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7.04.03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1. - 창원부 해동지도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 포스팅될 주제는 조선후기 창원지역의 고지도를 소개하고 해제하는 것입니다. 준비는 신삼호 건축사가 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이면서 경남건축가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중견 건축가입니다.

 

자료는 신 건축사가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접하게된 것들이며 분량은 약 20 회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

 

 

글을 정리하는 목적은 조선후기 창원시 지역의 도시경관을 파악하는데 있다. 조사방법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군현지도의 분석과 해제이다.

 

 고지도에는 풍부한 지리정보와 인문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현재의 도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 흔적을 추적하는 것도 지역도시사에 큰 밑거름이 되리라 본다.

 

 지도는 고지도와 근대지도로 구분되는데, 이 중 고지도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지도가 제작되기 이전 시대의 회화적인 지도를 말한다.

 조선시대 고지도(古地圖) 제작유형은 조정에서 통치 차원의 목적으로 제작된 ‘군현지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창원시 지역에 해당하는 군현은 창원부, 웅천현, 진해현, 칠원현 4개 지역의 군현지도를 파악해야 현재의 창원시 지역의 경관을 파악할 수 있다.

 

 고지도 자료의 수집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고지도 원문 자료를 통해 군현지도를 조사하였다. 

 

 4개 군현이 모두 포함된 지도를 찾아본 결과는 다음의 표와 같다.

 

구분 유형

지도명

제작연대

제작기법

군현 지도

해동지도

1750년초

필사본/ 회화식

비변사지도

1745~60

필사본/ 방안식

여지도

1767년

필사본/ 회화식

조선지도

1750~68

필사본/ 방안식

지승(地乘)

1776년 이후

필사본/ 회화식

광여도

19세기 전반

필사본/ 회화식

 

 

고지도상의 창원부 지역은 구. 마산.창원지역 일대를 말하며, 1425년 창원도호부 제정이후 1895년 창원군으로 행정개편 될 때까지 약 450여 년간 존재한 지역이다.

 

 웅천현은 구. 진해시 지역일대이며, 진해현 지역은 진동, 진전, 진북면 일대 삼진지역일대이며, 칠원지역은 현재의 함안군 칠원면 일대와 구산면을 포함한 지역이다.

 구산면이 현재 창원시 지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칠원현 지도도 조사대상에 포함하였다.

 

연재순서는 제작연대순이며, 연재는 다음과 같이 할 계획이다.

 

1. 창원부 해동지도 및 地志

2. 웅천현 해동지도 및 地志

3. 진해현 해동지도 및 地志

4. 칠원현 해동지도 및 地志

5. 창원부 비변사지도, 웅천현 비변사지도

6. 진해현 비변사지도, 칠원현 비변사지도

7. 창원부 여지도 및 地志

8. 웅천현 여지도 및 地志

9. 진해현 여지도 및 地志

10. 칠원현 여지도 및 地志

11. 창원부 조선지도, 웅천현 조선지도

12. 진해현 조선지도, 칠원현 조선지도

13. 창원부 地乘지도 및 地志

14. 웅천현 地乘지도 및 地志

15. 진해현 地乘지도 및 地志

16. 칠원현 地乘지도 및 地志

17. 창원부 광여도 및 地志

18. 웅천현 광여도 및 地志

19. 진해현 광여도 및 地志

20. 칠원현 광여도 및 地志

 

 

창원부 해동지도(1750) 및 지지

 

- 창원부 해동지도 (古大44709-41)는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회화식 지도이다.

- 지도개요 : 제작시기: 1750년 (영조 26), 규격: 47.0×30.5cm, 구성: 8책

 

 지도의 제작은 자연 지형지물인 산계, 수계를 회화식으로 표현하고, 인공요소인 건물은 행정의 중심지인 읍치를 크게 확대하고 나머지 주변지역은 소축척으로 표현하였다.

 

 건물은 읍성과 읍성내 관아건물을 강조하고, 읍성 주변에 향교와 역원, 사찰 등을 표현하였다.

 

 다음으로 마을의 역사를 상징하는 고적지를 소개하고 읍내 도로는 적색으로 표현하였으며, 인접 마을간 거리는 별도의 주기로 표현하였다.

 

 

 

 

 창원읍성(도계동 일대)을 중심으로 주변을 표기하였다.

 읍성의 배치는 북면쪽의 무릉산과 백월산, 구룡산, 천주산을 끼고 있으며 서측에는 두척산, 동측에는 전단산이 남측에는 반룡산이, 동남측에는 웅산과 장백산이 두척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읍성을 중심으로 읍성 아래측에 부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5개의 행정구역이 표기되어 있다

 읍성내에 ‘창원부’라고 적혀있으며 5개의 건물이 있다. 중앙에 사미당, 좌측에 회산루, 우측에 연정, 후편 좌측에 객사, 우측에 아사라고 기재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 밖에 공공건물들이 표기되어 있다. 읍성 서측방향에 지금의 합성동 일대에 있었던 우병마절도사가 있었던 성을 구병영으로 표기하고, 성내에 향교가, 두척산 아래에 서원이, 두척선 뒤편에는 광산사가, 월영동 해안에 월영대가, 남성동 일대에 船所, 북측으로는 무령산 아래에 심암사가, 백월산 아래에는 남백사가 표기되어 있으며, 동측으로 전단산 아래에는 봉림사와 자여관이 있으며, 남측 웅산 아래에는 성주사가 표기되어 있다.

 

 주요 교통로는 적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나루터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밀양계에 면한 주문연진과 손진이 표기되어 있다.

 통신시설에 해당하는 봉수는 두척산 아래 성황봉과 저도 서측에 있는 여포봉이 있다.

 

 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부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5

자연지리

산천

구룡산, 백월산, 무릉산, 천주산, 두척산, 반룡(산),

전단산, 웅산, 장백산, 저도

10

고개

굴현, 객현, 노현, 안민현, 두척현, 이리현

6

나루터

주문연진, 손진

2

인문지리

읍성

객사, 아사, 사미당, 회산루, 연정

5

교육

향교, 서원

2

사찰

영암사, 남백사, 봉림사, 성주사, 광산사

5

역원 등

자여역, 안민관, 여포봉, 성황봉, 강소

5

고적

구병영, 월영대, 내포향, 고운대

4

 

창원부 해동지도 地志

- 地志는 지도 여백에 적어놓은 군현의 인문지리에 관한 내용으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방리

부1면, 부2면, 하1면, 하1면, 상1면, 상2면, 상3면, 동1면, 동2면, 동3면, 북1면, 북2면, 북3면, 서1면, 서2면, 서3면

16

호구

- 호구수 : 7,386호

- 인구 : 27,739명 (남자 11,632명, 여자 16,107명)

 

군병

- 京各司諸色軍 : 1,213명

- 監營屬 ; 285명

- 統營續 : 1,627명

- 右兵營屬 : 837명

- 左水營屬 : 9명 반

- 金海鎭屬 : 1,088명

= 합계 5,059명

봉수

 성황봉수, 여음포봉수

 

경제

元田沓

- 6,293結11負9束, 과전1,611결90부7속

 

案田沓

- 4,724속88부13속(案田1,691결79부6속, 案沓3,034결9부7소)

 

곡물

- 元會 및 常賑米 : 92석

- 各樣雜穀 : 3,420석

- 別餉米 : 1,104석

- 監營米 : 44석

- 監營自營 各樣雜穀 : 27,598석

- 統營米 : 1,551석

- 雜穀 : 2,477석

- 戰兵舡價 및 除留米 : 174석

- 諸置米 : 486석

- 各樣軍作 및 射木作米 : 174석

- 作租 : 151석

11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