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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9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2. 세비야, 오페라와 축제의 도시

'세비야' 이미지

세비야는 오페라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카르멘'과 '피가로의 결혼'의 배경무대로 유명하다. 특히 카르멘에 등장하는 연초제조창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으며, 카르멘이 사랑한 남자 투우사가 활동하던 투우장도 아직도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플라멩고의 본 고장이기도 하며, 매년 '4월의 봄 축제'를 즐기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로 스페인에서 가장 정열적인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 중세풍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한 성당 주변가로

세비야의 역사

- 세비야 스페인 남부지역으로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마주보고 있으며, 또한 대서양에서 접근하기 용이한 내륙형 항구도시이다. 세비야 시내를 관통하는 베티스강을 통해 대서양 뿐만 아니라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지중해로 연결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일찌기 페니키아인 및 그리스인들과 교역을 위한 무역거래가 시작된 지역이기도 하다. 이후 로마제국의 통치령이 되었으며, 훗날 서고트 왕국의 지배기간 동안 세비야시의 대주교이자 카콜릭교의 아버지라 알려진 '성 이시도르'의 탄생한 도시이다.

이슬람 도시로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코르도바의 마지막 왕조가 멸망한 후, 소규모 왕국으로 난립하는 전국시대에 가장 번영을 누린 왕조가 세비야에서 3대째 계속된 아바스 왕조이다. 세비야는 1010년에서 1248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유적으로 알카사르 성채가 있으며, 이는 훗날 궁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함께 현재 행정구역상 안달루시아 주의 주도이며, 인구로는 스페인에서 4번째 도시에 해당된다.

● 세비야 성당 : 스페인의 역사는 8세기 이후부터 중세까지는 이슬람과 카톨릭간에 종교전쟁잰을 통해 이슬람과 카톨릭 왕조간 소왕국들의 군웅할거과정을 거쳐왔다. 대략은 8세기를 시작으로 이슬람 왕조가 득세를 하였으나 11세기경부터 본토사람들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인해 점차 카톨릭 왕조가 우위를 점하는 형국에서 결국 15세기 말에 카톨릭 왕조로 통일되면서 하나의 스페인이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 주출입구부분입니다. 굵기가 가는 기둥과 벽면에 섬세한 주름을 통해 평면적인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세비야 성당이 자리한 곳은 12세기 후반에 이슬람 사원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흔적은 광탑(미나렛)이 남아있다. 회교사원은 카톨릭왕의 점령이후 성당으로 사용되었으나, 1388년에 일어난 대 지진으로 인하여 폐허가 되었다.  이후인 140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506년에 완공된 것이 현재의 성당이다. 규모면에서 유럽에서 3번째 큰 성당이라고 한다. 가장 큰 성당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두번째는 영국의 세인트폴 성당이며, 세비야 성당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계 3대성당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성당의 내외부 형식은 중세의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복합되어 있다.  - 건물 상공에서본 지도입니다. 상단에 있는 오렌지정원, 그리고 성당은 라틴십자형태의 제대 모습이 뚜렷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우측 중앙부에 있는 것이 히랄다탑입니다.

- 종탑에서 본 오렌지정원입니다. 이러한 배치는 이슬람사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 고딕양식의 플라잉버터리스 벽 모습 : 중앙부의 높은 벽면의 측압을 지지하기 위해 걸쳐진 보와 기둥.

● 성당종탑(히랄다 탑) : 회교사원과 함께  상징적 랜드마크인 광탑(미나렛)인 '히랄다 탑'은1184년 건축되어 1198년 완성되었으며, 이것은 훗날 페르난도 3세 카톨릭 왕이 재정복했을 때 성당의 종탑으로 변경시켰으며, 1558년부터 1568년에 청동상과 함께 마무리 되었다. 탑의 전체 높이는 93.9미터로 25개의 종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과 카톨릭 두 종교의 전혀 다른 두가지 상징적 의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탑 내부는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로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당시 예배시간을 알리는 집사나 종치기가 당나귀를 타고 종탑 상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고 한다. 탑 정상부에서 보는 세비야의 시가지 전경이 볼만하다.

- 히랄다탑 : 스페인어로 바람개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탑의 몸통부분은 이슬람 미나렛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부에 종탑부분과 첨탑부분은 성당공사시 개조된 형태이다.

- 종탑 최상층부분의 종들- 종탑에서 바라본 세비야 전경 : 고층건물 찾아볼 수 없다.

- 도시의 이미지는 황색계통의 스페니쉬 기와와 하얀색의 벽면과 녹음 3가지 색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성당내부 : 내부에는 당시 중세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특히 세비야를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되찾은 영웅 산 페르난도왕의 비롯한 중세기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또한 세비야를 출발하여 미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유해가 성당내에 조각상에 의해 들어올려져 안치되어있다. 남미를 식민지로하여 제국을 형성할 수 있는 개척자의 시조로 높게 받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콜럼버스의 유해를 메고있는 가마지기 4사람은 스페인의 고 왕조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의 왕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사람 콜럼버스가 스페인에 와서 왕들을 상여꾼으로 둘 만큼 출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제대부분 천정은 주변보다 높게 장식되어 있다.

- 성당 제대부분은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막혀져 있다.

- 목조각에 의해 장식된 제대부분은 코르도바 성당과 유사하다.

- 바닥에 유해가 안치된 왕들을 소개하는 안내판

- 컬럼버스의 유해가 있는 관을 스페인 고 왕조 4명의 왕들의 들고 서있는 모습

성당주변 명소들 

- 카사노바와 더불어 탕아의 대명사인 '돈 주앙' 소재의 오페라 '돈 지오바니'를 창작한 여인숙이다. 모짜르트가 이 곳에서 창작을 하였다고 한다.

- 오페라 '돈 지오바니'의 작가 모짜르트가 묶은 오랜된 여관임을 알리는 안내문

- 현재는 도서관인 건물이나 돈 주앙이 마지막으로 사귄 간호사가 근무했던 병원이라고 가이드가 소개하였으나, 사실 여부는 글쎄이지만, 암튼 맞은편에 모짜르트가 작업한 여관이 있는 것을로 봐서는 그럴듯 함.

- 병원이였던 미술관과 여관사이에 있는 작은 공원

지금의 세비야 : '세비야'는 발음에 따라 '세빌리아'라고 달리 불리기도 한다. 특히 세비야는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오페라 제목에 의해 음악적인 도시, 오페라의 도시로 상징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투우가 유명한 곳, 집시들의 플라멩고가 유명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몇가지 도시의 이미지를 부각시켜서 활용하는 것이 도시의 축제이다. 4월의 봄 맞이 축제는 도시가 가진 문화적 콘텐츠를 마케팅하기 위한 행사라 볼 수 있다. 단순히 하나만 관광하기에는 아쉽지만, 이러한 몇가지 콘텐츠가 있다면 누군들 가 보고싶지 않으랴!

우리가 참조할 만한 것이 있다면, 역사가 오래지 않은 도시에서는 영화나 문학 속의 배경도시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부산은 그래서 영화제작에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문화예술인을 포용할 수 있는 도시가 좋은도시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새삼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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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1. 코르도바, 알 안달루스의 신부

정열의 나라. 스페인을 가다.

금번 여름휴가 때 스페인의 주요도시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읍니다.

스페인하면 연상되는 것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우선 투우의 나라, 그리고 열정적인 집시들의 춤사위인 플라멩고,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생각나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중세기사와 충성의 상징인 '엘시드' 라는 로드리고 장군도 생각날 것입니다.

예술가로는 천재화가 피카소,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 성가족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꼽을 수 있읍니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유럽의 축구명문가인 레알 마드리드 구단, 바르셀로나의 메시를 다들 기억할 것입니다. 특히 20세기 들어 36년간 군사 독재정치를 한 프랑코 역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이미지를 종합해 보건데, 유럽에 속하기는 하지만 유럽과 또 다른 에너지가 넘치는 반도적 기질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지정학적인 요인과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가 섭렵되어진 다양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의 소개는 지역별, 문화별로 나뉘어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이슬람도시부터 둘러보겠습니다.

● 스페인 속의 이슬람세계 :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는 이슬람교도 지배 하의 스페인은 세도시가 중심을 이루었다. 711년에서 1010년까지는 코르도바, 1010년부터 1248년까지는 세비야, 그리고 1248년에서 1492년까지는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문화가 꽃을 피웠다.

'알 안달루스의 신부' : 코르도바

- 안달루시아 : 코르도바는 스페인 남부 해안지역에 면해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이다. 안달루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북아프리카의모로코와 가장 근거리에 접한 지역으로 이슬람교도들이 북아프리카를 통해 이베리아반도(스페인)로 접근하기 좋은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안달루시아비방의 이름은 '알 안달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알 안달루스'는 '반달족이 건너온 곳'이라는 뜻의 '반달루스(vandalus)'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al)'은 아랍어 관사이다. 즉 안달루시아는 반달족이 건너온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 '알 안달루스의 신부' 라는 말은 코르도바의 아름다움을 두고 이슬람의 작가는 ‘알 안달루스의 신부’라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그녀는 모든 아름다움을 다 갖추고 있다. 왕후로서의 오랜 가계가 그녀의 영광된 관을 만들고 있다. 그녀의 목걸이는 시인이 언어의 바다에서 채취한 진주를 이어 놓은 것이며, 그녀의 이상은 학자들이 교모하게 짠 학문으로 지어져 있다.”

● 스페인 역사 :

- 기원전4500년경 동부연안에 최초의 집단부락이 출연, 이후 기원전 1천년경 아프리카에서 동부연안에 진출한 햄족 기원의 이베로족과 기원전 600년경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반도 중앙부와 서북부에 정착한 켈트족이 합쳐져셔 셀티베로족이라는 새로운 종족으로 변해 스페인의 직계조상

- 켈트족은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살았던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던 종족으로 매우 호전적인 종족으로 현재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지역에 아일랜드인과 유사

- 페니키아와 그리스인들(기원전11-3세기) : 기원전 11세기 무렵 이베리아반도 남부 연안에 카디스를 건설하여 식민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오늘날 베이루트 북쪽 20마일에에 있는 페니키아는 도매상의 교역로로 아프리카 북부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지역에 공장을 건설하여 방해한 해상교역망을 구축, 이후 카르타고의 번영으로 쇠토

- 카르타고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의 뒤를 이어 식민도시를 건설, 그 거점이 바르셀로나로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제국과 1세기 이상 치렀던 포에니 전쟁에서 패함으로 지중해 패권을 로마제국에 양도

- 이베로라는 말은 오늘날 에브로(Ebro)강의 옛 이름인 이베르 강지역에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기원전 1200년에서 서기 400년(로마제국 지배)까지 스페인의 많은 문명이 발달, 기원전 19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점령 이때 반도에 카톨릭과 라틴어가 도입

- 게르만족의 대이동(서고트족의 침입409년) : 북방인종으로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눈이 특징으로 원래 거주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지금의 북독일에 걸친 지역이다. 이들의 이동은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 족을 정복함으로써 376년 로마 영토안으로 이주, 476년 로마는 게르만족의 오토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엇으며 그로서 로마는 멸망

-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고트족은 전체 약 400만의 주민 중 10만명 정도로 세고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정된 지역에 거주했고, 나머지는 중요한 각 지방의 도시에 군대와 관리들만 주둔시켰다. 711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 이슬람교도의 반도 침입(711년) : 서고트의 왕 위티사가 710년 죽자 로드리고가 왕위에 오르자 아들의 추도세력은 북아프리카의 회교 통치자 무사에게 용병을 요청, 타리크를 보냈다. 그의 부대는 스페인 남부 코달레테 강가에서 싸워 이겼다. 이것이 이슬람교도들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북서쪽의 고산 지대를 제외하고 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 11세기부터 이슬람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이로 인해 카톨릭 왕국의 재정복(레콘키스타)이 달성되어 1492년 이슬람 왕국은 사라지고 카톨릭으로 통일된 강력한 국가가 형성

이슬람도시 코르도바의 탄생 :아랍 본토의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지배하던 '옴마아드' 왕조의 '압데라만 1세'가 바그다드를 거점으로 하는 '아바스 왕족'의 학살을 피신하여 칼리프령인 스페인에 피신해 있다가 새로운 독립 이슬람 왕국을 세웠다. 국호를 알 안달루스 (Al Andalus)라고 칭하고 도읍지로 결정괸 곳이 코르도바이다. '압데라만 2세'는 코르도바를 바그다드보다 훌륭한 도시로 만들려고 두 번에 걸쳐 증축한 대모스크의 1,200개나 되는 석조기둥에는 스페인을 거쳐간 지중해의 모든 문명(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비진틴)의 양식들이 표현되었다.

당시 유럽에는 인구 3만의 도시가 적었던 반면 코르도바 인구는 50만 이었으므로 당시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없었다. 압데라만 3세는 코르도바를 독립된 카리프로서 바그다드로부터 분리시켜 정치적 종속관계를 벗어나 알 안달루스 왕국은 독립적인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코르도바는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의 법률,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예술을 받아들였고, 유대교와 카톨릭 신학까지 연구했다.  코르도바의 멸망은 1031년 마지막 와인 힉셈3세가 사망함으로써 왕국의 동요와 반란이 일어나 한 군주가 통치하는 칼리프 왕국이 사리지고, 왕국은 주요 도시로 분활되어 각 도시마다 군주들이 난립하는 군웅할거 시대인 타이파(소왕국)왕욱 시대로 넘어갔다.(1036-1081) 이후 1085년에 이슬람교도의 핍박을 받던 톨레도가 카톨릭교도로 넘어가자 코르도바 왕국은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데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카톨릭교도들을 물리치지만 동시에 코르도바 왕국도 정복하는 바람에 안달루스의 신부 코르도바의 영광은 사라지고 말았다.

*코르도바(cordoba)는 페니키아어로 '풍요롭고 귀한도시'라는 뜻의 Kartuba에서 유래했다.

코르도바 대성당 : 대성당이라는  명칭은 현재에 사용되는 용도를 일컬어 사용하는 건물명이다. 당초 건립당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건립되어 모스크(Mosque)라고 부르며, 스페인어로 'Mezquita(매즈퀴타)'라고 사용되고 있다. 이 사원은 스페인에 남은 유일한 회교사원이며,세계에서 규모면으로 몇번째 해당되는 큰규모의 사원이다.

- 건물의 연혁은 786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규모는 22,400평방미터로 남북길이 175미터, 동서로 128미터의 규모로 동시에 2만5천명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되어있다.  평면의 구성은 사원과 중정(세정의 정원) 그리고 미나렛(Minaret, 광탑)으로 구성되어있다.

- 사원은 최초에 노랑색(9번)부분이었으나, 색상에 따라 증축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하단이 중정이며, 실내의 중앙부분이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만들어진 중앙예배당이다. (16,17,18번)

 - 종탑에 해당되는 미나렛은 하루 5번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탑기능을 하며 내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최초의 종탑은 소실되고 현재의 종탑은 47.5미터로 1617년 성당으로 용도변경되면서 새로이 건립된 것이다.- 현재의 종탑은 카톨릭성당으로 사용되면서 세원진 것이다. 중정 외곽에 설치된 회랑에 접해있다.

- 중정은 5개의 분수와 함께 올리브나무, 오렌지나무, 종려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등으로 장시되어있다. 중정 외곽으로는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행하는 수세의식을 위한 세례소가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카톨릭 성당으로 변경되어서 그러한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중정은 예배보러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정화공간이다.- 중정 외곽에 면한 회랑은 원래 세례소가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전시회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사원은 19개의 아케이브 주열로 형성되어 있다. 쉽게 표현하면 19칸의 기둥주령릉 형성하고 있으며, 매 칸은 상부 세모난 박공지붕으로 형성된 지붕으로 채광을 삼각형의 한면을 채광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붕은 톱날 지붕형태의 반복형태로 지어졌다.- 아치구조를 받치는 기둥이 하단에는 원기둥으로 마감하고 상부는 네모난 기둥으로 되어있다. 원기둥과 네모기둥의 접합부를 고대 로마시대에 기둥 상단을 장식하는 꽃잎문양으로 장신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기둥을 칼리프 기둥으로 불리면서 코르도바의 대표적 예술품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 당초 회교사원으로 사용될 당시의 지붕모습이다. 19개의 아치 상부 톱날 지붕의 단순한 형태로 마감되어있다.

- 카톨릭 대성당으로의 용도변경 :  1236년 성페르난도 3세에 의해 코르도바가 함락당하면서 회교사원은 '산타마리아 마드레 데 디오스'라는 대성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회교사원과 성당은 내부 기능이 다르므로 당시에는 이것을 해체시키고고 했으나 재차 협의를 한 결과, 주 제대와 성가대석의 십자가형 평면을 중앙부에 삽입하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그래한 형태로 나온 결과가 삼각형 박공형 평면의 중심에 우뚝 솟은 고딕식 지붕이 성당의 중심공간을 상징하는 형태로 변경되게 되었다.

- 그림의 지붕은 카톨릭 성당으로 용도변경하면서 중앙부에 제대와 예배석을 설치하면서 고딕식으로 장식하기 위해 높은 천장을 만들기 위해 지붕이 솟아 있으며, 주변부는 높은 벽면을 지지하기 위한 부축벽이다.

실내상세 설명- 여러차레 증축되는 과정에 시대별 다양한 아치의 장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건물을 거대한 고고학 박물관으로 여기고 있다.

- 내벽면에 아치로 통하는 감실을 '미르합'이라고 한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팔각형의 공간으로 아치 주변은 자연을 상징하는 식물모양과 주변에는 코란 경구를 금박으로 장식하고 있다.

- 성가대석에 조각은 중앙부에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양측에 시빈를 상징하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고행을 상징하는 막달라 말아가 조각되어있다. 조각은바로크를 대표하는 조각가 페드로에 의해 마호가니 나무로 제작되었다.- 회랑부분은 반원형 아치로 되어 있으며, 반대열은 얼룩무늬 2단 아치의 동일한 공간이 반복되고 있다.

사원 주변풍경

-사원주변은 유태인지역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비좁은 골목길에 조그만한 기념품 코너가로로 형성되있다.-벽면의 아기자기한 화분 장식들- 기념품티가 가지런히 정열된 모습- 주변광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네 노인들- 노천카페에서 강변을 바로보다.- 다리위에서 바라본 사원모습, 중앙의 돌출부분이 제대에 해당된다.

현재의 코르도바 -지붕의 중앙부 라틴크로스 부분이 제단 및 예배당으로 변경되었다.

- 코르도바는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서구의 콘스탄티노플', '서양속의 동양'이라고 불리웠던 이슬람 제국의 영화를 간직한 도시이다. 카톨릭교도에 의해 멸망한지 10세기가 지났지만, 회교도들이 남긴 건축술에 대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사원 실내에 도열한 얼룩무늬 아치에 남겨져 있는 회교도 장인들의 야무진 손맵시는 코란속의 경구를 실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톨릭 국가 스페인의 한켠에서 세계 여라나라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슬람교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예상했을 수도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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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