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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출소를 에워싸고 투석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극장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자 힘을 받은 듯 더 격한 고함들을 쏟아 뱉으며 돌질을 하기 시작했다.

<3.15의거 시위 중인 마산 시민들>

 

남성동은 중심지라 당시에도 그 도로들엔 포장이 되어있어 많은 돌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우리가 서서 구경했던 이학골목(그 골목 한 곳에 이학이란, 당시로선 고급 일식집이 있었다.)과 맞은편 세신양복점 골목의 상황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골목을 다니면서 주운 돌을 치마에 싸서 날라다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다투어 앙칼지게 부르짖었던 소리도 지금까지 귀에 쟁쟁한데,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야 이 도둑늠들아 내 포 내나라였다. 그날은 그들의 실체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민주당 여성당원이었다.

‘내 표 내어 놓으라는 말은,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유당원들과 공무원들의 주도 아래 3인조 또는 5인조로 조직되어, 조장의 인솔아래 투표소로 들어가서 종장의 감시 아래 공개투표를 하게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 편입시킬 수 없으니까, 투표통지표를 이들에겐 아예 보내지 않은 데 대한 항의라는 것도 알았다.

돌팔매질은 점점 잦아가고 정문 접근자도 많아져 가던 상황이 한참 진행될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놀라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파출소 옥상에서 화약 불빛이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흩어지며 일부는 더 흥분되어 날뛰는 모습이 보였는데, 총소리가 난 지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세신양복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나는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쪽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이어 파출소 문 쪽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는 곧 그쳤다. 친구와 나는 어떤 적극적 행동도 없이 우물거리며 사람들 쪽으로 쓸려 다녔으니 사람이 죽었는 지 어쨌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

가서 보니 그곳에도 이미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쪽엔 남성동에서와는 좀 다른 양상이 있었다. 구마산역 쪽에서 보니 파출소가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주위에 집들이 적어 접근이 쉽지 않아 돌 던지기가 어려웠던지, 좀 색다른 방법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구마산역 입구에서 파출소쪽으로 꺾어져 십여 미터 가는 곳에 돌공장이 있었는데(목재소도 있었는지?) 거기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밤일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추워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몇 명 청년들이 어디서 깡통을 주워와 밤일 현장에 땔감으로 쌓아둔 톱밥과 대패밥 등을 담아서 불을 붙인 뒤, 그 깡통을 새끼줄에 매어 원을 그리며 휘둘러서는 파출소로 향하여 던지는 장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개는 파출소 벽 밑에 떨어지거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안에서 되던지는 장면도 보였다. ......

이튿날 어머님의 만류로 시내에 나가보진 못했으나 대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열 명 이상 죽었고, 특히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면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총을 난사하며 나오는 통에 그 앞에서 제일 많이 죽었다고 했다.

<3월15일 밤 경찰이 쏜 총에 생명을 잃은 김주열. 사진은 4월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열사의 시신>

 

나는 파출소 화재가 어제보았던 그 깡통불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이상 『상식의 서식처』>

추기 :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신념이고, 그 신념을 정치로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가 선거다. 그런데, 이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뜻에 반해 나라를 침략자 일제에게 갖다바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소위 사이비 보수집단이 민의를 따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선거로선 집권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를 이어 부정선거를 관습으로 삼아왔었다. 3,5인조선거는 박정희에 의해 릴레이선거로 발전해 왔는데, 그건, 앞사람의 기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가지고 나와 검표자에게 보이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또 그렇게 가지고 나오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소문이 나 시끄러워지니 박정희 전두환은 아예 체육관에 꼭두각시들 모아놓고 하는 소위 체육관선거로 권력을 찬탈했다. 노태우는 전국 유세장을 투석장으로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고, 이명박 박근혜는 댓글부대를 만들어 민의를 조작하고......

그래서 역대 소위 보수당 집권자 7명 중 2명은 쫓겨났고, 한명은 심복한테 살해되었고, 한명은 사형 또 한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두 명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보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참보수(김구, 장준하 등)를 살해하고 보수를 참칭해온 결과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작년 10월 16일부터 매주 게재해온 창원미래연구소 박호철 이사장님의 글 「기억을 찾아가다」 25편은 오늘로 끝냅니다.

마산 봉암동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부터 자유당의 암울했던 혼란기에 보낸 중,고 시절 이야기까지 1950년대 마산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한 회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송고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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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기를 때우고 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과 백여 미터 떨어진 싸구려 객사엔 여러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러 우리들 이야기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동네 구장집에 있었던 머슴방엔 거의 매일 밤 머슴자리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냇들 북동쪽에 있은 벽돌공장 북동쪽엔 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귀환동포들이 주로 거주한 신포동과 해운동, 회원동 등 난민들 거주지는 변두리 동네들 거의 모두에 형성되었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불거졌던 소소한 절도사건들이 화제에 오를 땐 그 지역들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복어 내장을 끓여 먹고 중독사한 비극적 얘기도 그 마을들 얘기로 종종 들려왔다.

우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이었음에도 뜨네기 좀도둑들에 많이 시달렸었다.

광을 따로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집들에선 방이나 마루 한녘에 곡식자루를 두기 일쑤였는데, 들에 일하러 간 녘에 이것을 털리고나면 부잣집에서 거금 털린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은 당장 굶주림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고된 농사일로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툇마루에 둔 곡식자루가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나 일 나간 대낮에 감쪽같이 없어졌더라는 이야기, 심지어 낼모래 벨 벼나 보리를 세워둔 채 낱알을 훑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엿판 실은 리어카 아래쪽에 곡식자루가 있더라는 말도 들었고, 방물장수 함지도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솥을 떼어갔다는 말도 들렸고, 낡은 옷도 없어졌다 했다.

어쨋든 지금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도 한, 실소를 머금을 정도의 소소한 사건, 그러나 당자들에겐 상당한 타격이 되는 이런 사건들이 10년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런 사고들을 막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자율방범대를 만든 일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좀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구장집, 술도가, 방앗간에서 얼마씩 내고 여러집에서 곡식되씩 내어 교대로 번을 서는 청년들 야식비나 난방비를 감당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넘어가면 꺼려했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고 밤에도 잠을 설치게 되니 지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변두리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공권력은 제 살찌우기에 바쁘니 도회지 부자들 돌보기에도 바빴던 셈이다.

한편, 마산부두엔 며칠에 한번씩 구호곡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우리동네 몇몇 형들은 그 하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다.

품삯도 당시로선 쏠쏠했거니와 그에 못잖은 부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대꼬챙이를 다듬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작업때 곡식부대에 찔러 흘러나오는 곡식을 위 내복 안에 담고 있다가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 말이 새어 몸 수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형들로부터 아구찜 먹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 전엔 못 먹는 생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부두 근처에 있는 아구찜집에서 막걸리안주로 먹어보고서 집에서 해 먹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여러 사람들이 따라 먹었던 것 같다.

뒤에 들으니 그때 오동동 바닷가 아구찜집 중에 내 초등학교 동기 집도 있었는데 그가 지금 오동동 할매아구찜이다.

그 외, 양덕 미군부대 군용식품 절취해내는 속칭 도꾸다이이야기도 들었고, 청수들 저수지 으슥한 바닷가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으나 직접 본 일은 없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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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기합이라하여 상급생이 하급생들에게 거의 합법적으로 가하는 폭력,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하는 학내외 생활, 동급생끼리나 동네친구 나아가 또래급끼리의 쟁투를 위한 몸과 주먹 단련, 학교끼리의 패싸움으로 인한 모표, 교복 살피기 등등이 일상생활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것이다.

군사교육 강화로 인한 계급의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정적 인간관계의 매마름이나 자유당정권의 깡패문화 등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며, 반자립적인 사대문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쨋든, 딱히 잡히는 원인은 모르는 채 이런 인습들의 소용돌이에서 온전한 정신을 못 차린 채 3년을 생활해 온 게 사실인 것 같다.

입학 두어 달 뒤에 받은 소위 단체기합이란 것은 큰 충격이었다.

1년생 전부를 운동장에 불러내어 엎드려뻗혀시켜놓고, 몽둥이로 치고 발로 밟고, 무릎 구부린 흔적(바지 무릎 부분에 묻은 흙)이 있다고 때리고, 선배 존경하는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트집 내세워 그렇게 체형을 가하는 일을 처음 당해보니, 정말 상급생에 대한 공포감이 실감으로 왔다.

며칠 후엔 2년생들이 그렇게 당하는 걸 보았고, 얼마후엔 2년생들에게 우리가 당했다.

3년 될 때까지 5,6차례 그런 곤욕을 치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런 만행들이 선생님들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에도 인습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2017년 11월 1일 충남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단체기합이 있었다 - 오마이뉴스 보도 사진>

 

점심시간에 선배가 교실에 들어와 누구를 끌고가서는 집단폭행하여 보내고, 길거리에서 경례 잘 안 부쳤다고 오소리 개뺨치듯 하고...... 심지어 난 거수경례를 하고도 얻어맞았다. ‘상급생을 왜 노려보았느냐는 것이었다.

모르는 선배를 노려볼 이유가 전혀 없었으나, 그런 변명은 매만 더 벌 것이기에 그냥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저만치 같은 모표가 보이면, 목 칼라에 붙인 학년뱃지부터 살피고는, 상급생이면 경례붙이는 엄숙한 자세부터 짓는, 긴장은 항시 갖추고 다녀야했다. 시력이 나쁘다든지, 딴데를 보고 있었다든지 등의 말은 아예 안 하는 것이 나았다.

동급생끼리의 싸움질도 이틀이 멀다하고 일어났었다.

교실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주먹 자존을 위해 친구들 입회하에 용마산에서 붙는 일도 흔했다.

마산고의 누구누구, 마산상고의 아무아무개, 창신농고의 대표주먹, 마산공고의 펀치왕 들의 이름은 시내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익히 알려져있었다.

학교간의 집단패싸움도 참 잦았다.

개인적 충돌이 친구들까지 동원된 집단 자존심까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어디 야외에서 있은 충돌로 하여 수십명이 동원된 집단난투극으로 번지기도했다. 운동경기 응원중에 튀어나온 말에 흥분하여 으르릉거리기도 했고, 축구경기땐 종종 나오는 거친 플레이로하여 집단난투극으로 간 사례도 많았다.

특히, 마산고, 마산상고와 진주고, 진주농고간의 정기 축구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후유증을 낳았다.

진주고 진주농고 응원단들이 마산에 오면 갈 땐 북마산역에서 터지고 가고, 두 학교가 진주에 가서 지면 덜하지만, 이기기라도 할라치면 응원꾼들은 진주역에서 기차를 못 타고 근처에 숨어있다가 밤기차를 타고 오기도 했었다.

낯선 동네에 가서 왈짜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많았고, 외지로 갈 땐 아예 교모를 쓰지 않았다.

이런 풍토 때문에 내 고등학교시절 두 가지는 보통학생들에게 거의 필수가 되어있었다. 클럽 가입과 주먹단련이었다.

폭력써클까진 아니더라도 위세를 위한 모음이 태평양, ‘파도’, ‘다이야등등의 이름으로 많이 조직되어있어, 농촌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가입했을 정도였다. 조직내 선후배간의 유대는 잘 되어 보호받기도 좋았을 것이다.

몸 과시엔 가슴 근육과 주먹 굳은살이 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위해 평행봉과 샌드백이 유행했다.

그래서 우리집에도 소나무를 베어 와서 땅에 박아 평행봉대를 세웠고, 집 뒤곁엔 군용백에 모래를 채운 샌드백을 달았다.

평행봉틀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가슴을 마져보았고, 샌드백을 친 후 주먹 굳은살(속칭 다마’) 만져보는 일이 습관적이 되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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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마치는 행사였으며, 선수 수는 30, 경기 시간은 30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술한 바처럼, 청수(淸水)들판 오른쪽 동네(봉덕동, 봉암2)와 봉암다리쪽 동네(봉암동, 봉암1)를 시에서 떼었다 붙였다 하는 통에, 한 팀이 되었다 분리되었다 했지만, 성적은 분리되었을 때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여러 번 우승한 것도 그때였다. 그때 우리 동네는 비록 떨어졌어도 한동네라는 의식이 강했기에 함께 모여 응원도 하고 밥과 술도 같이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 군데군데에 각 동의 선수와 응원꾼들이 자리들을 잡았었는데, 중심지 동네 사람들과 변두리 동네 사람들의 입성과 모습, 준비물들엔 차이가 많았다.

특히 우리 동네보다 더 가난하고 외진 봉암1동 사람들은 첫눈에 드러날 정도로 그랬다.

선수들의 덩치도 별로 없는데다가 얼굴들은 대체로 새까맣고 깡마르고, 밥함지와 반찬통 이고 들고 온 부녀자들도 깡마른 몸에 검누른 얼굴, 입고 있는 저고리와 몸빼(もんぺ , 일본여성들이 일할 때 입는 헐렁한 바지), 몽당치마들에선 땟국이 묻어날 것 같았다.

그런 잔칫날인데도 함지 밥은 거무스럼했고, 반찬은 풋고추와 생된장, 열무김치가 주를 이루었다. 사이다 한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쪽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엔 활력이 넘쳤었다.

백여호 남짓밖에 안 되는 동네에서 칠팔십명도 넘어 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것부터가 그랬고, 평소엔 시내 중심가에 들어설 때부터 쭈뼛거리던 사람들(특히 아낙네들)의 모습과는 대조될 정도로 그 장소에서만은 생기들이 있었다.

비쩍 마른 아지매들도 이쪽 남정네들이 건네는 막걸리잔 스스럼없이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우승을 확신하는 큰소리를 주위에서 들으란 듯이 외쳤다.

그도 그럴 만했다. 마산시에서 가장 작고 가난하고 외진 그 동네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의외라고 화제로 삼을 정도로 우승을 독식하다시피 해왔던 것이다.

아마 선수들의 몸무게 평균을 내어봤다면 80:60 정도거나 그 이상의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하여 그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 눈여겨 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줄다리기는 고대부터 있었던 인간이 만든 게임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부들이었다. 작은 어촌에 큰 배는 없었기에 모두 노젓고 그물 끌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대다수가 꼬시락잡이를 주업으로 했기 때문에 꼬시락 몰이용 줄(‘방줄이라 불렀다.) 끄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줄을 몸에 붙일 줄도 알았고, 줄에 힘을 싣는 요령도 몸에 배어있었다.

준비 신호를 듣자 모두 줄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나중에 보니 모두 적삼 겨드랑이에 두꺼운 천을 대었다.

새 짚신 신은 두 발은 오륙십센티 정도의 폭으로 좌우 수평을 잡았다. 몸은 약간 뒤로 기대듯이 하는 듯하더니 땅!하는 신호와 동시에 전신을 45도 정도로 뒤로 일제히 눕히면서 버텼다. 다리에서 어깨까지 거의 일직선에 가까왔다.

상대방처럼 영차!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모두 그런 자세로 버티니, 상대가 영차!할 땐 이쪽 선수들의 등줄기만 약간 구부러졌다가 다음 순간 재빨리 한치나 두치 정도 발바닥을 뒤로 옮겨 자세를 잡고, 그 다음 순간 또 그렇게 하고...... 한 치도 끌려가는 일 없이, 한 명도 옆으로 쓰러지는 일 없이, 특별나게 끌어들이려는 모습도 없이, 전신이 하나되어 끌었다.

흙투성이 선수들의 손에 우승기와 상금이 들려지는 순간 우리동네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울렸다.

그때쯤이면 응원꾼들 대부분이 얼큰한지라, 자연스레 춤들이 나왔다. 곧 폐회가 되면 장구와 꽹과리가 나오고 막걸리통을 실은 수레가 나오면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주눅이 들어 지나다니기를 꺼려하는 남성동 오동동 대로를 거쳐 동네까지 이십리길을 그렇게 마시고 춤추며 가는 것이었다. 상당수의 아이들도 막걸리나 떡을 얻어먹으며 따라가고......

어느해인가 나도 그 광경을 보며 따르다가, 그러나 삼백 미터도 못 가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말았다. 후줄근한 차림의 촌사람들 따라가기가 챙피하게 느껴졌으리라.

그랬다. 나는 남성동이 가까워지면서 중학교나 초등학교 친구들이 볼 것 같은 느낌에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이 확실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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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2

12. 정전 후의 체험들 - 귀환, 상이군인들

 

정전 얼마 후에 전장에 갔던 아저씨들이 속속 돌아왔다.

함께 끌려가서(그땐 그렇게들 표현했다) 내내 한 부대에 있다가 함께 돌아온 우용 아저씨와 내 당숙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고, 다른 두 분은 정전 한참 후 제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우용 아저씨는 볼에 큰 흉터를 가지고 왔는데, 내 당숙은 손끝 하나 다친데 없었다.

부대가 후퇴할 때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다 열차탈선으로 부대원 전체가 부상 혹은 사망을 당하여 모두 상이용사로 제대되었는데, 집결지에 늦게 가 열차를 못 탄 당숙도 함께 상이제대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동네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았던 남규 아저씨의 귀환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정전 후 우리 집에도 두어 명 다녀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름한 복장에 단봇짐을 지고 나타난 청년들에게 음식을 주고 여비도 쥐어주는 걸 보았는데, 아버님 말씀으로 그들은 거제도에서 나온반공포로라고 했다.

그들에게 협조하라는 공문까지 시와 동에 왔더라고 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집결한 반공포로>

 

그걸 본 얼마 후에 그 청년들 보다 훨씬 남루한 누비옷차림의 남규 아저씨가 아리랑고개를 넘어왔고, 가족들의 울음과 동네사람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받던 광경을 나도 본 기억이 난다.

북한수용소에 이 년 넘게 있다가포로교환으로 왔다고 했다.

다른 부대와의 교신이 끊긴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계곡 따라 올라가라고 몰아치던 소대장, 결국 반 이상의 병사와 소대장도 전사하여 저항도 못하고 엎드려 있는데 총성이 그치고 누구에게 엉덩이를 거칠게 채여, 그 길로 수 일 동안 타고 걷고 하며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간 이야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다투던 이야기, 친공포로들의 협박과 회유에 얼버무리곤 하다가 결국 심사관 앞에서고향가고 싶다는 한마디로써 풀려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은 그때 우리들 사이에서도 꽤 오랫동안 인기화제 감이었다.

그런데, 그즈음 하여 여러 번 보았던 상이군인들의 횡포는 매우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의족이나 의수를 한 상이용사들이 몇 명씩 몰려다니면서 민폐를 일삼았던 일이다.

 

상이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상가나 민가에 들어가 곡식이나 돈을 요구하다 여의치 않으면 시비를 붙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었는데, 그런 광경을 등하교 길에서도 여러 번 목격했다.

쌀이나 보리쌀 반 되 혹은 돈 몇 푼이면 순순히 받아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더 많은 경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느냐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심지어 구멍가게 과자 통을 비우는 일도 있고 주막집 막걸리 독을 비워 버리는 일도 있었다.

항의하는 주모의 저고리 소매를 쇠갈고리로 된 의수로 꽉 집어 질려버리게 했고, 저만치 서있는 남정네의 복장을 향해 창 던지듯 목발을 날리기도 했다.

자꾸 던지면 그것도 단련이 되나 보았다. 목발이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가서 상대의 가슴이나 배, 옆구리 등을 정확하게 맞혀 그를 헉하고 엎드리게 하는 장면도 두어 번 목격했다.

이렇게 행패를 부리고는,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는데” “너그들이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게 누구 덕인데”, 저주 섞인 목소리로 고함치기 일쑤였다. <전술한 졸저에서>

 

같은 상이용사였던 9촌 아저씨의 말이 기억난다.

집도 가족도 잃고 몸 때문에 취업도 못하는 저들이 저 짓 말고는 뭘 하고 살아 가겠냐

<전쟁 후의 상이군인>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 배불리기에 바빠 그들을 방기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애먼 양민들, 아니, 비슷한 희생자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리는 형태를 달리하면서 그 후에도,, 아니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분단의 부작용이 언제까지 이 사회 역리의 원천으로 작용할 지, 종종 암담한 생각이 들기도 해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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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억은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하여 상황인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선 백두산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하자고 했는데 유엔이 정전을 강행했다는 것만 알았다.

혼자서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한 전쟁영웅 열 명의 사진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소의 육탄 십 용사포스터가 교실 벽마다 붙었고, 그들은 한동안 반공웅변대회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육탄 십용사' 충용탑>

 

그리고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 반공강연회가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소위 양키시장이라 불리던 곳에 쏟아져 나왔던 깡통식품들에 대한 기억과 쉽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흘러 다녔던 총탄과 그걸 이용한 총 놀이, 그리고 군에서 불하된 트럭들로 인한 차타기 경험들이었다.

부림시장을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고, 거기에 있었던 극장을 국제극장이라 명명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마산에서 미군물자를 가장 많이 취급하던 곳이 그 시장이었다. 지금 부림지하도 근처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양쪽 시장이 중심지였다.

깡통식품뿐 아니고 옷, 구두, 야전침대, 공구 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나왔었다고 기억되는데 거의 모두가 군수품들이었다.

전쟁 중에는 몰래 빼돌려진 물건들이 조금씩 나왔었지만 정전이 되어 미군이 대다수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전쟁잉여물자가 되어 시중으로 범람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정전 두어 달 후가 되겠는데, 집집마다 깡통 배급이 나왔다. 한 되 남짓들이 깡통이었다. 전쟁용 비축식품들이었는데 잉여 물품들이 되어 전 국민들에게 배급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 3개였다. 따보니 콩과 쇠고기로 만든 통조림이었는데 처음 먹어볼 때의 그 고소하고 진한 맛에 대한 끌림은 그 후에 국제시장을 더 찾게 했다.

그러나 그 기름진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고 후에 들었다.

 

<미국에서 온 구호품을 보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이렇게 깡통제품들이 흔해지니 우리들 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던 두레박이 양철제품으로 바뀌었고, 나무함지도 가볍고 튼튼한 양철다라이(다라이는 대야의 일본 말)로 대부분 바뀌었다.

웅덩이 물 두레도 그랬고, 각종 그릇들도 강통이 대신했다. 가을 논의 참새 떼 쫓는데도 수많은 깡통이 동원되었다. 또 깡통차기라는 놀이도 생겼다.

전에는 자치기나 비석놀이, 일제잔재인 다스께또놀이(술래잡기와 비슷) 등을 주로 했는데 이 놀이가 나온 뒤로는 역동성과 소리의 효과로 해서 이걸 많이 했던 것 같다.

술래보다 먼저 달려가 깡통을 차서 소리와 함께 깡통이 날아가고, 잡힌 동료들이 해방될 때의 쾌감은 큰 즐거움이었다.

정전 후 군대 내의 무기 관리체계가 좀 엉성했던지 이상할 정도로 총알들이 많이 굴러다녔었다.

주로 칼빈 탄환이 많았었는데, 탄알을 뽑아내고 뇌관 부분에 구멍을 뚫어 장난감 총 만드는 데에 많이 활용했다.

꼭 우산대만한 쇠파이프가 당시 시중에서 유통되었는데, 그걸 10센티 남짓 끊어 칼빈 탄피에 끼우면 맞춘 듯이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걸 당시 가게에서 많이 팔았던 나무권총의 총신에 홈을 파 묶었다. 파이프 안에 딱지화약을 까서 넣거나 총탄에서 빼낸 화약을 재어 넣는다.

그 뒤에 잔돌이나 철사 조각 따위를 넣고 그 뒤를 진흙이나 물에 적신 솜 같은 것으로 단단히 봉하고, 탄피 구명에 딱지화약을 붙인 뒤 고무줄에 걸린 공이를 튕겨주면, 공이가 피스톤처럼 나아가 화약을 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 불이 파이프 안에 전달되어 폭발이 일어나서 잔돌이나 철사조각이 탄환처럼 날아갔는데 그 위력이 제법 컸다.

총신을 좀 길게 해서 잘 만든 것으로는 둑에 가깝게 온 오리 잡는데도 사용했었다.

이 파이프를 우리는 댓(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라 불렀기에 이 총을 댓방총이라 했었다.

그리고 총탄과 관련된 참으로 무지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기억도 있다.

당시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회충검사를 하고 구충약을 나눠줄 정도로 회충구제가 골칫거리였는데, 구충에 좋다는 말이 돌아 상당수의 아이들이 총탄 화약을 뽑아 씹어 먹고 다녔던 것이다.

나도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무미 무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배탈 났단 말도 못 들었던 것 같다.

차타기 이야기는 수학여행과 더불어 해야 좋을 것 같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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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이들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2주에 한번 씩 하는 검사는 대체로 손발의 때 검사만 했기에 부담이 덜했지만 매 달하는 총검사는 팬티만 입혀놓고 했기에 그 전날부터 대비하느라 많은 고생들을 했다.

 

<'대추나무골님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한 학년 차이의 내 여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거니와, 여학생들에게만 실시한 머릿니 검사도 역시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다.

영양상태가 좋은 아이들은 피부에 윤기가 돌고 때도 잘 끼지 않을뿐더러 씻어내기도 쉬운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반대였다. 이삼일만 돌보지 않아도 손발에 누룽지 같은 때가 끼기 마련이었다.

합포초등학교 구역 동네가 오동동, 산호동, 상남동, 양덕동, 봉암동이었는데 오동동의 상당수 학생들과 산호동 상남동의 일부 학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대체로 여기에 해당되었다. 거기다 공중목욕탕도 거의 없어 용의검사 대비에 더 애를 먹었다.

당시 구마산에는 남성탕(남성동, 현재 신한은행에서 남성동지구대 쪽 2~30미터 거리 위치)이 유일했고, 내가 육학년일 때 오동동에 은하탕(오동동 다리 안쪽 4~50미터 거리 오른쪽 골목 안)이 생겼는데, 용의검사 전날엔 자리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복잡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나마 목욕료가 부담스러워 못 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봉암동의 친구들 중엔 가본 사람이 삼분의 일에도 못 미쳤을 성싶다.

목욕탕 내의 풍경도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나무로 된 개인용 물대야가 모자라 친구끼리 함께 사용했으니까 탕 안에 들어갈 때도 대야를 가지고 들어가다 시비가 생기곤 했다.

물엔 때가 둥둥 떠다녀 종업원이 수시로 들어와 족대로 때를 떠서 밖에다 털어내곤 했다. 더운물 달라는 손뼉소리와 고함소리가 수시로 나왔고, 남녀 탕 중간에 있는 맑은 물 칸에서 물 다툼 시비가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때를 벗겨낼 수 있는 친구들은 이튿날까지도 마음들이 참 홀가분했었다.

목욕탕에 못 가는 친구들은 쇠죽이나 돌맹이 등으로 때를 벗겼다. 쇠죽은 소를 먹이는 집에만 있기에 많은 친구들은 평소 냇가에서 구해둔 곰보돌맹이를 주로 썼다.

따끈한 쇠죽에 수십 분간 손발을 담가 불어난 때를 겨와 짚여물의 마찰력을 이용해 문질러 벗겨내면 상당히 효율적이긴 했으나 등배의 때는 그것으로 안 돼 목욕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찰력이 있는 돌멩이로 문지르는 것도 효율은 짚여물보다 더 떨어지기에, 손발에 피가 삐짓삐짓 내비칠 때까지 문지르고도 말끔히 벗겨 내지를 못 해 땟발이 트실트실 일어나면 검사직전 침을 발라 눌러두기도 했었다.

그러니 등배의 때는 아예 포기하고 이튿날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늦가을부터, 그러니까 내의를 입기 시작할 때부터 무명 올 사이에 끼어서 피를 빨며 겨울을 나고, 봄에 내의를 벗을 때 사라지니 추위가 오면 이는 사람과 공생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겨울 저녁에 화롯가에 둘러앉아 내복을 화로 위에 펼쳐들고 이를 잡는 광경은 1960년대까지도 한국 가정의 일반적 풍경의 하나였다.

빈대나 벼룩은 가려운데다 부르트기까지 해서 고통을 더 주었지만, 그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귀찮기로는 이가 더했다.

빡빡 깎은 남자아이들 머리엔 없었는데 여자아이들 머리엔 이가 참 골치였다. 가려운 것도 괴롭거니와 이가 슬어놓은 서캐가 하얀 점을 보이니 남 보기에 창피한 것도 큰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짓이었는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DDT(흰 분말 살충제)를 구해서 내복에도 뿌리고 여아들 머리에도 뿌렸었다.

 

<아예 서울역에서 줄을 세워 DDT를 뿌리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모자라서 용의검사 전날엔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에 식초를 발라 붇게 하고는 빗살을 실로 죄어 빗살들 사이를 더 촘촘하게 만든 참빗으로 긁어내기도 했었다.

그런 노력들을 하고도 검사 날 모욕감에 울상을 지은 여학생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난리 통인데도 학력경쟁을 심하게 부추겼던 당시의 학교풍토는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대학교들이 모두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우리들은 중학교 입시 성적 경쟁에 동원되어 성적 순 줄서기를 했던 것이다.

매월 종합 모의고사를 쳤고 성적우수자라며 1등부터 50등까지의 명단을 학교게시판에 붙였고, 전교생에게 박수까지 치게 했었다.

봉암동 양덕동 친구들의 상당수는 중학교 진학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런 학교현실은 이듬해 본 중학교 입시 합격자 발표에서도 나타났다. 판자가교사 벽에 길게 붙었던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이었다.

그 통에 합격하고도 끝머리 즈음에 간신히 붙은 경우엔 부모로부터 구박을 받거나 온 동네 창피를 당해야 했다.

그런 합격자 발표 방식은 당시엔 전국적 현상이었다고 들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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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들의 신경질이 있었겠고, 지금도 매질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성격도 작용했던 것 같다.

여름이 가까웠을 때는 오동동 선창 끝머리에 있었던 어물창고로 갔다. 여기서의 두세 달은 지금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추억을 남긴 시간이었다.

이때 또 바뀌어 오신 선생님의 어진 품성도 그런 기억을 더 도왔다. 매일을 넘어 보통 하루 두세 번씩 교실 앞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4학년 때는 한두 명에 그쳤던 피난민 편입생이 그 해 갑자기 불어 이때엔 십여 명이 되었었는데 물놀이에서 우리들과는 좀 다른 이들의 양태를 보고 어린 마음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토박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물로 뛰어 들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수영복이란 걸 보여주었다. 우리는 장난으로 그 팬티를 벗기곤 했었지만 솔직하게는 좀 부러운 눈치들을 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는 다들 이러고 놀았죠,, ㅎㅎ>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친구는 평소 바다에 한사코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그 날은 친구들의 강권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수영팬티 윗줄을 꼭 잡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러나 장난 끼 많은 친구들이 그냥 둘리 없었다. 팬티를 잡아 내려버렸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는 매우 낭패스런 표정으로 주저앉더니 얼굴을 감싸고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팬티를 내리는 순간에 나도 얼핏 본 것도 같았으나 자세히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순둥이 친구의 낭패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라던 그 친구는 그때 이미 포경수술을 한 후였는데 포경이란 말조차도 모르던 우리들 눈엔 그 남근 모양이 우습고 충격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것으로 하여 꽤 오랫동안 친구들 놀림에 시달렸던 것 같다. 으레 이런 말도 곁들였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괴기”.

출신지역에 따라 억양 차이가 뚜렷했을 텐데, 그때 우리들 귀엔 다 비슷하게 들렸던 것 같다.

늦여름쯤, 전에 있었던 산호동으로 갔다가 늦가을에 우리는 본교로 돌아왔다. 본 교사는 징발된 그대로였으나 운동장 가운데를 철조망으로 막고 이쪽에 빙 둘러 판자 가교사를 교육당국이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운동장에서 뛰 수도 있었고, 철봉대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며 모래밭에서 뒹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학내 행사도 활성화됐다.

기름 먹인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교사에 반쪽짜리 운동장이었지만 그래도 야외나 창고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때부터 학교생활의 면모가 조금씩 갖추어져갔던 것 같다.

겨울엔 난로도 피울 수 있었다. 난로는 군부대에서 폐기한 드럼통을 잘라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땔감은 간혹 학년 전체가 팔룡산으로 가서 솔방울이나 삭정이를 주워 와서 교실 구석에 쌓아두고 사용했다. 또 등교 시에 두세 토막씩의 나무를 의무적으로 가지고 오게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임에도 입시경쟁이 상당히 의식되었었는데 여건상 준비를 못하다가 이때부터는 오후까지 수업을 했다.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식은 도시락을 데우기 위해 난로 밑자리잡기를 가위 바위 보로 정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밑자리 도시락만 데워지지만 밥시간 기다리며 모두 즐거웠죠,,  ㅎㅎ>

 

이때부터 정식 체육시간이 생겨 달리기 시합도 했고 철봉의 기본동작을 배우기도 했다. 높이뛰기나 넓이뛰기 요령도 설명 들었다.

그리고 비록 운동장은 좁고 학생은 많아 좀처럼 공에 발을 대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공 따라 다니다가 운 좋으면 한 번 차보는 재미도 맛보았다. 우리가 차고 놀았던 고무공은 군에서 나온 폐타이어를 녹여 재생한 고무로 만든다고 들었다.

소위 반공웅변대회란 행사도 이때부터 활성화되었던 것 같다.

반에서 뽑아 학교대회에서 입상하면 시 대회, 나아가 도 대회까지 진출시켰었는데, 피를 토하듯 한 열변이 아니면 등위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이런 대회의 성격상 봉암동, 양덕동 등의 촌아이들은 한 사람도 못 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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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창원 의창구 대원동에 재건축 중인 '꿈에그린' 아파트 부지(아래 그림의 붉은 밑줄친 부지)에 존재했던 현대사원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아파트들에 대한 내용이다. '마을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리했던 글이다.> 목차..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Ⅳ.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