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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4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1) -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4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정동의 일이 시급한데 / 농삿일을 누가 생각하랴 / 사자는 끊임없이 이어져 / 동으로 서로 달리네 / 백성을 거두어가니 고을은 텅텅 비고 / 말들은 달려 강가로 향하고 있네 / 밤낮으로 나무베어 /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 한 자의 땅도 갈아놓지 않았으니 / 백성들은 무엇으로 목숨 이어가나 / 집집마다 묵은 양식 없고 /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 하물며 다시 농업마저 잃었으니/ 볼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위의 시는 원 간섭기를 살았던 수선사(修禪社 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당시 일본정벌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던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며 읊은 것이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토지의 황폐화를 가져와 삶의 터전을 잃고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고려 민중들에게, 일본정벌은 이들을 다시 헤어날 수 없는 파멸의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일본정벌은 정복전쟁이라는 민족적, 국가적 사업이기 전에 민중들에게 또다른 고통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고려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과 고려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지휘하에 4만의 군사가 900척의 전함에 나눠 타고 합포항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정벌에 나선 여원(麗元) 연합군의 우렁찬 항진이었다.

이제까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기만 했던 고려가 비록 원나라의 강요때문이기는 하였지만, 원정이라는 시험대에 오르고있었던것이다.

 

-합포, 고려의 군사항으로 떠오르다-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오늘의 마산, 곧 합포(合浦)는 그 전진기지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조그마한 항구였던 합포가 제국을 건설하려는 몽고의 의도에 따라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합포는 오늘날 김해지방인 금주(金州)의 속읍이었다. 신라때 골포현(骨浦縣)이라 하여 오늘날 창원의 속읍이었던 합포는 고려에 들어와서 김해의 속읍이 되었고 뒤에 가서야 감무가 파견되는 정도였다.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원의 지배가 시작될 무렵 합포는 이에 저항하는 삼별초 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원종 12년(1271) 2월에 삼별초가 합포에 출몰하여 감무(監務)를 생포해 갔으며, 원종 13년(1272) 11월에는 다시 합포를 공격하여 전함 22척을 불사르고 몽고의 봉졸(烽卒) 4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원종14년(1273) 1월에 다시 합포를 공략한 삼별초는 전함 32을 소각하고 몽고병사 10여명을 잡아 죽였다.

이같이 삼별초가 세 차례나 합포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해안 연안 고을이 그 영향권에 들어갔고 주민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합포가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서 역할한 것은 그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합포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남해안에서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몇 안되는 고장이었다. 이곳은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는 데다, 일본과의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하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조류를 감안할 때,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巨濟)를 거쳐 대마도-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정벌이 있기 전, 일본을 초유(招諭)하기 위한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게다가 합포에는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일단 이곳으로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에도 다른 연안지역보다는 훨씬 유리하였다.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합포를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조운로와 조창>

 

-일본 정벌의 험난한 길-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은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충렬왕 즉위년(1274)의 제1차정벌과 충렬왕 7년(1281)의 제2차정벌이 그것이다.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정벌에 앞서 여러차례 일본을 설득하여 무력사용없이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회유를 위한 사신을 자주 파견했던 것은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원종11년(1270) 경부터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흑산도를 비롯한 고려의 연해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기도 하고, 김해지방 등 10여 곳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군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고려정부에게 군량을 보조하도록 하고 전함의 건조를 독촉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여몽연합군은 일본정벌을 시작하였다. 본래 이 해 7월에 출격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5월에 이미 연합군이 합포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원종이 6월에 사망함으로써 연기되었다가 장례를 마치고 이때에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1차정벌에 동원된 여몽연합군은 군사 약 4만, 전함 90척이었다. 군사는 고려에 주둔해 있던 몽고군과 요동 및 한반도 북부출신으로 몽고에 귀부한 군인으로 구성된 몽한군(蒙漢軍) 25천명, 고려 군사 8천명, 뱃사공 67백명 정도였다.

지휘부는 원나라 홀돈(忽敦)이 도원수, 홍다구((洪茶丘)가 우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좌부원수였고,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도독사, 김신(金侁)이 좌군사, 김문비(金文庇)가 우군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103일 합포항을 출발한 연합군은 거제도를 거쳐 5일 밤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서해안 사스우라[佐須浦]로부터 공격을 개시, 대마도를 정벌한 뒤 14일에는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구주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19일 하카타만[博多灣]으로 들어가 20일 미명에 하카타·하코사키[箱崎]·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만인 21일 연합군의 선단이 하카타만에서 사라졌다. 여원연합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절반이 넘는 13500명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1차정벌을 일본에서는‘문영(文永)의 역(役)’이라 부르고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여원연합군의 일본공격 루트>

 

1차 일본원정이 이렇게 실패로 끝났음에도 원 세조는 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충렬왕 2년(1276) 예부시랑 두세충(杜世忠)을 일본에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는 한편, 전쟁준비를 계속지시하였다.

충렬왕 5년(1279)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어느 정도 여력을 갖추게 되자 다시 일본정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탐라(耽羅)에 목마장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書省)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그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에 원나라는 충렬왕 7년(1281) 제2차 일본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여원연합군은  동로군(東路軍)·강남군(江南軍)의 양군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明州)·정해(定海)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다.

동로군은여·원연합으로 편성되어 총병4만명에 전함 9백척이었다. 그 중 원나라가 3만명, 고려가 1만명이었으며 전함과 사공 15천명, 군량 11만석, 무기 등은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강남군은 총병력 약10만 명에 함선 약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제1차 때와 같이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하에 512일 합포를 출발, 거제도에 15일 정도 대기하여 있다가 526일 대마도에 도착한 후, 이키도를 비롯해 구주 연안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향해 공격하였다.

출발이 늦어진 강남군은 원장(元將) 범문호(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다자이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730일 저녁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밤중이 되자 폭풍우가 일면서 다음날인 윤 71일 하루 내내 폭풍우가 밀어닥쳐 연합군을 강타하였다.

2차원정도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전함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당시 북구주의 해안에는 파괴된 선박과 익사한 시체가 겹겹이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원사』일본전에는 10만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3명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는 원정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 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각각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다.

                 <당시 몽고군에 의한 우물이라고 알려진 마산 자산동의 몽고정 표지석>

 

-정벌이 드리운 그림자-

두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조는 여전히 일본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해지방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고려에 전함과 군량을 준비하게 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살피는 등 제3차 정벌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에서는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고려에는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동계(東界)로 침입해 철령을 넘어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양평)을 휩쓸고 충청도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강화로 피난하는 한편, 원나라에 원병을 청해 여원연합군으로 연기(燕岐)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러 몰아냈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고려에는 합단이 침입해 사태가 복잡해진데다가 세조가 죽음으로써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정벌은 어느 쪽의 승리도 없이 원, 고려, 일본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시도한 것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국가 목표를 실현하자는 것이었고, 고려와 일본 모두를 견제·약화시키면서 동아시아 사회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벌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목표와 위신에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고려는 주도적으로 정벌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 역사상 최초의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남으로써 오히려 인명의 살상과 경제적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에 따른재정적 부담을 안아야했다. 물론이 모든 것은 민중의부담으로돌아오는것이었다.

일본은 여원연합군의 대함대를 막아냄으로써 일단 원에 의한 종속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전쟁이 모두 태풍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신풍(神風)’의 가호를 받는 나라로 이미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마도의 경우가 더 심했다. 연합군이 들이닥쳤을 때 보이는 사람은 모두 타살되었다 하며, 처자를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가 숨으면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목졸라 죽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의 마산, 곧 합포는 일본정벌 기간 동안 군사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함 건조 등 요즘으로 치면 군수업체가 생겨났을 것이고, 이곳 저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게다가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이 집산되어 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충렬왕이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마치 임시수도와 같은 규모였을 것이다.

정벌이 끝난 후 정부에서 합포를 회원(會原)으로 고치고 현령을 파견한 것도 그 공로를 인정해서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국왕, 고급관료, 장수들의 왕래가 결코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포를 비롯하여 인근지역은 정벌준비에 쉽게 동원되어 가혹하게 조세를 부담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원감국사 충지는 일본정벌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영남의 쓰라린 모습 /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 역역은 삼년에 걸쳐 /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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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원중 2014.08.06 13: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오늘도 감사히 배우고 갑니다^^

  2. 박진섭 2014.08.16 11:4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언제나 경천애민의 마음을 가질수 있을까요?

2010.10.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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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전쟁, 그 이후의 고통>


두 번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우리 연안을 처음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으로 여원연합군 1차 전쟁 50여 년 전입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노략질이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가장 심해 무려 452회나 침략을 받았습니다. 고려기 전체 침입 484회의 90%가량이 이때에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열부입강(烈婦入江) 부분입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정절을 지키려고 강으로 도망쳤다가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은 열부의 행실을 칭송한 그림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습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 노략질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에 수천 명이 타고와 침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산 인근에는 고종 14년(1227년) 5월 웅신현에 침범한 일이 최초이며 2차정벌 1년 전인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 합포로 침범해 고기잡이 하던 어부 두 명을 잡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모두 소규모 노략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에는 20여 척의 배를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에 불을 질렀고, 공민왕 1년(1352년) 9월에는 5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끌고 와 합포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왜구 침입사상 이곳 합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에 왜선 350척이 합포를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 때 왜구들은 별 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군영(軍營)과 병선(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무려 5천여 명의 인명을 해친 다음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왕 2년(1376년) 11월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은 경남지방의 진주,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울산, 진해, 반성 등이 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구가 이곳에 상륙하여 의창현과 회원현의 관가를 공격하고 민가를 불살라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범이 마산지역에 특히 많았던 사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합포가 두 번에 걸친 일본 정벌의 원정기지였기 때문에 받았던 일본의 보복성 공격이라고 해석합니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마산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이곳이 두 번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발진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마산이 동아시아의 군사적 중심도시로 부각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가치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주요 루트가 김해였던 사실에 비추어, 13세기 여원연합군의 대선단이 지금의 마산항을 발진기지로 설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자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동행성으로 사용되었던 자산성에 대해서조차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자원을 보존, 활용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설화도 사실인양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 세상인데, 있는 자원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일본이 하카다(博多) 일대에 당시 몽고군과의 전쟁 유적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역사문화관광지로 다듬어둔  사실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기념탑 옆에는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일제기였던 1930년대 몽고정의 사진이며 아래 사진은 80년 뒤에 찍은 지금 모습입니다.


몽고 군사와 말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모양 석물이 한 개 있는데 몽고군 전차바퀴이거나 물을 길을 때 발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초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이 우물은 원래 ‘고려정’으로 불렀으나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6년경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여원연합군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마산포의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우물이었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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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합포 선정이유와 민중의 고통>

왜?
원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 충렬왕은 대일본 원정기지로 남도의 작은 포구 합포를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이 도시가 가졌던 자연적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정리된 내용은 대략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위치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합포가 해로(海路)상 일본과의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거제도와 쓰시마 사이를 지나는 쓰시마 난류를 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첩경(합포-거제도-대마도-이키-일본본토)이라는 점입니다.
해로 뿐 아니라 육로도 수도 개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가 합포였습니다.


둘째는 항구시설입니다.
합포에는 이미 조창이었던 석두창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다른 포구보다 양호한 항구시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운선을 위한 정박시설, 내륙으로의 조세운반을 위한 교통로, 조운선의 건조와 수리를 위한 조선시설, 군량미 보관에 용이한 기존의 창고시설 등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에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도 유리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포구의 조건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합포는 리아스식 해안에 포구가 깊어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형세입니다.
거제도를 비롯한 모도․저도 등의 크고 작은 섬들 때문에 외해의 풍랑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겁니다.

넷째는 기존의 군사시설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이후부터 동남도병마절도사영(東南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된 이래 합포에는 계속 군사기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시설과 무기의 제조 및 보관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의 고통-

이 네 가지 조건에 의해 합포가 대일본원정기지로 선택되었지만, 두 번에 걸친 전쟁준비로 겪은 마산인근의 백성들이 받았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벌준비에도 쉽게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조세도 타 지역민보다 가혹하게 부담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정벌은 권력 확장을 꾀한 통치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의도 이전에 백성들에게는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었던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수선사(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 충지(沖止)는 일본정벌로 고난을 당하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영남의 쓰러진 모습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역역은 삼년에 걸쳐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 전쟁 때 힘 없는 백성만 죽어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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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국제군사도시, 합포>

13세기 후반,
고려의 남쪽 해안에 있던 합포는 행정상으로 경상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의안군 관할의 영현(領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 현종 군현체제 개편 때 지금의 양산인 양주에서 금주로 이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합포는 동아시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국제군사도시였습니다.
당시 세계최대 강국이었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이곳 합포를 일본정벌기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때는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여원연합군은 지금의 합포고등학교 남쪽 일대를 싸고 있던 현 자산성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전함건조(戰艦建造) 및 군사훈련을 비롯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둔전은 황해도 봉주(봉산)과 경상도 금주(김해)에, 선박건조는 제주도와 전라도 쪽에서 맡았습니다.

군사만 자그만치 33,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의 숙식과 훈련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배로 건너가는데 필요한 인원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 합포에 모여들었겠습니까. 뱃사공과
도선공, 수리공이 6,700명이었다고 하니 이곳 마산이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을 겁니다.
사람뿐아니라 전쟁에 나설 크고 작은 배들도 깃발을 펄럭이며 마산만으로 몰려들어 땅 바다 할 것없이 전쟁기운이 합포 하늘을 찔렀을 겁니다.

『고려사』가 그때의 정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에는 기마들이 줄줄이 이어 서 있어 온갖 사무가 눈코 뜰 새 없이 번잡하였다. 기한은 급박한데 독촉이 번개와 같아 백성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해 10월 3일,
여원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습니다.

위 그림 중 위의 것은 여원연합군 일본정벌 원정루트이며 아래 것은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당시 여원연합군의 전함입니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섬과 이키섬을 거쳐 하카타까지 승승장구하다가 밤이 되자 일본군의 야습을 피해 하카다만(博多灣)으로 후퇴해 선상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으로 배에 타고있던 연합군은 하룻밤 새 풍지박산되고 말았습니다.
세계 정복을 꿈꾼 원 세조 쿠빌라이의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7년이 지난 1281년,
여원연합군은 다시 원정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병력 40,000여명에 전함 900척이었습니다.

5월 12일 출병했는데 출병 전 충렬왕이 친히 이곳 합포까지 내려와 연합군의 일본정벌을 격려했습니다.
국가통치권자가 마산을 방문한 첫 사례입니다.
연합군의 검열 차 내려와서 두어 달가량 있었는데 우부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대동하였습니다. 환주산에 있는 현재의 자산성에 머물면서 중간에 김해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왕까지 내려왔으니 합포는 마치 전쟁기 임시수도와 같은 분위기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2차 원정에서도 갑자기 우박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태풍이 일면서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두 번이나 태풍이 일본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을 지켜준 이 두번의 태풍을 두고 카미카제(神風)이라 부릅니다. 이로 인한 허황된 의식이 역사를 오판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두 번에 걸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일본정벌의 출발지였던 합포에는 당시 주둔군 숙소와 군영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을 것입니다.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미는 물론,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들 때문에 시장도 활성화되었을 것입니다.
두 차례의 원정이 실패한 후에는 부상당한 군사들의 치료와 구제에 필요한 시설물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규모와 성격 측면에서 본다면, 13세기 후반의 합포는 위상이 아주 높았던 국제군사항구도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군사적 필요에 의해 조성된 각종 시설들이 뒷날 조선 후기 남해안 최대의 상업포구로 발전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700여년 전에 이 도시 마산이 한중일 국제전의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도시가 오늘이 있기까지 경험했던 사건들과,
이 도시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이야기들과,
이 도시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과 사람들의 사연들이,,,,
얼마나 많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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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0.05.19 18: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넘 오랫만에 들렸지요.
    잘 계십니까?
    희귀 마산의 역사자료 정말 좋습니다.
    함씩 들리겠습니다.
    건강하시고 내외분 다~ 행복하십시오.^^*

    • 허정도 2010.05.20 09:14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지내시죠?
      여름이 벌써 발등 위에 온 것 같습니다.
      세 도시 통합으로 일반시민들에 비해 공직자들 마은은 더 뒤숭숭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2. 우의영 2012.06.24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마산의 역사 ㅎ

2010.04.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마산인근을 ‘합포(合浦)’라 부르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행정체계를 주-군-현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진주와 양산이 9주(州)에 포함된 도시입니다.
당시 진주는 뒷날 강주(康州)가 되는 청주(菁州)로, 양산은 뒷날 양주(良州)가 되는 삽량주(歃良州)라고 불렀습니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는 12개 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굴자군(屈自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굴자군(屈自郡)에는 칠토(柒土-칠원)․골포(骨浦-마산)․웅지(熊只-웅천)에 각각 현(縣)을 설치함으로써 마산지역은 골포현이 되었습니다.

마산지역 현(縣)의 명칭인 ‘골포(骨浦)’는 포상팔국 중의 ‘골포국’에 이어 또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곧 '골포'는 기록에 남아있는 마산 최초의 국가명칭이자 행정구역명칭입니다.

스스로 몸을 굽힌다는 뜻을 가진 '굴자(屈自)'를 군명(名)으로 한 것과 포상팔국시대에 국명()이었던 '골포(骨浦)'를 행정체계 최하단위인 현명(縣)으로 사용한 것에 눈길이 갑니다.
혹시 전쟁에서 골포국을 굴복시킨 승리자 신라가 고의적으로 지은 이름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마산에는 2천 년이나 되는 ‘골포’가 아직도 살아남아
골포 라이온스클럽’ ‘골포 부동산’ ‘골포 갯마을식당’ ‘골포 스크린골프’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행정구역을 새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때의 군현개편은 군과 현의 명칭개정을 비롯하여 군현의 승격과 강등, 영속관계의 조정 등 행정질서의 개편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명을 한화(漢化)시켰습니다.

이 정비 때 지금의 진주지역인 청주(菁州)는 강주(康州)로, 지금의 양산지역인 삽량주(歃良州)는 양주(良州)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양주의 의안군(義安郡)으로 바뀌었습니다.

의안은 창원시에 의안동이라는 동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만 몇 해 전 창원시가 동을 합치면서 인근 몇몇 동과 함께 의창동으로 변하면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의창동주민센터 의안민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아직 연명은 하고 있었습니다.

굴자군이 의안군으로 바뀔 때 현의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마산의 골포현(骨浦縣)은 합포현(合浦縣)으로,
칠원의 칠토현(柒土縣)은 칠제현(漆堤縣)으로,
웅천의 웅지현(熊只縣)은 웅신현(熊神縣)이 되었습니다.

이 때 탄생한 합포(合浦)라는 지명은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 직후인 고려 충렬왕 8년(1282년)까지 마산지역의 행정구역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정구역명이 바뀐 뒤에도 '합포'는 지명이나 포구의 명칭으로는 계속 사용되어 마치 '마산' 지명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합할 합(合)’자를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대합조개 합(蛤)’자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합포라는 지명에 대해서,
아래 그림(1833년 제작된 고지도의 일부)처럼 마산의 산호천과 삼호천 그리고 창원의 창원천과 남천이 팔룡산을 가운데 두고 창원과 마산 양쪽에서 흘러내려 마산 앞바다에서 합쳐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양쪽의 큰물이 합쳐지는 곳, 그래서 이곳을 ‘합포(合浦)’라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이 합쳐진 합포가 아니면,
‘대합조개 합(蛤)’자의 합포(蛤浦)도 병용했다하니 마산 앞바다 갯벌에 대합조개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까요?

하지만 보다 정확한 분석은 따로 있습니다.




동아대 김광철 교수에 의하면,
합포는 단순히 포구의 모양이나 물산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위 두 개의 그림에서 보는 중국 남부지역 광서장족자치구 연해지역에 있는 '합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중국의 '합포'는 대륙 최남단인 베트남 국경 부근, 곧 요즈음 한국사람들이 골프여행 많이 간다는 해남도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해안의 작은 도시입니다.
한대(漢代) 이래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수천 년된 유서 깊은 지명입니다.

합포군은 후한시대 맹상(孟嘗)이라는 사람이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면서 유명해졌답니다.
따라서 마산이 합포로 개칭된 것은 청렴한 수령이 다스리는 고장으로 인식되어 왔던 합포의 상징성을 고려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곧 '골포'에서 '합포'로의 개칭은 지방관을 비롯한 관료의 선정과 민생의 안정을 바라는 국가 염원이었다는 설명입니다.

환주(還珠)가 합포의 별호로 사용된 것도 이런 상징화 작업이었다는 설명도 곁들여 하고 있습니다.
'구슬이 돌아왔다'는 뜻이 담긴 '환주(還珠)'는 곧 선정을 펼친 수령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합포’라는 명칭은 마산에 구청이 있을 당시 ‘합포구’로도 사용되었지만 ‘합포초등학교’ ‘합포여중’ ‘합포고등학교’ 등의 학교이름과 ‘합포만’ ‘합포문화동인회’ '합포만의 아침' ‘합포우체국’ ‘합포동’ 등 지금도 마산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마산시민에게는 아주 친숙한 지명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가겠습니다.

신라시대,
이미 마산에는 부산, 울산 등과 함께 항만이 있었습니다.
(사)한국건설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항만건설사/1978년』를 보면 고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 항만으로 이용된 지역을 소개하면서 마산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불 때 당시의 항만건설은 공법상 원시적인 개발에 불과했지만 백제와 신라의 축항기술은 당시 아시아지역 최첨단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기술자들이 와서 신라의 조선기술과 축항기술을 습득해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의 축항기술은 천연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과 해상조건에서 오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풍랑 등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시설은 석축돌제식(石築突堤式), 석주잔교식(石柱棧橋式) 또는 목재를 이용한 잔교(棧橋) 등 이었습니다.

당시 선진공법으로 축조되었던 신라시대 항만은 지금 이 도시 어디쯤에 있었을까요?
그리고 신라시대 마산의 부두에서는 어떤 분들이 무슨 일을 했을까요? <<<


<이전 글>
2010/04/08 - 연재를 시작하면서 - 여는 글
2010/04/12 - 무학여고 뒷산에서 나온 붉은 항아리 (통일신라시대 이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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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0.04.19 10: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 ^^*

    • 허정도 2010.04.19 11:00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소.
      설명을 하려니 글이 조금 기네요.

  2. 후배유림 2010.04.21 14: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선배님.
    다음 글 기다리면서 ^^

2009.10.26 07:39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경남대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 탐방대」에 참가하여 20여 일행들과 '진주가도'를 걸었다.

'진주가도'는 근대기 이전에 진주와 창원을 잇는 큰길이었다.
현재의 소답동에 위치했던 창원도호부에서 마산포를 거쳐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를 지나 밤밭 고개를 넘어 진동 양촌을 거쳐 진주로 가던 길이다.
롯데그룹 소유인 구 크리스탈 호텔 앞길인데 장군동 거쳐 중앙동 신월동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가장 좋은 도시는 ‘걷고 싶은 도시’라 했는데,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좋은 길은 아니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행차길-

100년 전인 1909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즉위 후 몇 차례에 걸쳐
지방 순행에 나섰다.

순종황제의 남부지방 순행은 1909년 1월 7일~13일까지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황제의 마산 순행 일정에 대한 『승정원일기』순종 3년 1월 5일자 기록이다.

「…… 9일에는 부산에 머무르고, 10일 오전 9시에 부산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25분에 마산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11일에는 마산에 머무르고, 12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 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45분에 대구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원래 통치자의 순행은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내각과 통감부 관원들을 대거 수행하고 순행에 나선 것은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내세워 지방민들을 통제하려는 일제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 아닌가싶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순행의 정치적 해석보다는 융희 황제가 이곳 마산에 왔다는 사건에만 관심을 갖는다.

궁정열차를 탄 황제는 1월 10일 아침 9시에 부산역을 출발하여 9시 59분 삼랑진에 도착하여 마산이사청 이사관과 동래부윤의 알현을 받았다.

11시 25분 마산역(마산중부경찰서 건너 편 벽산 아파트 자리)에 도착하여 역내에 마련된 편전에서 잠시 쉰 후에 12시쯤에 바로 이토통감 이하 수행 관원들을 거느리고 어교를 이용하여 행재소가 마련되어 있는 마산이사청(현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중요한 관민을 만났다. 모두 일제 관리와 군인들이었다.

오후에는 창원부청(지금의 남성동파출소와 제일은행 일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경상남도 각 군 군수, 기타 고등관, 민간인 등을 만났다.

황제는 11일 하루를 마산에 머문 후 12일 화요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역을 출발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파견한 제1, 2함대에서 예포를 각 21발을 발사하며 경의를 표시했다.

순종황제의 행렬을 보기 위해 마산에 이르는 철도변과 각 역에는 사람들로 넘쳤다.
약 3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여 황제의 일행을 맞이하였으며 떠날 때에도 연도의 관민들은 각 역 및 그 부근에서 만세를 외치며 황제와 일행을 봉송하였다.

2박 3일 간의 순종황제 마산순행 중, 행재소와 창원부청 간이 가장 긴 이동거리였다.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남성동 파출소까지의 길이다.

당시에는 신마산 일부에만 근대식 직선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신마산에서 장군동 다리까지는 일제가 놓은 근대식도로를 이용했고, 장군동 다리부터는 진주가도라 불렀던 크리스탈호텔(전) 정문 앞길을 통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마산도시 탐방대」 일행과 함께 걸었던 길의 일부다.

봉건왕조 시대에 통치자가 마산을 방문한 것은 단 두 번이다.

고려시대 일본정벌을 준비하던 여몽연합군을 격려하기 위해 마산에 왔던 충렬왕과 100년 전인 대한제국 순종, 융희황제이다.
충렬왕이 마산에 머물 때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하지만 순종황제는 그렇지 않다.
수행자의 숫자와 직위, 어가 행렬, 궁정열차의 배치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국화축제로 온갖 이벤트가 넘치고 있는 마산의 가을, 토요일 오후.

진주가도를 걸으며 이 길을 지났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지났던 길, 그 흔적의 역사 문화적 가치는 없는 것일까?
이 도시에 남겨진 과제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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