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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5

15. 정전 후의 체험들 - 공군 요양소

 

우리 동네 대여섯 채의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던 집)들은 다 불하되어, 동네 사람들이 들어갔지만, '봉선각'은 그 얼안이 커서(500평은 되었을 듯) 동네 사람들은 엄두를 못 내었던 듯 한동안 비어 있었다.

<봉선각 / 1930년대 촬영>

 

그러다 시내의 누군가가 임대하여 영업을 했던지 한때 장구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시국이 시끄러워지고 팔룡산 꼭대기에 봉홧불이 오르고, 곧이어 전쟁이 나고 하면서 봉선각은 폐가로 되어갔고, 우리들도 거기 가길 꺼려했었다.

그래선지 내 어렸을 때 거기에 얼킨 이상한 얘기들 밤 되면 말 달리는 소리도 들리고, 여자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투의 괴담들 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곳이 부활한 건 공군 병원이 들어오면서다. 정전 직후부터 오륙년 동안 주둔했었는데, 주로 결핵환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공군 요양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의무병을 비롯해 사병들이 이삼십 명 있었던 것 같고, 장교는 군의관 외엔 준위 한 사람만 보았다.

부대 규모는 그래도 농촌 작은마을이라 그런지 이들의 존재감은 꽤있었다.

장기 복무자 대여섯 명은 동네 집들에 세 들어 살면서 병원 약들과 간단한 주사 등을 동네 아픈 사람들에게 주었고, 여러 친분을 통하여 다른 군용품들도 흘러 나왔다.

당시로선 참 귀했던 소화제나 다이아진, 소독용 알콜 등도 얻을 수 있었고, 디디티나 쥐약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침을 많이 했는데(백일해 후유증이라고 들었다) 우리 집이 공군 병원 바로 아래 있었기에 기침이 심할 때는 병원에 올라가 마이신 주사를 엉덩이에 맞고 오는 혜택도 입었었다.

맞을 때의 아픔과 주무르면서 내려올 때 엉덩이가 뻐근했던 기억이 난다.

의무병 박 하사는 동네 할머니에게 갈 때도 별 필요도 없는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녀 똥가방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고, 수송부 김석규 하사는 아무나 요청하면 잘 챙겨주어 나이도 좀 들었는데도 우리들까지도 안 듣게는 석규’ ‘석규하기도 했었다.

수송부에는 매일 아침 신마산으로 가는 중형차 한 대가 있었다. 차종 이름을 스리쿼터라 불렀는데, 거의 매일 같이 신마산으로 가서 부대 부식을 실어 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차가 얼마나 고물이었던지 발동이 제대로 걸리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군인들이 밀어서 발동을 걸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부터는 우리가 밀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후로는 거의 우리가 자임했다.

부대 앞에 예닐곱 명이 서 있다가 석규 씨가 차에 오르면 우리는 익숙한 협력으로 땀을 흘리며 스리쿼터를 밀어 아리랑 고개 위에 올려놓고는 모두 탄다.

차가 내려가 가속도가 붙으면 내리막이 다하는 지점쯤에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발동이 걸리는데, 그때부턴 전혀 고물 티가 없이 힘차게 달렸다.

석규 아저씨는 예의 그 청춘고백을 신나게 불러가며 자갈길을 널뛰듯이 달렸고, 떨어질세라 찻전을 꽉 붙잡으면서도 우리도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합포초등학교는 너무 가까워 아쉬웠고 마산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승차 재미에 더 빠졌었다. 그래서 하교 시에도 석규 스리쿼터가 지나가지 않는지를 살피러 종종 뒤를 돌아봐가면서 걷는 습관들도 생겼다.

어쩌다 타이밍이 맞아 몇 번 탄 일도 있긴 했었다. 언젠가는 수송부 텐트에서 석규 아저씨와 두세 명의 군인들을 모셔 놓고 연말 파티를 연 기억도 있다.

공군 부대에 대한 또 하나의 뚜렷한 기억이 있다. 천 상사 이야기다.

2 미터 가까이 됨직한 키에 쫙 벌어진 어깨와 가슴, 반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드러난 절굿대 같은 팔에 돌판 같은 손, 거기에 약간 거무스레한 빛이 도는 얼굴에(잘 생긴 편이었다) 반 곱슬머리였으니 그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들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만 했다. 거기다 당시론 드문 태권도 고단자라 했으니 더 그럴 만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간혹 나가는 외출 때는 여러 사병들이 그를 앞세우고 창동 남성동 거리를 활보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땐 주차장 깡패들도 슬슬 피했고, 진해 뿐 아니라 마산 시내까지 휘젓고 다니던 막사 해병들도 감히 시비 걸 엄두도 못 내었다는 이야기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신나게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 천 상사(천규덕)가 몇 년 후 한국 최고의 프로 레슬러까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레슬링이라는 용어도 몰랐으니까.

그는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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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구경한 일도 없다.

거기서 이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도 길을 가로지르는 어린내(어린천, 현 삼호천, 마산종합운동장 옆을끼고 내려오는 하천)’가 있어 다리가 놓였으나, 그건 양덕교보다 훨씬 뒤였고, 규모도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합포초등학교 1학년 때 간 팔룡산 소풍 길에서 어린천 징검다리를 선생님 도움 받아가며 건너던 영상이 어렴풋이 남아있기도 하다.

후에 놓인 다리의 모습도 내의 양쪽을 간단하게 이어놓은 형태라 할까. 그래서 다리가 파손 되었을 때에도 차도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길옆을 무너뜨려 만든 길로 냇바닥으로 다녔다.

큰 물 흐르는 날도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위 아래쪽의 제방들이 큰 공사한 흔적 없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되어있었다.

<70년대 어린교(위 사진 ; 70년대 초, 아래 사진 ; 70년대 말) / 사진 왼편에서 어린교로 뻗어나오는 도로는 현 마산고속버스터미널(75년 건립) 앞 도로>

 

그런 여건 때문에 어린교 이삼십 미터 아래쪽부터 바다 초입에 걸쳐(지금 삼각지 남단일대) ‘갈치막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갈치막이란 당시 산호동 봉암동 일대 사람들이 만든 조어로서, 갈치 배를 갈라 내장과 아가미는 젓갈로 만들고, 갈라진 몸통은 말려 건어물로 상품화시키는 작업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몇 집이 모여 했으니 전후의 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십 년대 후반에는 조그만 마을을 이룰 정도가 되어, 장마철에는 덜마른 생선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주위로 풍기곤 했었다.

<부산 감천마을에 있는 갈치건조장(갈치막)>

 

양덕교는 어린교 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다리였다.

지금의 양덕 오거리까지 매축지라고 앞에서 얘기했거니와,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만든 물길이 바다에 닿도록 돌로 쌓은 방죽이 있었는데, 동쪽 것은 청수들 둑으로 연결되고, 서쪽 것은 갈치막까지 나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지금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래서 밀물 때는 바닷물과 냇물이 합수되는지라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하천 폭을 넓혔기에 다리 길이가 긴 것은 이해되거니와, 높이가 왜 그렇게 높았던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제방보다 사오 미터 높아 보였으니 지금 다리보다 이삼 미터 혹은 삼사 미터 높게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거기 고개도 당시엔 꽤 높게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다리에 파손이 생긴 일이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바닥에 구멍이 생겨 거기로 아래 냇물을 신기한 느낌으로 본 것도 여러 번이요, 여기저기 금간 자국 때문에 아예 다리 아래로 가교를 놓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시공사를 욕했지만, 막연한 투덜거림일 뿐 회사명과 대표 이름 따위는 몰랐던 것 같았는데, 이용범이 창원에서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급격히 퍼졌던 것 같다.

대동공업사가 전쟁으로 떼돈을 벌었으며,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의 자금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는 다리 고장 때 마다용벰이 다리가 그렇지 뭐’ ‘시멘트는 다 빼돌리고 밀가루로 발랐으니등의 비아냥이 사람마다의 입에서 예사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오늘 인부들 시켜 다리 들고 있게 하고는 공사비 타내고, 내일 놓아버려도 또 공사비 다 타내니하는 등등의 우스갯말도 많이 오갔었다.

그런 야유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담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자유당 몰락 후 몇 년에 걸쳐 나왔던 기록물들을 통하여 확인했던 것이다.

창원 동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돈 벌어 와서 대동공업사를 세워 미국 막사 지어주고 잘 보여 전시 토건공사로 떼돈을 모아 집권 자유당 실권자 이기붕의 돈줄을 자임함으로써, 창원에서 돈 봉투와 고무신, 막걸리로 2선을 하고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까지 하다가 결국 혁혁한 코미디를 남겼다.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 투표에서 의 구분을 못해 반대로 찍음으로써 2/3 득표를 못한 자유당이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한국 정치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부를 남겨 놓은 것이다.

양덕교나 어린교 공사를 대동공업사가 한 것인지 확인된 바는 없었겠지만, 저간의 이런 저질적 정치행위로 하여, 부실공사에는 의례 용벰이다리딱지가 따라 다녔으리라.<<<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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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들의 신경질이 있었겠고, 지금도 매질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성격도 작용했던 것 같다.

여름이 가까웠을 때는 오동동 선창 끝머리에 있었던 어물창고로 갔다. 여기서의 두세 달은 지금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추억을 남긴 시간이었다.

이때 또 바뀌어 오신 선생님의 어진 품성도 그런 기억을 더 도왔다. 매일을 넘어 보통 하루 두세 번씩 교실 앞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4학년 때는 한두 명에 그쳤던 피난민 편입생이 그 해 갑자기 불어 이때엔 십여 명이 되었었는데 물놀이에서 우리들과는 좀 다른 이들의 양태를 보고 어린 마음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토박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물로 뛰어 들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수영복이란 걸 보여주었다. 우리는 장난으로 그 팬티를 벗기곤 했었지만 솔직하게는 좀 부러운 눈치들을 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는 다들 이러고 놀았죠,, ㅎㅎ>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친구는 평소 바다에 한사코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그 날은 친구들의 강권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수영팬티 윗줄을 꼭 잡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러나 장난 끼 많은 친구들이 그냥 둘리 없었다. 팬티를 잡아 내려버렸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는 매우 낭패스런 표정으로 주저앉더니 얼굴을 감싸고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팬티를 내리는 순간에 나도 얼핏 본 것도 같았으나 자세히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순둥이 친구의 낭패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라던 그 친구는 그때 이미 포경수술을 한 후였는데 포경이란 말조차도 모르던 우리들 눈엔 그 남근 모양이 우습고 충격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것으로 하여 꽤 오랫동안 친구들 놀림에 시달렸던 것 같다. 으레 이런 말도 곁들였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괴기”.

출신지역에 따라 억양 차이가 뚜렷했을 텐데, 그때 우리들 귀엔 다 비슷하게 들렸던 것 같다.

늦여름쯤, 전에 있었던 산호동으로 갔다가 늦가을에 우리는 본교로 돌아왔다. 본 교사는 징발된 그대로였으나 운동장 가운데를 철조망으로 막고 이쪽에 빙 둘러 판자 가교사를 교육당국이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운동장에서 뛰 수도 있었고, 철봉대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며 모래밭에서 뒹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학내 행사도 활성화됐다.

기름 먹인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교사에 반쪽짜리 운동장이었지만 그래도 야외나 창고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때부터 학교생활의 면모가 조금씩 갖추어져갔던 것 같다.

겨울엔 난로도 피울 수 있었다. 난로는 군부대에서 폐기한 드럼통을 잘라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땔감은 간혹 학년 전체가 팔룡산으로 가서 솔방울이나 삭정이를 주워 와서 교실 구석에 쌓아두고 사용했다. 또 등교 시에 두세 토막씩의 나무를 의무적으로 가지고 오게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임에도 입시경쟁이 상당히 의식되었었는데 여건상 준비를 못하다가 이때부터는 오후까지 수업을 했다.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식은 도시락을 데우기 위해 난로 밑자리잡기를 가위 바위 보로 정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밑자리 도시락만 데워지지만 밥시간 기다리며 모두 즐거웠죠,,  ㅎㅎ>

 

이때부터 정식 체육시간이 생겨 달리기 시합도 했고 철봉의 기본동작을 배우기도 했다. 높이뛰기나 넓이뛰기 요령도 설명 들었다.

그리고 비록 운동장은 좁고 학생은 많아 좀처럼 공에 발을 대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공 따라 다니다가 운 좋으면 한 번 차보는 재미도 맛보았다. 우리가 차고 놀았던 고무공은 군에서 나온 폐타이어를 녹여 재생한 고무로 만든다고 들었다.

소위 반공웅변대회란 행사도 이때부터 활성화되었던 것 같다.

반에서 뽑아 학교대회에서 입상하면 시 대회, 나아가 도 대회까지 진출시켰었는데, 피를 토하듯 한 열변이 아니면 등위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이런 대회의 성격상 봉암동, 양덕동 등의 촌아이들은 한 사람도 못 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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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3

3.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좌익과 피난

 

내 초등학교 일이학년 때 팔룡산 상사바위 근처나 불암사 근처 산먼뎅이들에 봉홧불이 올라 있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새벽에 한길에서 붉고 푸른 삐라들도 주워보았다.

 

<팔룡산 상사바위와 불암사 현재 모습>

<불암사는 일본인들이 자안지장(지장보살, 어린아이들의 수호 보살)을 모신 곳이었>

 

주로 어미니, , 누나들과 같이 보았는데, 나는 잘 몰랐지만 다들 걱정 섞인 말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동네 누구누구도 저기에 있을 것이란 말들도 들은 것 같다.

또 수원지 들머리 계곡들에서 좌익수 처형이 몇 번 있었고 계곡 물이 벌겋게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는 어른들의 수군거림도 형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수원지길쪽과 봉덕동쪽을 가르는 산등성이 일대에 백여 기 가까운 무덤들이 있었는데(그래서 우린 공동묘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과 연고 있는 무덤은 없었기네, 그 처형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짐작들을 동네 형들이 주고받는 것도 들었다.

훗날 팔룡산을 오르내리면서 건너다본 무덤들에 여우가 파헤친 흔적 같은 것이 유달리 많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묘들이 부실하게 급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고향으로 모시고 갈 수도, 인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으리라. 몇 년 전에 우연히 팔룡산을 오르다가 생각나 보았을 땐 무덤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경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우리 동네와 양덕동(역시 팔룡산 자락 동네)은 마산의 다른 동네들과 격리되었었다.

그해 칠월 말쯤 마산지역에도 소개령이 내려지자 양덕천 둑에는 이 내()를 무단으로 건너는 자는 총살형에 처함이라는 내용의 경고판이 세워졌었다고 들었다.

마산시민들 대부분은 최후방 지역인 웅천으로 보내면서 이 두 동네만 떼어서 낙동강 인근의 한림정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보도연맹사건은 소문으로 다 알려져 있었고, 여러 지역의 학살사건도 풍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더구나 우리 동네 사람들은 수원지 입구 골자기의 참상까지 목격하였던 터라 공포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었을 터였다.

시내에 약간의 척분만 있어도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도와 시내로 잠입하려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감행했었다. 그래서 얼추 주민 반 가까이나 동네를 빠져나갔다고 했다.

아버지의 넓은 친분 덕으로 열 명이 넘는 우리 가족들은 시내로 잠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짐은 곡식이었는데, 갓난아이였던 여동생만 제외하고 모든 가족들이 양껏 나누어 졌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 친구 네 분의 집에 분산 기식(호구조사 때문)하고 있다가 열흘쯤 후 마산선창에서 웅천행 피난선을 타고 웅천국민학교로 갔다.

 

<당시 웅천국민학교와 주변 마을, 왼쪽 기와건물은 옛 웅천현 객사>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텐트에서 숙식하거나 동네 집 한두 칸을 세내어 들었는데 우리 집은 역시 아버지의 친분으로 어느 마당 넓은 집의 방을 두개나 얻어 생활할 수 있었다. 곡식도 가져간 것 외에 수시로 배급이 나왔다.

그런데 후에 들어본 한림정의 피난생활은 우리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곡식배급은커녕 텐트나 간이화장실 같은 것도 없어 강 둔치나 모랫벌 등에서 짐승처럼 살았다고들 했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끝났기에 망정이지 길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들을 몇 번 들었다. 아니 낙동강 전선이 돌파 당했다면, 훗날 읽어본 노근리 학살 사건등과 대비시켜 보니 섬찟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귀향 때도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았지만 열차를 내어주어 진해 경화동 역에서 타고 올 수 있었는데 그쪽에선 모두 걸어왔다고 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마을로 돌아온 뒤에도 양쪽으로 간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는 말들을 들었다.

특히 같은 동네에 살았던 외삼촌은 꽤 오랜 동안 섭섭했던 감정을 씻을 수가 없었던 듯했다.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종종 오금을 걸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우리 대식구 숨기기에도 벅찼노라고 애원하듯 설명했으나 외삼촌의 감정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던 듯, 후에도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보였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도 흔쾌히 정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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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마산에 상수도가 생기다>

통합 창원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팔룡산의 명칭은 원래 반룡산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산의 명칭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 지역의 지명을 연구한 민긍기 교수는 대략 1980년대 전후, 그러니까 30여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지명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 글에서도 팔룡산이라 부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 산은 무학산과 함께 선재봉산(船材封山), 즉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산이었습니다. 마산포 해안가에 있던 전선소(戰船所)에서 무학산과 팔룡산의 재목으로 선박을 건조했던 겁니다. 두 산에 곧고 굵은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제는 마산부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1927년 5월 이 산의 정상부에 수원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30년 3월에 준공하였습니다. 수원지용 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가격 문제로 마산부와 창원군 창원면이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낮은 쪽만 막으면 간단히 저수지가 되는 조건을 이용한 겁니다.

 

 

이 수원지 공사는 1919년-1920년 동아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고 간 콜레라 대재앙 이후 근대식 식수정책을 모색하던 일제의 大건설사업이었습니다.

“근대도시는 콜레라에 의해 시작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근대식 도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라는 뜻이겠죠. 유럽의 유수한 도시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1920년대 중반 마산의 인구는 대략 22,000명 정도였고 그 중 일본인은 5천여 명이었습니다. 그 후 지속적인 인구 증가로 1930년경에는 2만5천명에 이르렀습니다. 마산의 상수도 시설은 도시위생제도 확립 외에 이와 같은 인구증가도 원인이었습니다. 

팔룡산수원지는 인구 6만명을 예상하고 건설하였지만, 초기에 계획된 급수인구는 16,000명으로 1인 1일 170리터, 1일 최대급수량 2,720㎥이었습니다. 급수방식은 저수지를 이용한 자연유하식(自然流下式)이었습니다.

하지만 1941년에 편찬된 『약진마산의 전모』에 의하면 이 수원지가 준공된 이후에는 급수호수 800호, 급수인원 4,000명 정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신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5천여명이 주 사용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용자가 적었던 초기에는 수량이 풍부한 마산지역의 자연조건을 호평하면서 적어도 1945년 경까지는 저수지의 수량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시설 등으로 30년대 후반부터 공업용수 대책을 모색해 오던 중 1940년에 찾아온 대기근으로 그 해 여름에는 저수지의 물이 한방울도 남김 없이 말라버려 큰 물난리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 수원지에 투입된 공사비는451,173엔, 공사는 1904년에 마산으로 이주해와 건설업을 하던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이 하였습니다. 저수된 물은 자산동 환주산의 정수장(현 마산박물관 일대)을 거쳐 시내에 공급되었습니다. 

東京土木學會가 1982년 펴낸 『日本土木史(大正元年-昭和15年)』에는 이 상수도 설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본 수도의 본원지는 부외(府外) 창원면 반룡산의 계곡에 설치된 저수지로서 댐은 석적(石積) 콘크리트조, 제방 높이 20.2m, 제방길이 73m, 유효 수심 15.5m, 수 면적 61,000㎡, 저수량 383,000㎥이다. 댐은 반원형의 취수탑을 가지고 있으며 상중하 3단의 취수구가 있어 이곳에서 부내(府內, 마산부내) 자산동 정수장까지 도수관(導水管) 주철관경 3,000mm, 연장6,100m를 부설하고 있다. 정수장에는 양수정과 침전지, 그리고 물의 흐름을 느리게 하는 완속지 및 배수지를 설치했다. 침전지는 철근콘크리트조 3조, 용량1,215㎥, 완속지는 2곳에서 546㎡를 통과하게 하고 염소멸균(鹽素滅菌)하여 배수지에 저류한다. 배수지는 철근콘크리트조 2곳 1,413㎥이다. 배수관은 주철관을 사용하고 있고 본 관경 300mm이하, 총 연장 22,407m로 되어있다」

이 기록을 통해 건설초기의 수원지 시설구조를 잘 알 수 있습니다만, 글 중 주철관경 3,000mm는 300mm의 오자인 듯합니다.

다음 그림은 이 글에서 연장 6,100m라고 표현된 수원지에서 정수장까지의 송수관이 표시된 도면입니다. 붉은 선이 도수관이며 정수장에는 양수정, 배수지, 침전지(?)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 아래의 현 위성사진과 비교해 보면 대략 도수관이 지나간 위치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노란색 점이 팔룡산 수원지, 연두색 점이 자산동 정수장 위치)

지금은 마산박물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자산동의 정수장이 준공되어 통수식을 할 때, 도지사와 진해요항사령부 사령관까지 참석하여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산동 이 터에는 준공을 기념해서 당시 마산부윤 판원지이(板垣只二 / 제5대부윤 / 1928.3-1930.10 재임)가 석각해 놓은 「水德無疆(수덕무강)」이라는 넉자와 그 글을 庚午春(경오춘/1930년 봄)에 새겼다는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한반도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로 알았던 일제관료의 확신과 힘센자의 너그러움까지 서려있는 글입니다.

이 수원지 만으로는 마산에 필요한 공업용수를 해결할 수 없어서 1938년 낙동간 취수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팔룡산 수원지는 해방 8년 후인 1953년 저수량을 늘이기 위해 둑을 높여 마산시민의 식수공급을 감당했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산업화 때문에 1970년대에 그 기능을 낙동강 취수장으로 넘겨준 후 팔룡산 수원지는 제 수명을 마쳤습니다. 지금은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산시민들에게 근대적인 상수도를 제공했던 이 수원지는 2005년 일제강점기가 남긴 중요 유산으로 인정되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199호'로 문화재청이 지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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