력(各出其力)하야 이해(利害) 동사(同事)

1. 상납세단(上納稅段)은 대기은동맥소채(待期銀銅脉所採)하야 의장마련(依章磨鍊)이되 수기도근수(隨其稻斤數)하야 무루(無漏) 정납사(正納事)

1. 재력단(財力段)은 이무위유약반폐칙상납(以無謂有若半廢則上納)은 폐불폐문(廢不廢門) 변납사(辨納事)

1. 가신일인식(可信一人式) 차정감동사(差定監董事)

1. 년한칙이성역소치(年限則以盛役所致)5년 정약(定約) 이약위여광(而若爲與礦)이면 세납지수자동소(稅納之遂自銅所)로 자비태가사(自備駄價事)

1. 동석소채(銅石所採)가 수지과다(數至夥多)하야 약위마항취설(若爲馬港吹設)이면 이동철칭근수(以銅鐵稱斤數)로 십분일례(十分一例)

1. 동석(銅石)은 이석칭수(以石稱數)로 위주(爲主)하고 위선이십분(爲先以十分)에 일이례(一二例)하야 추봉발매대전(推捧發賣代錢) 이상납(而上納)하되 태가(駄價)는 역자동소(亦自銅所)로 담저사(擔著事)

1. 대기재력변래(待其財力辨來)하야 각정명목사(各定名目事)

광무(光武) 484

경전양도(慶全兩道) 각광감리(各礦監理) 김위섭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 중촌연송(中村年松) 귀하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 등은 조선정부의 철광 명령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의 권리옹호 기관인 현지 일본 영사관의 힘을 배경으로 끝끝내 상기 불법계약을 강행하여 채굴하였던 것이니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감리보고(監理報告)가 그간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장원(內藏院) 4호 훈령을 봉접(奉接)하난즉() 내개(內開)에 본부소재동광지설치(本府所在銅礦之設置)는 즉칭노수고(卽稱努需故)로 송감리파(送監理派) 파원(派員)하야 의식취세(依式取稅)가 비유실효연후(俾有實效然後)에 기과봉지본의(其過奉旨本意)어늘 세무기효(稅無其效)하고 이귀타처(利歸他處)가 사심아연(事甚訝然)이기로 탐기리허(探其裏許) 칙해광무감리(則該礦務監理)와 위원서병정(委員徐丙鼎)이가 불유본원(不由本院)하고 여일인(與日人) 마목(馬木)으로 사자성약(私自成約)하야 무난천채운자(無難擅採云者)가 시기성설평(是豈成設平)이 차불용불사정내기(此不容不査正乃己)기로 해감리(該監理)를 하송(下送)하며 자용발훈(玆用發訓)하니 도즉상탐근유(到卽詳探根由)하야 일인여서가지상약문기(日人與徐哥之相約文記)를 추멱상송(推覓上送)하야 이위처변당요등인(以爲處辨當要等因)인바 차()를 준()하와 해광무감리(該礦務監理) 김위섭과 위원 서병정과 일인 마목(馬木)을 삼조질사(三造質査)하야 근유(根由)를 상해(詳該)한 즉 광무감리(礦務監理) 김위섭이가 동년 84일에 일인 마목(馬木)과 서병정에게 본부(本府) 북면 구룡산 반야동(班也洞) 양광(兩礦)을 인허(認許) 채광하라는 훈령과 장정약조(章程約條)를 날인계약(捺印契約)한 사()가 확실할뿐더러 김위섭 사실지장(査實之場)에 역분명자복(亦分明自服)하옵고 서병정 따윈 거전지관하(渠全之管下)하야 지청기지휘이기(只聽其指揮而己), 성약문자(成約文字) 중에는 실무주관간보(實無主管干涉)이고 마목(馬木)따윈 자사아기여귀국내장원소차광무감리(自私我旣與貴國內藏院所差礦務監理)로 호상계약(互相契約)하였은즉 아정부명령지전(我政府命令之前)에는 해계약서(該契約書)를 이불가환납(理不可還納)이인 차해계약서(且該契約書)가 금재아영사관(今在我領事館)하니 조청아영사관조치위가(照請我領事館措置爲可) 이자기정부(而自己政府)로서 기욕환추칙양년소입(期欲還推則兩年所入) 자본급기계제비(資本及機械諸費) 합의(合議) 일만팔천원(一萬捌千元)이니 약자기정부(若自己政府)로서 환상차비(還償此費)하면 즉당해약운운(卽當解約云云)이옵고 소무환납서지의(小無還納書之意)하오니 수유지협지(雖誘之脅之)하야 백계요환(百計要還)이나 일직강경(一直强硬)하야 돈무동령(頓無動令)하오니 차계외국인(此係外國人)즉 실난사력환탈(實難私力還奪)이온바 대저광무감리(大抵礦務監理) 김위섭은 막중국광(莫重國礦)을 천허외인(擅許外人)하니 구궐죄상(究厥罪狀)하면 합치중피(合寘重辟)이오나 본감리불가천변(本監理不可擅辨)이옵기 해감리소위훈령급장정약조등본(該監理所謂訓令及章程約條謄本)을 호부보고(號附報告)하오니 사조(査照) 처변(處辨)하심을 복망(伏望).

광무 41128

창원감리 한 창 수

의정부찬전외부대신(議政府贊政外部大臣) 박 제 순 각하

 

또 상기 감리보고 부기(附記)동석출구사(銅石出口事)는 루박힐(屢駁詰)타가 해일인(該日人) 마목(馬木)이 잠솔모군(潛率募軍)하고 장제이거(裝制以去)……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불법무도하게 행동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같은 일인들에 의한 우리의 주권 침해는 당연지사로 인민의 분노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19016월 맹감역마중군여당(孟監役馬中軍與黨)에 일인 마목(馬木) 습격사건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감리의 보고를 통하여 알 수 있거니와 이때 마산 일본 영사는 이들의 체포를 감리에 독촉하였던 것이다. 

본항(本港) 부근 군()에 초적(草賊)이 창궐(猖獗)하야 소위맹감역(所謂孟監役) 마중군당여중(馬中軍黨與中) 수삼한(數三漢)은 현기파순제득(現己派巡提得)하와 방엄수취초(方嚴囚取招)이옵건과 우접주항(又接駐港) 일본영사 판전조개(坂田照開)에 작년 6월 일어(日於) 창원구룡산아방인(昌原九龍山我邦人) 마목건삼품략탈지초적(馬木健三品掠奪之草賊) 마중군(馬中軍) 맹감역배근경유가(孟監役輩近頃愈加) 폭행 이경찰관지력(以警察官之力) 응무이체포(應無以逮捕) 청번진남진위대중(請煩鎭南鎭衛隊中) 상당병원(相當兵員) 일시파유지급(一時派遺之急) 체포등인(逮捕等因)이온바 준사해적(准査海賊) 괴마(魁馬) 맹양한(孟兩漢)이 솔당수십(率黨數十)하고 각지흉기(各持凶器)에 동섬서홀(東閃西忽)하야 혹방화인가(或放火人家)하며 혹창략전재(或搶掠錢財)하야 근경(近頃)에 소취어밀양수산장등지(嘯聚於密陽水山場等地)이온바 해지방(該地方)이 여본항(與本港)으로 접양심근(接壤甚近)하와 장유만연지려(將有蔓延之慮)이온즉 부득불급금체포(不得不及今逮捕)이오나 이순검약간력(以巡檢若干力)으로 불유불능초포(不惟不能剿捕)라 내반수기(乃反受其) 위해(危害)이옵기 자()에 보고하오니 조적(照積)하오셔 이조원사부(移照元師府)하시와 사즉전식우(使卽電飾于) 진남진위대(鎭南鎭衛隊)하야 병정한십명(兵丁限十名)을 파유후(派遺後) 본항(本港)하야 사순검(使巡檢)으로 합력(合力) 체포(逮捕)케 함을 복망(伏望).

광무 6613

창원감리 한 창 수

의정부찬정외부대신서리 철도원총재(鐵道員總裁) 유 기 환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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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계획으로 끝난 수산시장과 군용지 매립구상>


1) 신마산 수산시장 매립계획

1905년 7월 29일 창원감리 현학표는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매립신청을 했습니다.
위치는 마산포의 각국공동조계지 밖 남쪽 해안이었고, 그 절차로 신동공사에 청원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창원감리 보고 제50호’로 제출되었으며 도면까지 첨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이 당시에 첨부되었던 도면입니다.

위 도면의 좌하부 삼각형 부분이 매립신청지인데 '수산회사축정지, 5천㎡정계(定界)'라고 적혀있습니다.

이 그림의 삼각형 매립계획지를 현재 위성지도에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두색 삼각형이 수산시장 매립계획지, 노란색은 각국공동조계지, 파란색은 당시의 간조시 해안선입니다)



이 매립은 일본인 10여 명이 수산회사를 설립하여 신마산에 수산시장을 건립하겠다는 목적이었으며 위치는 조계지 최남단이었고 규모는 5,000㎡(1,500평)이었습니다.

관련 기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매립허가와 시행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1905년 이후 제작된 문헌자료와 지도 등 아무 곳에도 이곳에 매립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이 구상은 계획만으로 끝났을 뿐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철도용지 앞 매립계획

1906년(광무10년) 5월 7일 창원감리가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보낸 ‘창원감리 보고 제14호’에 일본군부의 매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매립계획은 바로 그
일본군부의 매립계획을 말하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매립계획이었습니다.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쯤에서 시작하여 마산역과 장군천을 지나 마산포 어시장까지의 규모입니다.
(파란색은 간조시 해안선, 주황색이 매립계획부분)


이 보고서의 내용에는「일본군부가 철도용지 앞 해안을 매축할 계획을 세우고 각국공동조계지에서 구마산포에 이르는 해안 약 10리를 군항지로 매축코자 하오나 이미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지금에 와서 온당치 못한 일」이라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전쟁은 1년 전에 끝난 러일전쟁을 두고한 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5월 16일 지령 20호로 창원감리에게「이미 평화가 찾아온 마당에 군용지도 물러나 주어야 할 것이니 매축공사는 교섭하여 정지(停止)하게 하라」라는 내용의 매축계획중지를 지시하는 훈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앞의 매립계획과 마찬가지로 이 매립에 관한 기록도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도 1906년 이후 제작된 지도 및 각종 자료에 이런 식의 매립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으로 한반도를 손에 쥔 일본의 야욕이 마산포에 드러났던 두 번의 매립계획은 이렇게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계획만으로 끝난 그들의 마산포 매립시도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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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마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였습니다만 일본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884년에 착수한 그들의 공사관(公使館) 신축 때 들어 온 직공(職工) 70여명이 최초입니다.
그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상인 약간 명이 잠주(潛住)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 밑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설정된 1885년 후였습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894년,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되도록 속히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일,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계책이다. 한국 땅 이식 사업은 한반도를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기적 대책이다. 한국 땅으로의 이식은 국부의 증진 도모에 크게 족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는 데도 또한 이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조선도항자편리(朝鮮渡航者便利) 22편-

이러한 정책에 따라 한국 땅에 이주한 일본인들과 그들로 구성된 일본인 거류지가 장차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함께 1911년에 펴낸『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은 개항하던 해에 33호 103명이었으며 이들은 생업 때문에 대부분 원마산(마산포)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80호에 259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래의 표가 개항이후 12년 간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들의 수 입니다.

년도별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호수

33

70

80

99

95

154

340

677

868

989

1,132

1,548

인구

남자

87

189

160

203

191

359

717

1,233

1,826

2,009

2,360

3,163

여자

16

61

99

130

136

270

531

937

1,393

1,678

1,961

2,778

합계

103

250

259

333

327

629

1,248

2,170

3,219

3,687

4,321

5,941


이 통계를 보
면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인은 불과 77명밖에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03년에 327명이던 일본인의 수가 1904년에는 629명으로 302명이 증가하였고 이어서 1905년에는 619명, 1906년은 922명, 1907년은 1,049명, 1908년은 468명, 1909년은 634명, 1910년은 1,62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항 당시 103명이던 마산의 일본인이 1910년에 무려 5,941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1905년경부터 시작된 급격한 일본인 증가현상은 1905년 10월 노일전쟁 승리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1906년 2월 1일 마산에도 이사청이 설치되어 종래 창원감리가 행사하던 지방통치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해 9월 1일「일본거류민단법」이 실시되어 마산의 일본거류민회는 「마산일본인거류민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마산일본인거류민단이 발족할 당시의 일본인 거류민 수는 660호에 2,433(남자 1,452명, 여자 981명)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미곡상을 주업으로 하는 송원조장(松原早藏), 구중감작(久重勘作), 산본호장(山本好藏) 등을 비롯하여 216호 700명이 원마산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개항 다음해인 1900년 마산에 이주해온 일본인 송원조장 씨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그가 이주해온지 29년 뒤인 1929년 발간된 '마산현세록'에 실린 것입니다.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사진으로보아 꽤 젊은 나이에 마산으로 건너온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마산포(원마산)에 거주했던 까닭은 그들의 주업종인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영업 활동 때문에도 개항 이전부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마산포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 ) 안은 겸직입니다.

무역상 1

중매상 6(4)

약종상 5

잡화 27(6)

술소매 2(1)

도기 (5)

일상잡화 (1)

주물상 (1)

옷가게 3(2)

부엌잡화(1)

양주(2)

담배 (4)

과자상 3(2)

설탕상(2)

석유상(1)

장유상(2)

의사 2

문옥(問屋)1(1)

회사 2

여인숙(1)

야채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예기 1

선원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1)

철력세공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2)

일용노동 22

토목청부 1

정미상 (1)

식빵 1

대궁(大弓)(1)

페인트칠 1

작부 3

선두(船頭) 3

광업 2

 

러시아 : 호텔업1, 잡화상1

중국 : 잡화상7,잡화행상3

독일인 : 선교사


이 표는 1902년 당시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과 그 외 외국인들의 직업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그 중 건설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이가 50여명이나 되어 새롭게 조성되는 조계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겸직이 많았다는 사실과 직업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이주가 극히 초기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직업도 있습니다.
알아보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짐작하기로는 문옥(問屋)은 건설관련, 일고(日雇)는 일용노동, 대궁(大弓)은 조선목공, 선두(船頭)는 선박업 정도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뒷날 봉암동 수원지를 건설한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 경찰서와 일본인 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등을 건축한 천해신시(淺海新市) 등의 토목․건축 청부업자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은 거류지 내에서 일기 시작한 각종 건설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아래 사진이 본전추오랑 씨와 천해신시 씨입니다.
이런 일본인들이 개항된 마산을 휘어잡았습니다.


당시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수에 대한 통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 시기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인구와 일본인 인구를 나타낸 것이 다음 표입니다.

년도

총인구

일본인

기타

한국인(추정)

출처

1899년

 

103

 

호수 : 2,000여호

香月源太郞, 韓國案內

1907년

11,881

3,219

80

8,582명

손정목, 도시사회경제사연구

1909년

11,022

4,321

 

6-7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1910년

16,657

5,941

52

10000-11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당시 마산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을사조약 전후에 6,000-8,000여명이었다가 1910년 경에 10,000여 명을 조금 넘긴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친 총 16,000여 명의 마산 인구는 1910년대에 내내 14,000명에서 16,000명 정도로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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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31 10: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0.09.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110년 전 마산포 해안

<김경덕의 매축청원도>
1900년 / 김경덕 / / / 매축청원서 첨부, 창원항안Ⅰ / 규장각

1900년에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기 위해 김경덕이 정부에 제출한 매축청원서에 첨부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1907년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형만 알아 볼 수 있도록 붓으로 대략 그려놓은 지도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립 전 마산포 선창과 굴강의 위치, 그리고 해안 주변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글씨는 당시 마산포 사람들이 사용했던 선창과 굴강의 명칭과 위치를 제가 표시한 것입니다.



이 지도에는 오산리․동성리․중성리․서성리로 기록된 당시의 리(里)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서, 일제에 의한 행정구획 이전의 마산포 6개리 경계에 대한 자료로 가치가 있습니다.

윗부분의「매축차정계(埋築次定界)」라는 표시로 그어 놓은 ⊓ 모양의 선이 김경덕이 매축을 계획한 범위입니다.
이 경계를 측정해 보면 도면에 나타나 있는 계획매립지의 길이는 서성선창에서 오산선창까지를 망라하여 원마산이 접하고 있는 전(全) 해안으로, 현재의 지도를 이용해 확인한 결과 약 750m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매축의 폭이 58파(把,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라고 했는데 1파를 1.8m로 보면 104.4m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런 가정으로 매립부지의 면적을 계산해 보면 78,300㎡(약 23,700평)나 되는 대규모입니다.
건설장비는 꿈도 못 꿨던 110년 전,
마산포 동성리(현 동성동)에 살았던 김경덕이란 사람의 포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아래 그림은 실제로 존재했던 마산포 해안을 정밀하게 복원하여 현재 인공위성 사진 위에 오버랩시킨 겁니다.
(옛 마산포 해안의 복원과정과 복원 결과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위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김경덕의 그림이 정확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기본형태는 충분히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 되어버린 옛날 마산포의 저 해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연을 안고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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