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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0) -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3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나온다.

 

-다양하게 남아 있는 유적들- 

창원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민무늬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유적은 마을이 야산의 구릉에 높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사람 두길 이상되는 환호(環濠)에 둘러싸여 있는 방어성 취락 유적으로서, 이미 청동기시대에 창원 지방에 농경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걸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덕천리 1호 지석묘는 길이 8미터, 폭 6미터, 깊이 4.5미터의 토광 하단에 석곽을 설치하고 그 위를 판석과 괴석으로 3단에 걸쳐 덮은 후 다시 흙을 덮고 지석과 상석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 외곽에는 방형의 주구(周溝: 주위를 도랑으로 판 것)가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높이 40∼50센티미터의 석축이 쌓여 있었다. 유물로는 민무늬토기 평저옹, 홍도, 대롱구슬(管玉) 일괄, 간돌검,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묘역을 갖춘 대형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기는 최초의 일로서, 지석묘 유적 단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계급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 이후의 유적으로는 분묘와 성지가 있는데, 목관묘 및 목곽묘 유적으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고분군, 동읍 다호리 고분군, 북면 화천리, 동전리 고분군, 진해시 성내동(웅천) 고분군 등이 있고, 옹관묘 유적으로 삼동동 고분군이 있다.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계동 유적>

 

창원시 토월동 진례산성(進禮山城), 동읍 무성성지(武城城址), 북면 화천리성지(花川里城址) 등은 해당시기의 성지로 추정된다.

위의 고분군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다호리 1호분인데, 봉분이 없고 길이 278센티미터, 너비 85센티미터, 깊이 205센티미터의 토광에 길이 240센티미터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철검, 철제 고리자루손칼[鐵製環頭刀子], 청동투겁창, 쇠투겁창, 판상철부, 쇠따비, 성운문 거울[星雲文鏡], 청동띠고리[靑銅帶鉤], 오수전[五銖錢], 청동말종방울[銅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곽을 비롯하여 검집, 원형두(圓形豆), 방형두(方形豆), 원통형 칠기,뚜껑, 각형(角形) 칠기, 붓, 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토기와 와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 거울, 오수전, 띠고리, 청동말종방울,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곽 등의 중국 한나라식(漢式)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경남 해안 지대에서 창원 지방에 가장 선진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창원시 도계동 및 다호리 분묘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기원 후의 시기에 이들은 다호리 초기와 같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이 번성하던 것과는 대조된다.

4세기경의 창원 도계동18호 목곽묘는 길이 350센티미터, 너비 160센티미터, 잔존 깊이 55센티미터의 토광 안에서 철제 손칼 2점, 투겁창 2점, 미늘쇠[有刺利器] 1점, 도끼 2점, 낫 1점, 끌 1점 등의 철기류와 적갈색 양이부소호(兩耳附小壺) 2점, 회청색고배 2점, 원저단경호 1점, 유개대부호(有蓋臺附壺)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창원 지방의 중심지가 아닌 도계동 고분 축조 집단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김해 양식의 고배, 즉 아가리 부위가 급격하게 바깥으로 꺾여있고 굽다리가 팔자형(八字形)으로 퍼지되 투창이 없는 외반구연 무투창 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김해의 가락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패총 유적으로는 창원시 외동 성산패총, 가음정동, 남산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진해 패총, 용원동 패총 등이 있다.

특히 용원동 패총에서는 움집(수혈주거지) 14기, 고상가옥(高床家屋) 4기, 저장공, 승석타날문(새끼줄로 두드린 무늬)이나 무문의 평저단경호, 고배, 장경호, 단경호, 옹, 하지키 뚜껑(土師器蓋) 등의 적갈색 연질토기, 타날문 단경호, 고배류, 대형 단경호, 평저단경호, 화로형토기, 원통형 기대 등의 회청색 경질토기, 철정, 쇠손칼, 쇠화살촉, 소형 쇠도끼, 녹각제 자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원통형기대는 원통의 중간 부위가 주산알 모양으로 약간 부풀어 오르고 하단부의 곡선이 불룩하게 내려가는 것으로서, 4세기 후반의 김해 대성동 41호분, 양동 9호분, 230호분, 부원동 패총, 부산 복천동 95호분 출토품과 같은 양식이므로, 해당 시기의 그 지역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긴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의 교류- 

『일본서기』신공 섭정 46년(366) 조에서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卓淳國)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고, 탁순국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사신에게 자문해 주고 왜국사신에게 백제 사신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 사람 과고(過古)를 보내 왜국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 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신공기(神功紀)」49년(369) 조의 기사에서, 탁순국은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에 전하는 이런 기사들이 얼마나 진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창원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집단이었음은 확실하다.

4세기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창원지역에 탁순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틀림없다. 『양직공도(梁職貢圖)』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탁순국(卓淳國)’이 바로 그것이다.

창원 반계동 고분군은 6세기의 것으로서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게 등의 단야구가 출토되어 이들이 제철집단 임을 알 수 있으며, 23호분에서는 고령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꼭지 뚜껑 단각고배, 개배, 유개대부 파수부발(有蓋臺附把手附鉢) 등이 출토되어, 이들이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창원 탁순국의 왕 또는 유력자로 추정되는 아리사등(阿利斯等)은 대가야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후기 가야 연맹의 한 소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522년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 당시 따라온 수행 인원 중 창원 지방에 배치된 사람들이 돌연 신라 관복으로 갈아입자, 그 수행 인원들을 신라로 쫓아 보내는 자주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트집 삼아 탁순국을 공격하고, 백제군이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까지 진주해오자, 탁순국은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왜국의 사신단도 구사모라((久斯牟羅)=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자, 아리사 등은 백제,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회의를 요청했다.

백제는 군대를 더욱 전진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고 주둔하면서 탁순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일파와 신라에게 투항하자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왕이 신라에 종속되기를 원했다. 그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屈自郡)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領縣)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合浦縣: 마산시), 웅신현(熊神縣: 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이는 멸망 시기 탁순국의 영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멸망 직전의 탁순국이 신라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전쟁 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군현 편제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탁순국 당시보다 넓은 영역을 신라로부터 배정받은 때문일 수도 있다.

김태식 /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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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9) - 마산만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골포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2 마산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 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한조)

 

삼한시기 마산・창원지역이 속했던 변한의 생활모습을 적은 글이다.

변한은 삼한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 의하면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남지역에서는 마한이,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는 진한이, 서남부지역에는 변한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 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들 나라 외에도 다른 이름을 가진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상팔국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은 변한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골포국은 『삼국유사』에 합포로 기록되고 있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 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합포는 마산만을 가리키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이들 유적을 통해서 볼 때 골포국이었던 이 지역은 생활모습도 변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교역의 중심, 골포국-

 

골포국은 마산만을 끼고 있는 바닷가에 자리잡은 나라였다. 이 당시 대부분의 정치집단들은 중국이나 인근 이역과의 교역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만들어진 낙랑군은 중국 한 나라의 한반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으므로, 한나라는 낙랑을 통하여 한반도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낙랑은 한반도 지역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각 정치집단의 지배세력을 회유하였다. 마산만을 끼고 있었던 골포국 또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교역을 통하여 성장 발전하였던 것이다.

 

<1997년 창원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창원 서상동 남산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

 

왕망의 지황연간(A.D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였는데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의 말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오백명은 목재를 벌채하다가 한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염사치가, “나는 한 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자 낙랑군은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 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이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진ᄒᆞᆫ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ᄄᆞᆼ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다‘ 하고는 진한인 만 오천명과 변한포 만 오천 필을 내놓았다. 염사치는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낙랑군에서 염사치의 공로와 의리를 표창하고, 관모와 땅, 집을 주었다.(『삼국지』위서동이전 한전에 인용되어 있는 『위략』의 기록임)

 

이 글은 진.변한의 여러 나라들이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진한의 우거수가 낙랑으로 망명하려 했다든지, 중국 한인이 한의 포로가 되었다든지, 변한포를 낙랑에 보냈다는 것은 그 증거이다.

이 외에도 “변한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등의 기록은 중국 뿐만 아니라 왜,예와의 교류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산회원구 무학여고 뒷편삼한시대 성지로 추정되는 이산성지>

 

골포국으로 추정되는 창원지역에도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성산패총에서는 중국 한나라에서 주조하기 시작한 오수전과 일본계의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도계동에서는 일본계인 철로 된 창, 삼동동에서는 일본계인 청동화살촉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를 보아 골포국은 남해안과 같은 교통로를 따라 중국의 군현이나 일본과 교역했던 것이다. 수입품은 주로 옷과 책, 거울, 칠기, 유리제 장신구 등과 같은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을 것이고, 수출품은 철, 포, 생구 등이었다.

철은 성산패총에서 철을 제련. 생산하는 야철지가 조사됨으로써 철이 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토산조에 “불모산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창원지역의 정치집단인 골포국은 철을 한나라의 군현이나 일본 그리고 인근 한의 여러 나라에 수출하였을 것이다.

 

-골포국이 주도했던 포상팔국전쟁-

 

전쟁은 인간이 집단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전쟁은 개개인의 복수나 싸움과는 분명히 다르다. 전쟁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싸우는 행위”를 말한다.

전쟁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에게 생이별을 강요하고 무수한 인간의 갊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모든 성과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으로 성장하고, 망하기도 하였고, 각 지역이나 세계질서도 전쟁을 통해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전쟁과정에서 문화가 교류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나무몽둥이에서 핵무기에 이르는 온갖 물질문명은 당시 사회의 최첨단 기술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략은 전쟁이 여전히 강대국이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도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미국 대통령 부시가 북한에 대하여 ‘악의 축’ 이라 규정한 것은 전 지구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대한 전쟁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그 자신감으로 인하여 북한 핵개발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농경의 발달로 일여 생산물이 늘어나고 빈부의 차도 커졌다. 단 한차례의 약탈로 일년치 식량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약탈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여러 나라가 병립하여 전쟁을 통해 세력과 영역을 확장하던 고대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이나 대포가 없던 그 시절 병사들은 자신의 힘으로만 싸워야 했고, 군량미를 운반할 트럭이나 성을 쌓을 중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동원되어야 했다. 전쟁과 전쟁터는 고대인의 또 다른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전쟁목적이 약탈에서 영토확장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농지를 확대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할 수 있는 인간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바탕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영토확장의 승리자로서 수많은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포상팔국은 삼한시기에 변한지역에서 자리잡고 있었으며, 바닷가와 접해 있었던 여덟 개의 나라였다. 확인이 가능한 나라는 다섯인데 지금의 위치로 비정이 가능한 것이 창원의 골포국을 비롯하여, 사천의 사물국, 고성의 고사포국, 칠원의 칠포국이다. 이외에 보라국이 있지만 지금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나머지는 알 수 없지만, 유적이나 유물의 분포로 보아서 진해의 웅천, 마산의 진동 일대, 삼천포, 거제 등지에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들 지역이 포상팔국에 포함된 나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상팔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포상팔국전쟁에 대해서는 가야와 관계되는 어떤 사건보다도 비교적 상세하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포상팔국은 가라 또는 아라와 갈화성을 공략하였다. 전쟁의 원인은 포상팔국이 당시 해상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는 김해지역을 대상으로 교역권을 뺏으려했던 전쟁이라는 입장과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포상팔국이 안정적인 발전의 기반인 농경지 확보를 위하여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함안지역과 전쟁을 벌였다는 입장이 있다.

포상팔국이 바닷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바닷길을 따라 선진 문화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지만, 이러한 자연환경이 바다로부터의 외부세력의 침입에 대비할 수 밖에 없는 불리한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선진문화의 수입은 대부분이 지배층의 권위를 강조하는 물품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삶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일반민들의 삶이 보장되지 못하고서는 나라의 안정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나라의 지배층들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안정적인 삶을 유지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로써 백성들의 삶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농사를 지음으로써 그 땅이 붙박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생산물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쳐지고, 그들의 노동력 또한 나라 발전의 기반시설이 되는 도로건설, 성곽축조 등에 활용될 수 있으며, 군사력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지배층은 그들의 지위를 계속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

함안지역과 울산지역은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함안지역으로의 진출은 함안의 북쪽에 있는 의령, 진주, 고령, 산청, 합천, 거창 등지로 뻗어갈 수 있으며, 울산은 넒은 뜰을 가진 경주로의 진출이 가능한 관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골포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4세기 이후가 되면 가야의 여러나라들 중에서 급격하게 성장했던 함안의 안라국의 영역으로 편입되거나, 영향력 아래 놓이기도 하고, 또 다른 가야의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탁순국이 되었던 것이다.

<함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라국 유물>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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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3) -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3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려군읍」 연혁도칠폭, 채색필사본, 19세기 이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단군조선 이후 고려까지 각 왕조의 강역을 그린 일종의 역사지도.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도성을 비롯한 주요지명의 위치를 이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중국의 정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남지역), 진한(낙동강의 동쪽), 변한(낙동강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이들 삼한에는 다양한 이름의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나라 외에도 다른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들장하고 있다. 포상팔국이 대표적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이 “삼국유사”에는 합포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세 곳이다.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이다.

따라서 합포가 마산만이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다호리유적이 있는 창원의 동명일대도 정치집단의 성장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집단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다호리 유적에서 조사된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라는 것은 정치집단이 존재했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성산패총은 철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에 있었던 골포국 등의 나라들은 4세기대를 지나면서 다른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은 탁순국이었다.

4세기대가 되면 백제국과 사로국은 인근 지역으로의 진출을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백제.신라로 발전해 나갔다. 변한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가야지역에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13개의 나라가 있었다. 고령의 가라국, 김해의 남가라국, 함안의 안라국등이었다.

탁순국은 창원지역을 포함하는 정치집단이었다.

탁순국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유적은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의 경우 고성과 인접한 진동쪽의 대평리유적을 비롯하여 현동유적, 자산동고분군이 있고 창원에는 주남저수지와 인접한 야산과 저지대에 넓게 형성된 다호리유적, 도계동고분군, 가음정동유적, 삼동동 옹관묘유적, 반계동유적, 천선동고분군, 창곡동유적등 10개소에 달한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가야지역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기울였다. 하지만 신라의 끊임없는 가야지역 진출과정에서 김해의 금관국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6세기 중반경에 신라에 자진 투항하고 말았다.

신라가 가야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던 것은 6세기대에 접어들어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부터였다. 법흥왕은 금관국을 함락(532년) 시켰고, 562년 고령의 가라국이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신라는 가야의 전역을 차지 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7세기 중엽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일부 영역도 차지하게 되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통일후 신라는 새로이 확보된 영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685년 신문왕은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주-군-현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마산과 창원지역은 이미 신라가 탁순국을 정복하여 굴자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소속된 지역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마산시), 웅신현(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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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07: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무학여고 뒷산에서 나온 붉은 항아리>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
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위에 산화철을 바른 토기입니다.
회원동에서 멀지않은 자산동 환주산성에서도 이와 같은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이 균형미 좋고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항아리는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3,000년이라는 그 아득한 과거의 시간에 누군가가 남긴 이 작은 항아리 한 개가 마산이라는 도시에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마산·창원·칠원지역을 일러 삼한시대의 변한 13부족 중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김해)과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함안)의 사이에 있었던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원대 남재우 교수는 주조마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면서,
창원 다호리와 덕천리에서 발견된 묘와 그 부장물로 보아 이 지역이 변한제국(弁韓諸國) 중 하나의 나라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의 추정은 이러하지만,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마산지역의 정치집단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라는 원시적 부족국가 '골포국(骨浦國)'입니다.

포상팔국은 글의 뜻처럼 바닷가에 자리한 여덟 개 나라였습니다.
그 중 골포(骨浦)는 마산과 창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으며, 칠포(柒浦)는 진동만을 중심으로, 고사포(固史浦)는 현재의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습니다.
이 외에도 사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물국(泗勿國)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보라국(保羅國)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세 국가는 기록에 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은 가라(加羅=阿羅, 함안)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응한 신라에 의해 포상팔국이 패퇴합니다.
3년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복수를 준비한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固史浦) 세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킵니다만 또 다시 신라에게 철저히 괴멸 당하고 맙니다.

이 처절한 전사(戰史)를 통해,
비록 패하긴 했으나 강대국 신라를 상대로 보복 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었던 골포, 칠포, 고사포 3국도 상당한 세력을 갖춘 나라였다는 추정은 가능한 것 같습니다.

3세기말에 발생한 이 '포상팔국 전쟁' 이후 마산지역에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재편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탁순국(卓淳國)'이라는 정치집단이 마산 창원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이 국가는 진해의 웅천지역과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하고자 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도 활발했습니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끝임 없는 세력 확장정책에 밀려 금관국(金官國)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탁순국은 스스로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라에 자진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시기는 신라가 김해의 금관국을 복속시킨 532년 이후에서 541년 이전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있었던 포상팔국의 '골포국'과 뒤를 이은 '탁순국',,,,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으며,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살았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


<이전 글>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 도시변천사 -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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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배유림 2010.04.13 12: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제 시작이네요..
    흥미진진합니다.
    마산의 과거...다음편을 기다립니다

    • 허정도 2010.04.13 14:3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지겨운 글을 기꺼이 '흥미진진'이라는 용어로 포장해 주어 고맙습니다.
      가능하면 쉽고 재미있게 올려볼 생각입니다.
      후배님, 봄꽃맞이 안가세요?

  2. 이진규 2010.04.13 17: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국의 고대사는 수많은 가능성의 시대이자 다양성의 시대로 재해석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가야를 비롯한 포상팔국은 그 건국과정에서부터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이는듯 합니다. 위치적으로도 한반도 남단에서 바다와 접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지금 제가 컴터를 두들기고 있는 이곳 용마산 도서관 언덕은 저 아득한 선사시대를 거쳐 골포국의 누군가가 마산만을 바라보며 한세월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정도 회장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충성!

    • 허정도 2010.04.13 18:1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가워.
      용마산 도서관에는 왠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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