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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3)

개항부터 해방까지 진행된 마산 도시변화과정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한 글입니다. 내용은 시가지 확산, 도로망 패턴, 토지 이용 등 세 가지와 이 시기에 있었던 도시변화 중 대표적인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시가지 확산>

원마산과 신마산의 두 도시가 각각 다른 조건과 형태로 생성․변화․확산을 거치면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마산 시가지는 남북 장축의 대상형(帶狀型)으로 변하였습니다.

두 도시의 연결은 단지 두 공간이 지형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간적 경계가 완화되고 식민정책을 관장하는 공공업무지역이 형성되는 등 사실상 마산 도시에 있어서 최대의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로망 패턴>

합방 이전까지 원마산에는 자연취락형 도로 밖에 없었으나 신마산의 형성 이후 두 도시에 각각 격자형 도로가 조성되었습니다.

두 도시를 연결하는 중심가로는 자연조건에 의해 남북축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 이후 시가지가 확산되면서 총 3개의 남북축 중심가로가 나타남으로써 선상(線狀)형의 도로망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지 이용>

마산창을 중심으로 남쪽 해안일대에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던 원마산의 상권은 매립과 도로개설, 그리고 역세권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아울러 신마산의 중심가로변에는 노변상권이 형성되었는데 1920년대 이후 중앙마산 조성으로 노변상권은 더욱 길어졌습니다.

개항기와 강점 제1기까지의 공업관련시설은 시가지 전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만 1920년대 이후 시행된 매립으로 인하여 그것이 해안에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신마산에서 가장 번화했던 두월동 상권의 기능 밀도는 원마산의 남성동 상권에 비할 바가 못 되었는데 이러한 남성동지역의 상권은 비록 그 세가 약해지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도시의 상업중심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도시변화>

이상과 같은 도시변화과정에는 사회변화 및 산업성장에 따른 도시인구증가라는 일반적인 요인 외에 다른 요소도 있었습니다.

곧 마산 도시 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동서(東西)쪽에 각각 바다와 산이 자리 잡고 있는 자연적 조건과 개항․러일전쟁․한일합방․부(府)제정․회사령․시구개정․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조건이라고 하는 특수한 요인을 말합니다.

그 결과,  

① 개항으로 인한 신 도시 건설

② 지속적으로 시행된 해안의 대규모 매립

③ 중앙마산이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의 형성과 변화

④ 두 개의 철도노선과 세 곳의 철도역에 의한 유통발달

이라고 하는 중요한 도시변화를 낳았으며, 이 네 가지 결과는 도시변화과정 속에서 변화의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그림은 강점기 동안 시행된 매립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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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9) - 강점제3시기

<강점기 마산의 도시화과정 특징>

도시는 인구․생활욕구․교통체계․경제여건 등 내적 상호작용에 의해 그 구조가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지역과 국가 나아가서 국제사회가 기능적으로 상호 긴밀하게 얽혀있는 생태의 장(ecological field)에서 도시가 그 중심적인 구성체이기 때문에 도시와 외부 영향 사이의 관계 및 입지조건 등 외적자극도 중요한 변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변화요인에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비롯하여 문화적․사회경제적 조건 등 일체의 상황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몇 주 동안 올린 강점기 마산의 도시화과정을 요약 정리합니다. 내용은 1) 시가지 확산, 2) 도로망 패턴, 3) 토지 이용 순입니다.

1) 시가지 확산

마산의 시가지 확산은 한국인이 살던 원마산과 일본인이 살던 신마산의 두 도시가 각각 다른 조건과 형태로 생성․변화․확산을 거쳐 마침내 하나로 연결되는 과정으로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습니다.

① 도시의 규모는 개항 전 약 0.19㎢에서 해방 시기에 4.37㎢로 무려 23배나 넓어졌습니다.

확산 시기는 신마산이 1910년 이전인 개항기, 원마산은 1910-1920년대에 많이 진행되었으나 두 도시 모두 1930년대 이후에 그 강도와 속도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③ 도시구성 형태는 원마산과 신마산이라고 하는 각각의 두 개 도시가 1930년대 중반에 연결됨으로써 남북 장축의 대상형(帶狀型)으로 변했습니다.

④ 두 도시의 연결은 단지 두 도시가 지형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 외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간적 경계가 완화되고 식민정책을 관장하는 공공업무지역 형성 등 사실상 마산 도시에 있어서 최대의 변화였습니다.

시가지 확산의 방향과 강도를 나타낸 그림입니다.

2) 도로망 패턴

① 근대적 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 원마산은 자연취락에서 나타나는 부정형 세도(細道)와 부정형 격자의 일부 도로가 혼재하고 있었으며 창원과 진주를 잇는 가도(街道)가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② 개항으로 조성된 신마산에는 도시의 특수한 자연조건과 향후 원마산과의 연결을 고려하여 남북축으로 중심가로가 조성되었습니다.

③ 1910년경 신마산의 중심가로가 북쪽의 원마산까지 연결되었으며(현 장군로) 이 때 원마산에도 격자형 도로가 처음으로 조성되었습니다.

③ 1930년대 이후에 도시범역이 확장되면서 해안의 매립지를 따라 제2의 중심가로인「해안로」가 기존의 도로와 평행하게 조성되었습니다. 이어서 중앙마산과 신마산지역 산지(山地)의 허리를 지나는「고운로」도 조성되어 마산은 두 개의 중심가로와 동일 축의 보조도로 등 총 세 개의 남북축 도로가 형성되었습니다.

④ 따라서 중심가로 형태로서 유형을 분류한다면 선상(線狀)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심가로망 변화패턴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3) 토지 이용

① 개항기 원마산은 마산창을 중심으로 남쪽 해안일대에 강력한 상권이 형성되어있었고 주위의 상당한 지역까지도 상업용지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일부 도로 안쪽의 대지와 동성동의 동쪽 일대는 주거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정 당시의 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이들 중심상권의 토지는 어선창 일대를 제외하고 대부분 일본인의 소유였으며 중국인의 소유도 제법 있었습니다.

② 원마산의 이러한 토지이용구조는 매립과 도로개설, 그리고 역세권의 영향으로 상업기능이 확산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해안지역의 매립지가 공업시설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③ 신마산은 도로망 패턴과 마산 역 건설의 영향으로 노변상권이 형성되었으며 1920년대 이후 중앙마산 조성으로 중심가로를 따라 노변상권은 더욱 길어졌습니다.

④ 공업관련시설은 초기에는 시가지 전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1920년대 들어 매립이 시작되면서 해안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⑤ 1945년 당시 도시공간 중 해수면을 접한 대부분의 토지가 공업용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상업용지는 원마산은 남성동 중심부 일대와 구마산 및 북마산 역 주변을 중심으로, 신마산에서는 두월동 3가를 중심으로 노변상권이 형성되었다.

⑥ 신마산의 두월동 상권은 원마산의 남성동 상권에 비해 그 기능의 밀도가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남성동의 도심권 기능은 개항 이전부터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위상이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개항되었던 1899년과 해방 때인 1945년의 토지이용상태의 변화를 간략히 그림으로 나타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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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208) - 강점제3시기

<일제강점기 마산의 토지이용에 대한 정리>

지난 주 까지 일곱 가지 분석 틀을 통하여 마산의 토지이용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중에는 각 필지의 토지가격을 이용한 구체적인 접근방법도 있었지만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방법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일곱 가지 분석의 결과를 보면 대체적으로 일관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이들을 종합한다면 당시의 토지이용상태에 대한 개괄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개항기 원마산은 마산창에서 남쪽해안일대에 강력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까지 토지가 상업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일부 도로 안쪽의 대지와 동성동의 동쪽 일대만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개항 이후 마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원마산으로 진출한 후 마산창 주변과 수성동 일대에 상가가 들어서면서 남성동일대의 상업기능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대 중반에 완료된 매립으로 인해 중심상권이 매립지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개설된 마산창 주변의 도로가 매립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 일대의 주심권이 더욱 부각되는 계기가 되어 서서히 상권이 매립지로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1931년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의 토지등급구분에 의하면 마산의 대지 중 中等地 중급으로 남성동187번지를 게시하고 있는데 이 위치가 매립지 내의 속칭 돼지골목에 접한 대지였다. 가격이 백 평에 1,000엔이었는데 이는 당시 마산에서 가장 고가였던 남성동141번지의 1,250원에 비해 80%로서 매우 높은 가격이기 때문에 이렇게 추정한 것이다. 신마산 두월동에서 가장 비싼 대지가 700엔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어 도로망이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상업용 토지가 북쪽으로 넓어졌고 1930년대 이후에도 역세권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시기에 원마산의 해안이 대규모로 매립되어 공장․제빙업․창고 등 공업시설 등의 용도로 토지가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2. 신마산

신마산은 개항이후부터 조계지는 물론 조계지 북쪽인 마산 역까지 시가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중 상업기능의 지역은 두월동 1-3가와 월남동 1-3가, 그리고 홍문동과 대외동 일대, 그리고 중앙동 1가와 그 북쪽인 마산역까지 상업지역이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선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항 직후인 1905년경에는 홍문동과 대외동 일대가 아주 번화하여 마산의 긴자(銀座)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해 공업기능의 지역은 시가지 전역에 고루 흩어져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통계보고』와 관련문헌에서 발췌한 자료에 의하면 합방 이전에 세운 마산의 일본인 공장은 장군동․상남동․남성동에 각각 두 곳이 있었으며 그 외에 청계동․홍문동․신창동․추산동․월포동․서성동에 각각 한 곳이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상황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바뀝니다.

첫째는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매립으로 철도회사․기선회사․조선소 등의 공업기능의 지역이 모이기 시작했으며, 둘째는 중앙마산지역의 건설이 시작되어 선상의 상업기능 지역이 북 방향으로 서서히 확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매립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중앙마산이 형성되었습니다. 부두를 포함한 공업지역은 전 해안에 걸쳐 띠를 이루면서 형성되었고 상업기능의 지역은 중앙중심가로를 따라 길게 확산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서쪽 산사면(山斜面)도 주거지로 변했습니다.

토지가격을 통해서 파악한 신마산 토지의 상업적 가치는 두월동과 월남동의 순이며 중앙마산지역인 중앙동도 월남동 수준과 비슷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마산 도시의 토지이용 구조를 보면, 해안의 매립지에는 해수면을 접한 대부분의 토지가 공업용지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상업용지로는 원마산이 남성동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와 구마산 및 북마산 역 주변 그리고 신마산은 두월동 3가를 중심으로 도시의 장축(長軸)인 중앙중심가로를 따라 노변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두월동이 신마산에서 가장 지가가 높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마산의 핵심 상권이 두월동 가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월동의 토지 최고가가 원마산 남성동의 27.5%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원마산과 신마산의 도시기능의 밀도, 즉 상권의 형성 정도를 충분히 알게 해줍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원마산의 남성동 일대는 개항 이후부터 강점 말기까지 가장 강력한 마산의 주심부였다는 사실이며 그 기능은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각 시기별 토지이용상태의 변화를 간략히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첫 그림은 범례이며, 두 번째 그림부터 1899년,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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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까지는 ‘토지이용’에 대한 추정을 각종 문헌과 사진(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과 도시공간·소유상태(나. 도시공간·소유상태를 통한 추정)을 이용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토지의 가격을 통한 추정 방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시가지 내 토지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토지의 상업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의 토지가격을 알게 되면 비교적 정확하게 당해 지역의 토지이용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1) 사정(査定) 당시 원마산의 토지등급

필자가 작성한 1912년 당시 원마산 토지이용도에 나타나는 1,157필지의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사정토지대장 중 남성동1번지의 사본입니다.

확인 후에는 각 토지를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결과를 그림으로 나타내 당시 토지이용상태를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등급 외에 토지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 토지의 과세가격입니다.

(일제는 토지조사 후 토지대장의 집계부를 조제할 때, 지가의 산출에 앞서 등급조사부에 일 필지마다 등급을 기입하고 지목별로 등급을 나눈 후 각 필수를 계산한 다음 이를 등급조사부의 합계 필지수와 대조하는 등 계산의 정확을 기했다. 그 다음 100평당 지가금표에 의하여 민유과세지 1필마다 지가(地價)를 산출한 것을 전위(錢位)까지 당해 란에 기입하고, 지적 및 지가를 지목별과 등급별의 2가지로 집계하여 이를 따로 국유지, 민유과세지, 민유불과세지(不課稅地)의 3가지로 구분한 지목별, 등급별 집계표를 조제하였다. 그런데 이 산출사무의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등급별로 지적을 집계한 다음 그 지가를 산출하고 집계표와 대조하였는데, 산출지가에 단수처리(端數處理) 관계로 과부족(過不足)이 생긴 것도 매필마다 그 과부족액을 계산하여 1전(錢)도 틀리지 않게 검산하였다. 지가 산출은 당초 100평당 지가금표에 의하여 일필지마다 계산했지만 비능률적이라 나중에는 이를 폐지하고 그 대신 특별히 지가산출표를 만들어 당해 지적에 대한 지가를 가장 간편하게 찾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 元永喜, 韓國地籍史, 1971, pp.402-405, 普文出版社)

토지대장에 기재된 과세가격은 해당 토지의 단위지가에 의해 1필지 당 계산한 금액이기 때문에 토지대장의 과세가격을 지적(地積)으로 나눈 값이 당시의 토지의 단위 가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등급만으로 토지의 가치를 결정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크로스체크(cross-check)하기 위해 각 필지를 위의 방법으로 환산하여 해당 토지의 단위 지가를 찾아 등급과의 함수 관계를 확인하였는데 그 결과가 다음 표입니다.

(등급은 원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地價는 평당 가격으로 환산하여 얻음 값임, 地價가 기재되지 않은 등급은 원마산 대지 1,157필지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임, 地價單位 : 圓)

이 표를 통해 25등급 이하는 1등급에 0.10원 이하, 25등급부터는 1등급에 0.10원, 35등급부터는 0.20원, 42등급부터는 0.50원, 67등급부터는 1.00원씩 가산되는 방법을 적용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토지과세가격과 등급이 정비례 관계로 나타났기 때문에 등급만으로 토지 분류도를 작성하였습니다.

대상 토지 1,157필지는 최저 17등급에서 최고 77등급까지 분포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두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나타낸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이 분석도를 통하여 마산창을 중심으로 하여 서굴강과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남성동 해안 일대가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남성동 파출소 아랫길(전 중소기업은행 앞 도로)이 가장 요지(要地)였는데,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 「원동상사」도 1920년 이 도로변에서 창업하여 1920년대 말 사옥을 신축한 거리입니다.

이런 세력은 부림동과 창동의 경계가 되는 현 경남은행 부림동 지점 앞길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현재의 창동 네거리의 동서방향으로 나가는 도로변도 상업기능 밀도가 높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창동․수성동․부림동․중성동․동성동으로 상권이 확산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도로변과 안쪽의 차이도 크게 나타나고 있어서 도로변의 대부분은 상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원마산의 동쪽지역인 동성동 일대는 등급이 낮게 나타나 주거지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분류도를 1912년 토지이용도인 아래 그림과 비교해보면 일본인의 원마산 토지침투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분류도에서 지가가 높은 곳으로 나타나는 51등급 이상의 지역의 상당한 면적이 일본인 소유였으며 특히 71등급 이상의 초고가 대지의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부림동시장 쪽으로 오르는 길은 이 시기 중국인들의 소유 토지가 많았는데 이 그림을 통해 중국인들이 원마산의 중심상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어선창 일대 좁은 지역의 소규모 고가(高價)대지들은 한국인의 소유로 남아있었습니다.

범례의 남성동 141번지는 1931년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 기재된 것으로서 당시 마산의 대지 중 가장 고가(高價)였던 필지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시계열적으로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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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만 2014.03.25 15: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고 갑니다. 자료가 너무 좋습니다.^-^

    • 허정도 2014.03.25 20:51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김 선생님

2014.03.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4)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3) 다섯 문헌에 나타나는 동(洞)별 개체 건물용도

여기서 말하는 다섯 문헌은 馬山市史, 馬山商工會議所百年史, 馬山と鎭海灣, 馬山案內, 경상남도통계연보 등을 말합니다

 

이 다섯 문헌을 분석대상으로 선택한 기준은 타 문헌에 비해 필요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타의 다른 기준은 없었습니다.

각 시기의 필지별 건물 용도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마산관련 각종 문헌에 단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개하는 문헌의 성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건물의 양에서 우선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시기별 용도에 대한 구분이 되지 않아 중복이 되거나 부정확 혹은 누락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자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이 통계가 당 시기의 각 지역 건물 용도의 양에 대한 표본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토지이용 구조를 파악할 소재로서 일정한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표가 이런 방법으로 집계한 통계표인데 용도는 상업용과 공업용 건물만으로 나누었습니다. 세분하여 교육 및 공공시설까지 나눌 수도 있었지만 교육시설의 경우 그 숫자가 많지 않아 직접 표기가 가능하므로 제외하였고 공공시설은 업무용으로 보아 상업시설에 포함시켰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합계의 의미는 크게 없습니다. 각 문헌에서 찾아낸 시설들이 중복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실존하는 것 중 누락된 것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통계치를 만드는 것은 이 자료를 표본적 성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시설에 포함한 용도는 점포․인쇄소․교통관련시설․사무실 등 업무시설․공공업무시설․경매장․시장․의원 등입니다. 공업시설에는 제조공장․양조장․조선소․철공소․제재소․항만․창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업시설의 분포를 보면 원마산은 남성동을 중심으로 창동․부림동․수성동이 밀도가 높았고 신마산 방면은 두월동과 월남동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업시설은 상업시설에 비해 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공업시설의 특성상 숫자에 비해 규모가 보다 규정적이기 때문에 지역 구분에 있어서 숫자개념은 적절한 접근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출처

馬山市史

商工會議所

百年史

馬山と

鎭海灣

馬山案內

慶尙南道

統計年報

합계

지역

위치

1

2

3

1

2

3

1

1

2

3

1

2

3

남성동

6

2

3

2(2)

 

2(1)

3

110(7)

14(1)

2(2)

 

1(1)

4

 

20(1)

7(4)

10

112(9)

창 동

1

 

1

1(2)

 

 

 

41(1)

2

 

 

 

(1)

1(1)

3

 

1(1)

43(4)

중성동

1

 

1

1(2)

 

 

 

12(3)

 

 

 

 

1

(1)

1

 

2

13(6)

수성동

1

 

1

2

 

 

 

16(1)

5(1)

1(2)

 

 

 

 

6(1)

1(2)

1

18(1)

서성동

1

1(1)

 

 

 

 

(1)

6

6

 

 

 

 

 

8

1(1)

(1)

6

동성동

 

1

 

1

 

 

1

15(1)

3

 

 

 

1

 

3

1

2

15(1)

부림동

 

 

2

1

 

(1)

 

41(5)

 

 

 

 

 

 

 

(1)

2

42(5)

추산동

1

 

(1)

 

 

(2)

7(1)

7(4)

2(1)

2(2)

1

 

 

 

4(1)

2(4)

7(2)

7(4)

오동동

 

 

1

(2)

 

 

 

14(5)

 

 

 

 

 

 

 

 

1

14(7)

상남동

1

 

1

 

 

 

 

4(8)

 

 

 

 

 

(1)

1

 

1

4(9)

성호동

 

 

 

 

 

 

 

1

1

 

 

 

 

 

1

 

 

1

교방동

 

 

 

(1)

 

 

 

(1)

 

 

 

 

 

 

 

 

 

(2)

소계

12

4(1)

10(1)

8(9)

 

2(4)

11(2)

26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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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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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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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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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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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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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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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동

 

 

 

 

 

 

 

1

 

 

 

 

 

 

 

 

 

1

완월동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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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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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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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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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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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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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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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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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5

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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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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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가

 

 

 

 

 

 

 

2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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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동

 

 

 

 

 

 

 

 

(1)

 

 

 

 

 

(1)

 

 

 

월영동

 

 

(1)

 

 

 

 

1(1)

1(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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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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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

 

 

 

 

 

 

 

 

 

 

 

 

 

 

 

 

 

 

반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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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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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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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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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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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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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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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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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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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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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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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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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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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동

 

 

 

 

 

 

 

 

1

 

 

 

 

 

1

 

 

 

문화동

 

 

 

 

 

 

 

 

 

 

 

 

 

 

 

 

 

 

대창동

 

 

 

 

 

 

 

 

 

 

 

 

 

 

 

 

 

 

화영동

 

 

 

 

 

 

 

 

 

 

 

 

 

 

 

 

 

 

유록동

 

 

 

 

 

 

 

 

 

 

 

 

 

 

 

 

 

 

대내동

 

 

 

 

 

 

 

 

 

 

 

 

 

 

 

 

 

 

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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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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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 이용

1)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각종 문헌에서 마산의 도시 현황을 소개하는 글귀의 일편을 종합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적인 분석이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은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하여 인용하도록 합니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市街(p.311)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舊 馬山浦(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韓國新地理』 田淵友彦, 1908년, p.254, 博文館

韓人家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정(町)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韓國總覽』 德永勳美, 1908년, pp.58-59, 아세아문화사

․․․․마산만에 위치한 구 월영대 부근에 면적 15여 만평에 도로가 종횡으로 관통하고 있고 시가가 정연하고․․․․

한인가는 각국거류지에서 20정 거리의 구마산포에 있고 시가는 창원가도에 면하여 마산만의 북쪽 중앙에 있으며 인가는 2,000여 호이다. 

『馬山と鎭海灣』 平井斌夫․九貫政二, 1911년, p.3, 濱田新聞店

․․․․․신마산과 구마산 사이는 20町(1정은 109.1m, 60간)이며 구마산은 창원가도에 위치, 인가가 즐비하게 남북으로 연하여 조밀하고 해안을 따라 조선인 상가들이 늘어서 있음, 일인도 혼재, 선박화물의 집결과 흥성함이 극을 이룸, 신마산과 구마산의 사이에는 광대한 철도와 군용지가 놓여있음, 두 시가 곧 연결될 것으로 보임,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경부철도 마산선은 군의 서부를 관통하고 정차장 세 개가 있는 것 외에 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도로로 각지에 통하고 특히 마산 진주간 및 창원간은 길이 좋아 교통이 편리하다.

․․․․․시가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最新朝鮮地誌』 日韓書房編輯部, 1912년, p.444, 日韓書房

․․․․․도로는 근래 현저하게 개량되었다. 부근 내륙과의 교통은 도착하는 곳에 차와 말이 연결된다. 또 가까운 마산 진주간 중심가로가 개수되고 있고 교통은 새로운 면을 열어가고 있다. 

『新朝鮮全誌』 南宮濬, 1913년, p.146, 唯一書館

․․․․․市街는 신구 두 도시로 나누어져 신마산은 일본인이, 구마산은 주로 조선인의 부락이며 또 그 북쪽에 昌原舊邑이 있으니 모두 상업의 요충지이다. 

『最新朝鮮地誌(中)』 朝鮮 및 滿洲社, 1918년, p.19, 朝鮮 및 滿洲社出版部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여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며․․․․․ 개항 후 거류지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의 상가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朝鮮鐵道旅行便覽』 朝鮮總督府, 1923년, p.10, 조선인쇄주식회사(경성)

․․․․․구마산은 상업이 발달해 있으며 신마산 쪽은 많은 일본인들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특히 서쪽의 구 외국인 거류지였던 곳은 순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다. 무학산을 배경으로 하여 진해만을 앞에 두고 경사가 완만한 시내에 시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업이 매우 번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1911년에 군사요충지로서 개항을 폐쇄한 이후부터 약간 침체된 상태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인구도 늘지 않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진주로 가는 경남선이 군북까지 만 개통되어 있는데 장래에는 한 번 더 성황을 이룰 것으로 본다. 

『馬山港誌』 諏方史郞, 1926년, pp.74-81, 朝鮮史談會

천엽촌(千葉村)이라는 것은․․․․․1905년 봄 40여 호의 어가단(漁家團)이 오고 하나의 어촌을 구성하여 이 속칭을 불렀다.(p.81)

1905년 11월 마산선 철도를 개방하고 일반 공중의 편리를 자유롭게 하면서부터 이주자는 갑자기 격증하고 특히 1906년 봄이 오면서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에 모두 건축공사가 크게 일어나서 일본인의 여관은 한 집도 빈 곳이 없다. 한인 객사에도 4-5인의 일본인이 섞여 숙박하는 등․․․․․(p.74)

1906년 대곡하(大谷河)에 걸쳐 놓은 반룡교 서남 모퉁이에는 복옥(福屋)이라 이르는 음식점만 있었지만 북측으로는 요정․양복점 등 가게가 여러 채있었으며 망월루 서쪽 즉, 홍문동․청계동․월남동3가와 4가, 이사청에서 세관에 이르는 도로에는 상가가 즐비하여 마산의 긴자(銀座)거리라 불렀다(p.75)

․․․․․ 마산포 방면은 韓人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으며․․․․․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와 좋은 가옥이 많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대부분이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곳 관계자의 주택이 많이 있는데 중앙부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앙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린 전답들이다(p.3)

․․․․․장군교 부근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중앙동에 이르는 가로는 1906년 초겨울에 개통되어 당시 거류지인 마산포의 유일한 연락도로가 되었고 1910년에 마산, 진주 간 일등도로가 마산 역전까지 개통을 보게 되면서 두 개의 길을 얻어 척산교에서 서로 만나 한 도로가 되어 마산포로 들어가게 되었다(pp.202-203)

마산부청이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은 반드시 府治를 건전히 발달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이 이전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治者의 생각인데 府民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형무지소 소재는 옛날 논밭이었던 한가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큰 가로에 접하여 상점이 즐비하고 크게 발한 지역이 되었다(pp.222-223) 

 

『朝鮮と建築』 朝鮮建築會, 1929년 3월호, p.39

현 마산의 시가는 바다에 면한 무학산록 일대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으로 길어 마치 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산부청의 위치는 남방 신마산의 구석에 치우쳐 있음과 동시에 약간 높은 언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구마산 방면은 매우 불편을 느끼고 있다. ․․․․․ 부청이전문제가 대두하여 그 위치를 중앙부에 선정한다는 것은 부민의 편리에는 이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나아가 시가의 발전에도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이라․․․․․․․․ 

『馬山現勢錄』 長田 純․高須瑪公, 1929년, p.156, 馬山現勢錄刊行部

마산의 市街區 구성은 종래 新舊 兩 마산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연스런 市街區의 연결이 좋지 않았다. 마산 발전의 암과 같았던 중앙 마산의 耕地(철도용지)가 府에 불하되어․․․․․․

이 中央馬山市街區 構成과 관련해서는 뭐니뭐니해도 中央馬山地先의 공유수면 매축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본 사업의 완성은 더욱 마산항 발전의 기폭제를 이루는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표기한 연도는 당 내용이 실린 문헌의 발간연도이므로 시기를 너무 제한적으로 받아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신마산과 중앙마산 지역〉

1902년. 조계지 건설 초기, 건축물은 조계지의 최남단인 현재의 월남동 5가와 월남동 4가의 최남단,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에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1902년. 초기 조계지 건설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약 0.8㎞ 정도의 규모였다.

1906년. 율구미에 일본인 어촌이 형성되었다.

1906년. 전 창원군청(현 경남대학교 대학원) 아래의 홍문동, 청계동, 월남동3․4가 일대가 「마산의 긴자(銀座)」로 까지 불릴 정도로 번화하였다.

1906년. 중앙중심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진주가도(현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를 이용해 원마산과 신마산이 연결되었다.

1908년. 합방 직전, 조계지에는 격자형의 도로가 정연하게 개설되어 있었다.

1911년. 시가(두월동 가로로 추정됨)는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상점이 즐비했다.

1923년. 조계지의 서쪽 경사지는 대부분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었고 상가는 평지인 중심가로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폐항 이후부터는 도시가 정체되었다.

1926년. 신마산의 남쪽(조계지방향)에는 고급주택이 많았으며 북쪽(중앙마산방면)에는 관아․종교시설․교육시설이 많았다.

1926년. 철도용지 때문에 도시발전에 지장이 많았고 관공서 건물이 부(府)의 최남단에 위치한 것에 대한 부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중앙마산 개발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29년. 중앙마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원마산 지역〉

1902년. 원마산의 인가(人家)는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상점도 많았는데 특히 창원가도 주변이 번화했고 해변도로변에는 어업과 관련한 상권이 발달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의 상점이 진출하면서 거리의 외관이 더 번화해졌다.

1918년. 도로는 협소했으나 상업은 발달하였다.

1926년. 교도소 부근(현․삼성생명 빌딩 일대)지역도 상점이 많이 들어선 거리로 변했다. 

이와 같은 문헌의 일편으로 도시의 토지이용 현황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많고 또한 소개한 문헌의 저자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용이 신마산에 지우쳐 있어서 시기와 내용면에서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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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인사드립니다. 꿈 꾸는 것과 희망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해가 되기 바랍니다.

건축의 외형 - ‘액자’ (frame)

미술의 역사 만큼이나 액자의 역사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회화의 전시, 보존 등을 위한 보조적인 위치에서 출발한 액자는 사진의 등장과 기술의 발달 등으로 현재는 picture frame 만이 아니라 photo frame, d..

기억을 찾아가다 - 11

11. 정전 후의 체험들 Ⅱ - 수학여행 전쟁이 막바지로 갈 때쯤 해선 민간자동차도 많이 다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로 화물차가 많이 보였는데, 마산 부산 간에만 다니던 버스 숫자도 상당히 불어난 걸 느낄 수 있었다. ..

건축의 외형 - ‘계단’ (Staircase)

오늘은 이전 포스팅들 보다는 조금 더 인공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계단' 이라는 주제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계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어, 이미 BC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에서부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Ⅰ-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

건축의 외형 - ‘초승달’ (crescent)

달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나 종교와 연결지어서 생각되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뜨지 않는 삭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에 서양권 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여 new moon 이라고도 불리죠. 오늘은 이슬람의 ..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Ⅲ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

건축의 외형 - ‘삼각형’ (Triangle)

피라미드와 삼각형, 그게 그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입체도형과 평면도형 이라는 근본의 차이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접근 또는 적용 방식 또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삼각형 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확..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