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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30) -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5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계의 왕권을 중심으로 전제 왕권을 수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이념의 도구로 유학이 도입되고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국왕의 조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수, 설총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혜공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분규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신라 하대(下代)의 혼란을 가져왔고, 골품제도로 인한 6두품들의 정치 참여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이들은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중앙의 진골 귀족들이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6두품의 정치적 진출은 차단되었다.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심지어는 귀국을 포기한 채 당나라에 정착하는 이들도 많았다.

폐쇄적인 신분제인 골품제가 유지됨으로써 유교적 소양을 갖춘 6두품 지식인들의 정치적 성장이 봉쇄되었던 신라 사회의 모순에 대한 현실적 불만과 현실 도피의 결과였다.

<최치원 857~ >

-당나라로 간 최치원-

최치원은 헌안왕 1년(857) 6두품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치원은 경문왕 8년(868)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6만인 18세(874년)에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한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당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879년)이 일어나자 당시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었던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최치원은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의 장수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글을 썼는데 만고의 명문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토황소격문〉이 그것이다.

그의 학문이 출중했다는 것은 그의 이름과 저서가「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실렸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당나라 학자 아닌 사람이 당서 예문지에 실렸다는 것은 예외에 속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이규보는『동국이상국집』권22 잡문의 <당서부립최치원전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열전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치원의 글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당나라 문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강동의 시인이었던 나은(羅隱)은 재주를 믿고 자만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최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

또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던 고운(顧雲)과 친밀하였는데 최치원이 귀국하려 하자 그의 문장을 높이 칭송하는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산 아래에는

천리만리의 큰 바다라

가에 찍힌 한 점 계림이 푸른데

자라산 수재를 잉태하여 기특한 이 낳았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그 문장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 살에 글싸움하는 곳에 나아가

한 화살로 금문책(金門策)을 깨었네

<최치원이 쓴 진감화상비문. 지리산 쌍계사에 있다>

 

-사회개혁을 부르짖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머무를 수만 없었다.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나라 희종은 그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신라 헌강왕 11년(885) 당에 유학한지 17년만인 28세에 고국에 돌아온 그는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대숭복사비문」을 쓰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계원필경』20권을 왕에게 바치는 등 학문적인 활동은 있었으나, 당나라에서의 정치적·학문적 경험을펼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즉 최치원의 귀국 시기인 헌강왕 때를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에서 보이는 태평성대는 중앙진골귀족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오히려 최치원이 귀국하기 전후에 이미 신라 중앙진골귀족에 대한 반발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으며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성장으로 혼란은 예상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은 진성여왕 때 현실로 나타났다.

중앙정부는 지방의 주·군에서는 조세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국가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진성여3년(889)에 마침내 주·군에 조세를 독촉하자 원종, 애노 등 농민의 저항을 시작으로 신라는 완전히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후의 상황은 최치원이 해인사 길상탑지에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져 와서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란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라고 한 것을 보아 당시의 신라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미 신라 정부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앙 진골귀족들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태산군(지금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나갔다.”는『삼국사기』의 내용은 중앙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최치원의 노력은 오히려 중앙 진골귀족들의 곱지 않은 시각으로 인해 중앙관직에서 밀려나 지방직을 전전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890년부터 태산군(지금의 전북 태인)·천령군(지금의 경남 함양)·부성군(지금의 충남 서산) 등 지방관을 지내면서 신라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들을 올바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진성여왕 8년(894) 왕에게시무책 10여조를 올렸던 것이다.

시무책의 내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추측해본다면 신분제의 모순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과거제의 시행, 백성들의 경제적 고통을 덜 수 있는 경제제도 등에 대한 건의였을 것이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을 제수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중앙진골귀족들은 정치·사회의 모순을 외면하고 안일함에만 빠져 최치원의 시무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골품(骨品)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라는 설계두의 말을 보더라도 최치원의 개혁요구는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골귀족들의 이러한 대응은 신라사회를 패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고, 지방에서는 신라정부에 반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후삼국으로의 분열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월영대의 옛 전경>

<월영대>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은둔으로-

최치원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사이에서 괴리, 신라 정부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으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였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거하기 전에 잠시 합포현(지금의 마산)에 별서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현재 마산시 월영동 경남대학교 앞에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최치원이 새겼다는 ‘월영대(月影臺)’라 새긴 높이 210cm 폭 35cm의 화강암으로 된 자연석의 비석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천년이 넘는 세월의 비바람으로 이 비석의 다른 부분에 새겨진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비석의 남쪽에 1691년에 창원도호부사로 부임한 최위가 세운 비석에 “월영대를 정화하고 천세만세에 유린되지 말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월영대라 새긴 비석은 최치원이 직접 새긴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정치적·학문적 경륜을 쌓았고, 문장가로서의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신라 정부에서는 그는 능력은 발휘되지 못했다.

진골귀족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체제유지의도는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활동공간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현실사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은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추야우중(秋夜雨中)’을 비롯한 그의 시에 나타난 노장사상의 분위기는 은둔을 통해 스스로 만족하려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사회의 모순극복을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해 해결하기 못한 것은 그의 지식인으로서 한계를 보여준 것은 아닌지, 은둔은 현실도피의 자기 합리화는 아닌지 의문이다.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고려나 후백제를 택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계림은 누런 잎이고, 송악(지금의 개성)은 푸른 소나무”라는 그의 예견은 현실로 나타났다.

의 제자들은 고려 개국에 기여했고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고려 현종은 그의 업적을 기려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마산 댓거리 야경>

 

천년 전 최치원이 처음 찾았던 월영대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바닷가에 뒤로는 노송과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룬 두척산이 병풍처럼 둘렀고, 앞에는 밤이면 잔잔한 바닷가에 비치는 달그림자는 속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의 세계였다.

지금 월영대 앞의 바닷가 댓거리(월영대가있는거리)는 무지한 인간의 욕망을 근대화 내지는 도시의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화려하게 포장하였다. 일제가 매립한 월영대 앞의 바닷가에 화력발전소를 세우더니, 1980년대이후에는 마산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넓게 매립하였다.

지금의 댓거리는 우뚝 솟은 아파트단지들과 밤이면 휘황한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번화가로 변했다.

이제는 달그림자가 드리운 바다가 보고싶어 뒤꿈치를 들어보아도 보이지도 않는 길가의 한 모퉁이에 버려진 월영대,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이 싫어 높은 담벼락과 철망으로 외부와 단절해 버렸다.<<<

김건선 / 당시 마산고등학교 교사

 (본래의 글과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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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3 00:00

경남도민건축대학 2. 함양 상림, 정여창고택 답사

♪ 0. 함양의 푸짐한 인심 : 오전에 산청의 남사마을 탐방을 마치고 제촉하는 가을비를 맞으며 함양으로 향하였다. 경남건축사회에서 준비한 식당에서 함양오곡밥 정식을 먹었다. 밥을 연잎에 싸서, 찐 모습 그대로 나오는게 독특했다. 식사를 마치고는 함양건축사회에 준비한 오곡세트 선물(손바닥만한 봉투에 담긴 것)을 받은채 부른 배를 두드리며 푸짐한 함양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후 함양 상림에 당도하니 연락이 닿았는지 군수님이 직접 맞이할 준비해 주었다. 경남도민 130여명이 함양을 방문한다고 하니 직접 환영하러 나온신 것 같았다.

♪ 1. 함양상림공원[咸陽上林公園:천연기념물 154호]함양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잡은 총 면적이 약 21Ha이고 숲의 길이가 1.6Km에 달하는 인공의 보안림이다. 상림은 약 1.100여년 전 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天嶺郡:현재의 함양군)태수였던 경주 최씨의 시조이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선생이 재임중에 강둑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던 인공림이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 잦은 홍수의 피해가 있어 최치원 선생이 뚝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뚝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이 숲을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 지어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당시 6키로미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시가지 확장으로 하부지역이 훼손되어 상림공원은 1.6키로미터 구간이 공원으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치산치수에 대한 지혜를 알 수 있는 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다.(하천 중앙아 시가화되면서 상림과 하림이 분리된 지도모습)

* 함양상림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 :  갈참나무·졸참나무 등 참나무류와 개서어나무류가 주를 이루며, 왕머루와 칡 등이 얽히어 마치 계곡의 자연 식생을 연상시킨다. 1993년 조사에서 116종류의 식물이 조사되었으며, 현재 20,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과 겨울의 설경들 사철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숲 속에는 수로를 만들어 가뭄 때에도 충분한 물을 공급하여 항상 녹음이 짙다.공원의 숲속에는 이은리 석불(유형문화재 제 32호)과 함화루(유형문화재 제 258호) 및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문화재 자료 제 75호), 척화비(문화재자료 제 264호) 그리고 사운정, 초선정등 정자와 만세기념비, 독립투사들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어 산책과 함께 역사와 문화재도 만날 수 있고,연못(연꽃)테마 공원도 있으며,3,000여평의 잔디밭도 조성되어 있고, 야외 공연장인 다별당도 마련되어 되어 있는 곳이다. 

(사운정 : 비오는날 걸맞는 정자의 이름이었다. )(정자앞에 펼쳐진 연못 전경들)

* 연리목 : 초입에서 가장 발견한 것이 연리목이었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하나가 된것을 연리목(連利木)이라고 하고, 가지가 합쳐진 것을 연리지하고 한다. 상림의 연리목은 상서로운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부부간의 금슬이나 남녀간의 애정이 깊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상림공원의 연리목은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뿌리근처에서 결함되어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남녀간의 애정을 기원하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지면 합체된 모습 : 필시 뿌리에서 부터 합쳐진듯 하다.)

(상부가지의 모습 : 오른쪽인 수수인듯)

(비오는 상림공원 모습)

(연꽃이 만발한 호수)

(각종 수초들이... 개구리밥도 많은듯)

(큰 접시만한 연꽃임들)

(얘들 우산으로 쓸만한 수초잎)

(개구리들의 놀이터 : 반듯한 수초잎)

- 상림공원에서는 이쁜 해설사 3명이 안내와 설명을 해줘서 아주 쉽게 공원을 산책할 수 있었다. 군청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은 후, 자원봉사 형식으로 도우미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군청에서 제공하는 녹색 점퍼의 유니폼을 입고 알뜰하게 설명후 해줘서 큰 도움이 되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 2. 정여창 고택 :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
명 칭 함양일두고택 (咸陽 一蠹 古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4.01.14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정의균
관리자(관리단체) 정의균

-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정여창(1450∼1504)의 옛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할아버지가 다시 지었다고 하며, 안채는 약 300년 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집의 터는 500여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4개나 걸려 있다. 대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사랑채는 'ㄱ'자 모양이다.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야 '一'자모양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는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또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안에는 가묘(家廟)가 있다.
-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앞마당에 꾸민 인공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따라 아름다운 인공산을 꾸몄는데, 지금은 원래의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구조적 특성과 함께 살림살이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건물배치도, 우측이 문간채 대문)



(일두고택의 담장과 고샅길의 박석) 

(위용을 자랑하는 솟을대문)

(대문상단에 보이는 5개의 충신,효자 정려비) 

(대문간채 좌측에 있는 화장실/뒤간의 럭셔리한 모습) 

(솟을대문에 붙어있는 대문간채 : 머슴들 처소) 

(사랑채: 주인장의 거처로 용마루의 처마 곡선의 우아함을 감상해 봄이....) 

(사랑채의 누마루 : 기다란 처마를 지지하는 활주의 긴장감) 

(화단, 기단, 마루, 처마로 이어지는 수직적 위계의 사랑채) 

(마루칸과 문칸의 문꼴 디자인의 묘미) 

(대문간채의 규모가 웬만한 집규모) 

(안채로 향하는 중문 : 좌측은 광) 

(중문 : 다시 우회전을 해야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식품보관창고인 곳간채) 

(여인들의 공간인 안마당, 건너편이 안채) 

(안채에 딸린 부엌, 왼쪽이 뜰아래채) 

(부엌뒤에 있는 뒷마당) 

(안마당전경, 건너편이 사랑채 후면) 

(곡식창고인 곳간) 

(사랑채 후면의 모습) 

(작은사랑채에서 사랑채 누각방향으로 본 모습) 

(작은사랑채 : 일종의 게스트하우스) 

(작은사랑채에서 바라본 안마당 담장) 

(안마당 문 : 남여,내외의 구별이 엄격함을 볼수 있다.)

* 일두고택은 호텔급 민박지 : 작은 사랑채에서 이곳을 관리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일두고택은 관람용이기 보다는 민박지로 활용된다는 얘기를 했었다. 인터넷으로만 예약이 가능하며, 사랑채, 작은 사랑채 단위로 민박이 가능하다고 했다. 한 가족이 사용하기에는 가격도 비싼편이어서, 몇가족이 오면 방이 여러개로 별 부담없이 고택에서 하루를 즐길수 있다고 한다. 일두고택앞에 양조장이 있어서 전통주를 판매를 하고 있었다. 고택 마루에 걸터않아 양조장에서 받아온 술한잔 거하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크---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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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21 22:15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신삼호 2014.06.12 10:54 신고 address edit & del

      전통목조가구식입니다.
      모형은 실측도면을 없이 만들기는 어렵지요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실측도면이 있는지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

2013.09.25 00:00

한국100명산. 3. 최치원의 수양지 무학산

예상치 않았던 무학산 100명산 탐방 : 둘레길만 걷던 초보등산꾼들이라 원거리 원정일정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예정대로라면 포항 내연산은 8월말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8월의 100명산 원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빼먹기를 쉽게하면 앞으로 애로사항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회가 닿으면 무학산이라도 오를 기회가 있다면 그 달의 건수는 채워야지 하는 생각에 원정기념 현수막을 넣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지난주에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잘되었다 싶어서 "오늘은 모처럼 모두 참석했는데 정상한번 가입시더"라고 의견을 내어서 100산중의 하나인 무학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학산 지명의 유래

무학산은 마산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본래 이름은 [경상도지리지]에 두척산(斗尺山)이라는 이름으도 등장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척산이 회원현에 있은데 봉우리에 위에 고운대가 있으며, 월영대에서 북쪽 5리에 있다고 하였다. 아시다시피 월영대는 신라시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이 대(臺)를 쌓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두척산의 고운대는 최치원선생이 수양지로 보고 있습니다.

'고운대'는 조선시대의 지도나 전통 시대의 문인들이 남긴 시에 종종 출현한 지명이다물론 이 명승처를 최치원이 직접 고운대라고 지칭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조선 초기 문인들이 전국에 산재한 고운대를 이야기하였고, 무학산의 고운대에 관해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지명의 연원 또한 월영대와 마찬가지로 유구하다 할 것이다, [무학산의 '학봉', 이제 '고운대'로 불러야 , 유장근교수]

즉, 무학산에서 현재 학봉이라 불리우는 고운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나 두척산이 언제부터 무학산으로 불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제시대부터로 산의 형세가 학이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1.팔각정에서 근심바위까지(9시 45 - 10시 30분) : 출발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습도가 높은게 마치 비가 못와서 짜증을 부리는 듯한 그런 날씨였습니다.  항상 오던 무학산이라 별 감동도 없이 오직 정상에서 사진하나 박겠다는 마음으로 올랐습니다. 계곡을 사이로 요리조리 걸어 오르다가, 약간 급한 경사를 앞두고 하천근처에 잠시 쉬기로 하였습니다. 나무데크 위에 마련된 의자는 한숨돌리기 좋은 휴게쉼터인 것 같았습니다. 습기에 몸이 땀과 더불어 촉촉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누가 이야기 했습니다. "정상까지 45분만에 올라갈 수 있다 하더라"라는 말도 않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산을 잘타는 누구누구 얘기고 우리는 1시간 반은 걸려야 된다"는 오고가는 얘기를 들으면서, 앞으로 죽자고 1시간 이상은 올라야 정상에 도착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코스가 정상을 향한 가장 근거리 코스인 관계로 경사도 가장 심한 코스라 난코스임에는 틀림이 없는 ㄱ것 같았습니다.  두번째 쉰곳은 팔각정자가 있는 근심바위였습니다. 도심을 내려보니 안개비와 운무에 의해 말그대로 자욱한 안개속에였습니다.은 뿌연 상태였습니다. 숨고르기와 물 한모금을 마신후 다시 출발했습니다.(걱정바위 정자) : 시내를 잘 볼 수 있는 단골쉼터(시내전경) : 운무에 쌓인 마산시내

2.근심바위에서 정상까지(10시 40분 - 11시 20분) : 몸이 어느정도 풀려서인지 걷기는 한결 수월해 졌습니다. 10여분이 지나자 '1년계단'에 도착했습니다. 그냥 걷기 지루할까봐 1월 1일부터 12월 말일까지 적혀진 나무계단입니다. 계단을 오르기 한결 가뿐한 것 같았읍니다. 암튼 서마지기에 도착해서 다시 물 한모금하고 정상을 향하였다. 날씨가 꾸무리 한것이 비가 못와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한 읍습한 기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서마지기에서 무학산 정상으로 향하는 1년계단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꺼이! 꺼이! 정상에 다다르자, 이게 왠일입니까! 갑자기 시껀먼 하늘에서 짜증을 부리던 구름끼리 한바탕 나타전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쏴아 하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에서 기념촬영할려고 하던 차에 순식간에 쏟아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기념촬영은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비옷도 대충 걸친채 사진부터 한방 박았습니다. 쉴틈도 없이 하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100명산 세번째 산행은 우중에 짧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서 시내전경) 완전히 구름에 체포되어 있음(서마지기에서 봉화산방향) : 오히려 산중의 시야가 더 좋음(서마지기에서 정상방향) ; 이렇게 인적인 없었던 적은 없었다.(정상에서 비상훈련): 소나기공습에 우산과 비옷을 급히'')(정상기념촬영) : 비는 왔지만 표정은 엄청 좋읍니다.(다시 한컷) 무학산은 한국100명산에 해당됩니다.

3. 정상에서 서원곡입구까지(11시 30분 - 12시 20분) : 당초 계획은 우회하는 코스로 학봉을 통해 하산을 하려했으나 가장 단거리 코스를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던 길로 다시 하산을 하였습니다. 서마지기에 도착하자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의 충격이 워낙 큰지라 모든 사람이 정자안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정자 안에서 비옷을 다시 정비하고 하산을 하였습니다. 모처럼 맞는 비로인해 기분이 몹시 상쾌했습니다. 비닐 우의는 걸쳤지만 바지와 신발은 빗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산에 오를때 피부를 끈적이게 했던 습한 기운을 소낙비가 앗아가는 듯 합니다. 갑자기 내린비로 주변의 나무와 바위도 한결 깨끗해 보입니다. 신록이 더욱 푸르러 보이고, 바위가 더욱 파란빛을 띠는 것 같습니다. 암튼 소나기로 인해 무학산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모든 사물을 그대로인데 괜히 보는 사람의 기분땜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근심바위정자에서 만난 고교생) : 고3 청소년들인데 도시락까지 싸서''', 기특했습니다. 용마고학생이랍니다.(비에 젖은 등산로) : 물만난 대지와 나무들(물 만난 돌탑) : 바위의 열기가 식혀지는 것 같습니다.(자작히 젖은 낙엽들) : 낙엽을 보니 가을이 온 것 같기도 하고

- 내려 오는 길에 오를때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건졌습니다. 죽은 나무에 새겨진 웃는 장승입니다. 아시는 분들오 있겠지만 창원에 사시는 분인데 주로 죽은나무에 나무 조각을 한다고 하는데, 창원 인근의 산에 주로 산행하면서 죽은 나무를 보아 두었다가 때를 봐서 조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무학산에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니 엄청 반가웠습니다. (웃는 장승모습) : 한그루 나무로 2개의 장승을 만드는게 보통 실력이 아닌것 같습니다. 특히 오른쪽 두상의 일부를 삐쭉하게 남겨둔 이유는?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를''''

- 일행 중에 한명은 그런 사람을 추천해서 상을 줘야 된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원곡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정체는 신들린 조각님이랍니다.(네이버에서 블로그명입니다.

암튼 별탈없이 100명산 3번째 등정은 성공리에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 참에 기념비 하나를 소개할 까 합니다. 서원곡 팔각정 주차장에서 팔각정으로 가는 초입 우측에 큰 바위위에 비석하나가 있답니다.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답니다. 언젠가 신경이 쓰여서 올라가 보니 최치원 선생의 후손들이 최치원선생을 기리는 기념비인데 시멘트로 제작되었으며, 건립시기는 1965년도로 되어있습니다. 의미있는 기념비인것 같았습니다. 무학산 오를때 시간이 되시면 한번 보시기 권합니다.

(큰바위 위에 외로이 선 비석)(비문) 건립시기가 정묘년이면 1987년 아님 1927년이고, 경주 후인 김무영씨가 적은 것 같으며, 내용은 고운 최치원 관련 내용인 것 같읍니다.

* 무학산 주변산들 : 무학산 (716미터)자락에 연해 있는 봉우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읍니다. 정상에서 북측으로 봉화산(262.9미터)이 있으며, 남측으로 대곡산(516.4미터), 만날고개에서 더 남측으로 내려가면 밤밭고개 아래쪽으로 청량산(323미터)까지 연결됩니다. 앞서 언급된 고운대(397미터)에서 동측으로 내려가면 환주산(추산공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밤밭고개로 향하는 도로로 인해서 청량산과 단절되어 있으며, 고운대에서 환주산과 연결되는 곳은 산복도로(합포고등학교 앞으로 산복도로가 개설되면서 산맥이 단절되어서 일주순환을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언젠가 이 두곳이 산행을 위한 종주코스를 위해 어떠한 형태로라도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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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kdaudrb 2013.09.25 21: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우선 무학산이 100명산 탐방대 축하 드립니다 저의는 님들께서 소개한 죽은나무에 조각한 네이버에 신들린 조각입니다 감사합니다

    • 삼식 2013.09.26 16:5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군요, 사이트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2. rkdaudrb 2013.10.14 20: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비오는날 산행 멋져요
    비오날에는 운치도 있고 낭만도 있고 비를 맞는 기분이 좋아요
    창원에 정병산에 있는 장승도 올려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건 kbs 생생 투데이에 나온 장승 이네요 ㅋㅋ

2012.10.2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술과 꽃의 도시, 마산 1>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라 말한다……주객은 만날 때에 여러 번이나 잔을 든다”라고 읊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바다와 산, 그리고 바위가 어우러진 마산의 풍광, 특히 유선으로 불린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 주변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시로 묘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남긴 시에도 월영대와 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숙종 때에 행정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김이건이라는 사람은 “조창에서 고식을 싣고 출발하기 전에 위로의 마음으로 음식을 내려주고 포구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어”라는 조금 색다른 의미의 시를 남겼습니다.

조운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한양까지 가는 일은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관청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춤까지 추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술이 항해의 안전을 축원하는 용도로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근대기에 마산지역이 술로 유명해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들어온 일본청주 때문입니다.

개항 직후인 1904년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이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을 설립한 이후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 전국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사진은 식민지시대 일본사람들이 마산에서 생산한 청주 통입니다.

당시 술의 질(質)을 좌우하는 요소는 물맛과 기후 그리고 양질의 쌀 등 세 가지였는데 마산은 이 중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의 경우 마산의 물은 감로수와 같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무학산 뒤편에 자리한 감천리의 물로 막걸리를 빚으면 청량사이다와 같다던가, 세찬 완월폭포의 물을 기관차에 넣으면 오르막 길도 힘차게 올라갈 정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물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산 시내의 샘물 중에서도 광대바위 샘물(일명 몽고정)을 비롯한 몇 곳의 샘은 1911년 총독부 검사 결과 가장 우수한 샘물로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샘들은 1919년-1920년에 마산을 비롯한 전국을 휩쓴 콜레라 발생이후 공동수도가 생기는 바람에 쇠퇴하였지만 아직까지도 ‘물 좋은 마산’이라는 별명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 술 청주는 쌀로 만들기 때문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야 했는데 마산 인근의 고성, 김해, 창원과 같은 넓은 들이 뒷받침하였고,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은 기후도 술 빗기에 제격이었습니다. <<<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2012/10/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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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마산 앞바다에 비친 달그림자>


고운(孤雲) 최치원857년(헌안왕 1년) 6두품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8살에 당나라 조정이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해 설치한 빈공과에 급제하여 당나라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이름과 저서가 실릴 만큼 학문이 출중했습니다.

28살에 신라로 돌아 온 고운은 한림학사에 임명되는 등 공직을 맡기도 했으나 국내 사정이 복잡해 자신의 경륜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부패한 진골귀족과 지방세력 간의 혼란에 나라의 근간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벼슬을 내던진 고운은 은거를 결심합니다.
경주, 영주,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울산 등 전국 곳곳을 주유하다가 경치 좋고 학문하기도 좋다싶어 이곳 합포(마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의 신마산 댓거리,
즉 해운동에 월영(月影, 달그림자)대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라의 종말과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을 예견한 글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으로 인해 이곳에 더 머물지 못하고 가솔들을 데리고 해인사로 가 은거했습니다.




월영대
는 경상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현재 경남대학교 정문 옆 진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에 있습니다.
그 곳에는 높이 2.1미터, 폭 35센티미터의 ‘월영대(月影臺)’새긴 화강암 비석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직접 쓴 글입니다.

위의 그림 네개는 모두 '월영대'입니다.
네 그림 중 제일 위의 것은 일제기에 찍은 월영대 사진입니다. 일제 초기로 보입니다.
두 번째 것은 1933년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우에하라(上原 榮)가 펴낸 '鄕土の硏究(향토의 연구)'라는 책에 수록된 월영대의 그림입니다.
세번 째 그림은 1937년 마산부가 발간한 관광안내 리플렛에 실린 월영대입니다. 네번 째가 근래에 찍은 월영대 내부의 사진입니다.
시기가 다른 월영대의 모습,,,, 어떻습니까?

경남대 앞의 지명인 ‘댓거리’는 대(臺, 월영대)가 있는 길이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학산 꼭대기에도 고운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천 년 전,
고운이 마산을 찾았을 때 지금 월영대가 있는 신마산 댓거리 일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뒤로는 우뚝 솟은 두척산(무학산),
앞으로는 호수처럼 잔잔한 합포만,
옆으로는 복개되어 사라진 월영천 맑은 물이 흘렀겠지요.
그리고 뒷날 월영리라 불린 초가 몇 채가 월영천 너머 자리 잡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도시 한 복판이 되었지만 옛지도나 문헌을 살펴보면 월영대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거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을사늑약 전후하여 신마산 일대에서 시작된 각국공동조계지 건설과 월영동 아파트 단지(구 국군통합병원부지)에 들어선 일본군의 중포병대대를 건설하면서 월영대 앞 해안이 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월영대 주변경관이 달라지게 된 것이 대략 110년 전이라는 말입니다.

달그림자가 보이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긴 월영대(月影臺),,,,
이 아름다운 이름은 고운 최치원이 지었습니다.
고운이 떠나고 세월이 흐른 뒤,
수많은 유인과 학자들이 월영대를 순례하며 고운을 흠모하였고, 그 때 받은 감흥과 고운을 회억하는 심경을 시문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 중 하나,
인조 19년(1641)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월영대기(月影臺記)의 일부입니다.
월영대의 옛 정황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월영대는 창원도호부 관아의 서쪽 삼십 리 합포의 옛 진루 곁에 있는데, 넓은 바다를 마주하고 서쪽 두둑은 바다에서 떨어졌으며 동쪽으로 웅산(熊山)을 바라본다.
매월 열엿샛날 땅거미가 질 무렵 바닷물이 한창 찰 때에, 대(臺)에 올라 달그림자를 바라보면, 달이 바다에서 뜨는데 풀 덮인 산이 그림자를 이루며, 달그림자가 바다 가운데에 있어 넓이가 구십 칠억 삼만 팔천 척이나 되고 기묘하며 지극하다.
달이 산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림자는 사라진다

기묘하고 지극했던 달그림자를 다시 보고 싶지만, 아무리 까치발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도시의 소음에 귀를 막듯, 월영대는 높은 담벼락과 철망으로 외부와 단절된 채 말 없이 서있습니다.

고운에서 시작된 합포만의 달(月),
달 월(月)자와 마산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월영대를 시작으로,
조선시대의 월영리, 신월리, 완월리에 이어 지금의 월포동, 두월동, 반월동까지,,,
이렇듯 월(月)자는 이 도시 곳곳에 남았는데,
최치원이 보았던 ‘기묘하고 지극한 마산의 달 ’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천재요, 기인이었던 그의 자는 고운(孤雲)과 해운(海雲)이었으며 고려 현종 때 문묘에 배향되어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습니다.

마산여고와 제일여고 앞을 지나는 도로 '고운로(孤雲路)',
마산시 '해운동(海雲洞)',
부산 '해운대(海雲臺)',
마산 '문창(文昌)교회' 등이 그 분 때문에 남아있는 명칭들이니,,,,
지나고 보면 천년도 순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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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정건 2010.04.26 18: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에는 月자와 관련이 매우 깊은 것 같습니다.

    신월, 월영, 월포, 월성 , 완월 신마산에 있는 초등학교들은

    대부분 月자가 들어갑니다.

    • 허정도 2010.04.26 22:00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마산 앞바다에 달그림자가 비치는 그런 날이 다시 돌아올까요?
      그런 날이 오도록 빌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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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