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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0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10. 바르셀로나와 천재건축가 가우디

● 유럽인과 예술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로 바르셀로나를 꼽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지중해성 연안의 기후로 인해 연중 햇살이 가득한 환경적인 조건이 큰 몫을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를 지중해의 수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조건과 함께 예술, 문화, 건축 등 풍요로운 생활여건을 들 수가 있읍니다. 또한 스포츠에서도 빠지지 않군요, 'FC 바르셀로나' 축구팀은 바르셀로나의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단면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보다도 바르셀로나를 더욱 역동적인 도시로 인상지어지는 이유는 20세기 천재들의 활동 거점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카소,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인 성가족 성당을  만든 천재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작품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심가로 현황 : 가운데 부정형 가로망에 의해 형성된 곳이 구시가지이며, 주변 외곽에 격자형으로 확산된 가로망은 1860년 도시계획에 의해 확장된 신시가지에 해당됩니다. 구.시가지에 폭넓게 사선으로 내려오는 녹지축이 그 유명한 람브라스 거리입니다.

스페인의 지중해안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도시로, 스페인 제2의 도시. 로마시대부터 발전한 항구로, 중세 아라곤 왕국시대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였다. 시내에는 산타 우라리 대성당 (14-15세기)을 중심으로 ‘고딕지구’가 있다. 지중해 연안 최대의 근대도시로서 근대미술 활동이 활발하며,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게르 공원, 카사 미라 등이 있고 또 피카소의 초기 작품을 모은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의 도시를 기원으로 하며, BC 3세기에 이 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시노(Barcino), 즉 바르카가(家)의 도시라고 명명하였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아직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가(Gothic街: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이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수공업·금융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으며, 14세기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19세기 말부터는 에스파냐의 사회주의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에스파냐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상사(商社)·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은 19세기까지 건물이 들어찼으며,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의 직교상(直交狀)의 시가는 1860년의 도시계획으로 건설된 신시가이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방적업)인데,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마드리드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강(江)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水力)으로 자동차·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틸랴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 카탈류냐 광장과 람브라스 가로 : 위에 사다리형태의 공원이 카탈류냐 광장이며, 아래 가로수에 의해 녹색띠를 형성한 것이 람브라스 가로입니다.

카턀류냐 광장 (Place de Catalunya) : 카탈류냐 광장은 최대의 번화가이자 관광객들의 출발지입니다. 광장에서 남측으로 뻗은 람블라스 거리와 그 주변이 구시가지이고, 북쪽은 그라이사 거리주변으로 신시가지에 해당됩니다. 광장 중심에 대형분수가 있과 주변에는 백화점, 쇼핑센터, 극장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광장 외곽에는 자전거 베이가 많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광장으로 갈 수 있는 지하도입구- 광장 주변 인도에서의 거리공연 : 인도의 너비가 10미터는 족히되어 보입니다.- 인도주변에 설치된 노천카페, 이또한 허가를 받고 주어진 시간에만 개장이 가능합니다.-인도폭이 넉넉하니까, 노천카페와 보도공간이 확보가능함.

람브라스 가로 (Las Ramblas) : 바르셀로나의 명물거리이자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번화가인 람브라스 가로는 아랍어로 '돌들의 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중세이전부터 바르셀로나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지중해가 시작되는 항구까지 1키로미터 정도 일직선으로 난 거리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의 물결, 인파의 열기를 몸소 느낄 수 있는 람브라스가로 시작점 - 가로는 양측에 일방향 편도정도의 차도가 있으며, 중앙부에 넓직한 보행로가 있어서 보행자 중심의 가로로 구성되어 있음. - 중앙부 보행로에 키큰 가로수가 조성되어 있어서 보행로에 풍부한 녹음을 제공해주고 있음. - 탈거리, 볼거리를 제공하는 마차

 - 잘 정비된 가로상점들- 여행의 잔재미를 제공하는 기념품샵 - 이동 및 철거가 용이한 키오스크 - 금강산도 식후경, 주전부리를 제공하는 노상점포

보케리아 재래시장(La Boqueria) :  람블라스 가로 시작점에서 남쪽으로 1백미터 정도 내려가다가, 우측에 보이는 곳이 재래시장 보케리아입니다.  바르셀로나 관광 최고의 명소로 꼽는 다고 합니다. 11세기 고기를 파는 장이 서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건물은 14세기 수도원성직자들이 사용한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보케리아는 카탈란어로 고기를 파는 광장이라는 뜻이며,  수도원이름을 그대로 따 산호세프시장으로보 불린다고 합니다.- 시장입구 : 중앙부에 큰 아케이드형 지붕에 내부 소점포들이 배치되어있는 모습- 말 그대로 입추에 여지없이 밀리는 관광객들- 소점포간에 나름대로 업종과 간판들이 잘 정비된 모습- 이 통로는 과일을 주로취급하는 곳

 - 깜찍하게 잘 정리된 매장전경들 : 말이 재래시장이지, 사실은 관광객들의 가벼운 쇼핑에 적합한 형태의 상품구성으로 사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

시내가로에서 본 가우디 작품들- 카사 바트요(Casa Batllo) : 당시 뼈로 만든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리모델링 당시 구조보강을 위해 뼈 모양을 기둥을 세우며 현재의 모습인 해골의 형태가나왔다고 하며, 외벽면의 유리모자잌 장식으로 화려함과 기괴함의 이미지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건물의 소유주가 우리가 즐겨먹는 방망이 사탕 '츄파춥스' 회사라고 합니다.- 카사 밀라(Casa Mila) : 카사 바트요의 후속작품으로 공동주택으로 당시 채석장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모세라트의 석산과의 영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유려하게 흐르는 곡선은 거대한 유기체의 모습으로 도심에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와 가우디 : 안토니오 가우디의 활동은 한 도시, 곧 바르셀로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습니다. 이 건축가가 1883년에 태어나 1926년에 생을 마감할 때 까지 개인 저택과 학교, 임대아파트, 공원, 성당 등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탄생시킨 곳이 카탈류냐의 수도 바르셀로나였기 때문입니다. 그 중 성가족성당은 가우디가 1883년부터 일한 곳으로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미완성으로 남아서 현재가지 공사중에 있습니다. 천재건축가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지만, 알고보면 천재라기 보다는 성직자처럼 헌신하는 구도자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음 편에 그의 삶과 성가족성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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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동추 2014.03.13 17: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아름다운 도시 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 삼식 2014.03.14 09:50 신고 address edit & del

      우리네 도시도 잘 가꾸면
      그 못지않게 될 것입니다.

  2. 메시 2014.11.06 17: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메시는 레알마드리드가 아니라 바르셀로나 소속입니다. 레알에는 호날두가 있고요

2014.01.29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7.마드리드, 피카소의 게르니카 vs 독재자 프랑코

'마드리드'는 몰라도 '레알마드리드'는 아시죠!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하면 어느나라의 어떤 도시라는 이미지보다 더 잘 알려져 있는것 같습니다. 스페인은 몰라도 그냥  유럽의 유명한 축구팀으로 더 알려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20세기를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독재자의 원조에 해당하는 독재자 프랑코(1935-1975년까지 스페인통치자)때문이라고 합니다.  1940년대 프랑코 통치 하의 스페인이 문화의 황무지 였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고 합니다. 체제에 대한 이념보다 보다 통속적인 문화를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스포츠, 영화, TV를 통해 관심을 돌리려 했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흥행몰이를 한 것이 축구였는데, 당시 1948년 빈곤한 스페인의 수도에 연고지를 둔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는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축구경기장을 건설하였으며, 축구는 스페인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최고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전통에 현재까지 이어져서 세계명문 축구팀으로 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재자 프랑코의 유일한 업적이랄 수 있을까요? 그 다음으로 마드리드를 상징 할 수 있는 것이 화가 고야와 피카소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저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품이 독재자 프랑코와 대조을 이루기에 충분히 상징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는 앞서 소개된 똘레도에서 1561년 옮겨진 수도입니다. 이 지역은 의외로 이슬람세력들이 9세기 후반부터 이슬람 영토의 북쪽을 지키기 위한 성채에서 비롯된 도시로, 마드리드라는 어원은 아랍어로 '물의 원천'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암튼 펠리세2세가 1561년 수도로 정한 후 450년 동안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해 온 곳입니다. 마드리드 관광에서 가장 손 꼽는 것이 세계 3대미술관 중 하나에 해당하는 프라도 미술관이라고 합니다. 서양미술에 그리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고야의  '마야부인'과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그림은 볼만한 그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드리드 가로의 특성 : -- 450년 된 마드리드 전경 : 좌측 녹지부분이 왕궁이며, 왕궁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체계로 이루어진 부분이 구시가지이며, 주변부에 직교형으로 도로망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곳이 신도시지역이다. 왕궁 후면에 남북으로 강이 흐르고 있으며, 왕궁 맞은편에 위치한 레트로 공원의 녹지가 도심의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허파역할을 하고있다.

- - 가로건물 상세 : 중심상업지 지붕모습입니다. 우리네 도시건물과 다른 2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붕이 모두 황토색기와, 다시 말해서 스페니쉬기와로 된 경사지붕이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가로변을 향한 건물간에 틈이 없이 합벽건축되어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남는 부분은 건물 내부에 형성된 조그마한 중정공간을 마련하였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똘레도에서 건물의 형태도 거의 같은 형태였었습니다. 이러한 도시건물 구축법은 필요없는 측면공지는 없애는 반면 건물내부에 쌈지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합벽을 짓는 과정에 주변건물과 높이 및 층수, 형태와 재료 등의 조화를 고려한다면 도심가로의 경관 개선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로 전경들- 스페인 수도이지만 인구는 350만, 녹지공원과 수공간 그리고 저층건물에 의한 저밀도의 도시공간

- 중심지 상가 건물의 규모도 5층 정도이며, 저층상가와 상층부 주거공간으로 중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 Plaza de Tolos(투우경기장) : 지금은 투우를 볼 수 없다고 함. 동물보호단체의 요청에 의해 조례로 투우경기를 금지한다고 합니다. 뭔 용도로 쓰는지?

-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 : 스페인 대문호 세르반테스가 탑앞에 앉아있으며, 그 앞에 그의 분신 조각상이 있다.

- 세르반테스의 아바타인 돈키호테아 산초판사의 조각상

- 프라도 미술관의 대표작가에 해당되는 고야의 조각상 : 미술관 주변에 서서, 자신의 작품을 보러온 관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

- 프라도 미술관 입구 : 소장품 3만점에 전시작품수 3천점으로 규모에 악! , 우리는 고야 작품위주로 보고 나왔슴.

- 뭘부터 볼까? : 봐야 할 그림, 그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봐야할 듯***

- 결국은 도록 보면서 길찾기 : 다행히 조예가 있는 가이드(조르디 허)선생의 미술지식 만큼 듣고, 느끼고 왔습니다.

- '게르니카'는 보지 못했습니다. : 왜냐하면 그 그림이 있는 '소피아 미술관'에는 갈 여행일정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알아왔답니다. 본 글 초장에서 언급한 독재자 프랑코와 독일군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하여 피카소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작품인 '게르나카'는 전시후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본인을 고발한 그림을 받아줄리 만무했겠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게르니카'는 스페인이 민주화가 되었을 때 돌려받기로 하고 뉴욕 박물관에 기증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독재자 프랑코 사후 6년이 지난후 1981년에 지금의 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44년만에 돌아온 이 그림의 의미, 그냥 한 폭의 그림의 아니라 독재에 항거한 역사의 증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마드리드의 이미지는 민주화를 상징하는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소유한 도시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게르니카 : 블로그 아가타(cho3sister) 에서

1936년 스페인내전을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획득한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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