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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 이용

1)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마산 도시 현황

각종 문헌에서 마산의 도시 현황을 소개하는 글귀의 일편을 종합하는 방법으로서 추상적인 분석이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은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하여 인용하도록 합니다. 

 

『韓國 案內』 香月源太郞, 1902年, 東京 靑木嵩山堂

市街(p.311)

각국거류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거의가 일본인이고 가끔 중국인, 러시아인, 독일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류지 남쪽 모퉁이 쪽의 러시아 영사관 부근에 살고 있다. 거류지의 총 호수는 50호에 불과하고 가옥도 조밀하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로서 간신히 처마를 이어서 시가의 모양을 갖춘 것이 10여 호 뿐이다. 참으로 느리긴 하지만 발전하는 모습은 보인다.

도로는 근래 새롭게 개설하기 시작했다. 도로의 폭은 3間(1間은 1.8m)에서 8間이고 남북이 길어 거의 20여丁(町, 109.1m)에 이르고 동서는 좁아 7-8丁에 불과하며 舊 馬山浦와의 교통이 빈번하여 상거래가 점점 발달할 기미를 보인다.

舊 馬山浦(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昌原街道에 있고 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戶數는 2,000여戶이며 監理署(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韓國新地理』 田淵友彦, 1908년, p.254, 博文館

韓人家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정(町)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韓國總覽』 德永勳美, 1908년, pp.58-59, 아세아문화사

․․․․마산만에 위치한 구 월영대 부근에 면적 15여 만평에 도로가 종횡으로 관통하고 있고 시가가 정연하고․․․․

한인가는 각국거류지에서 20정 거리의 구마산포에 있고 시가는 창원가도에 면하여 마산만의 북쪽 중앙에 있으며 인가는 2,000여 호이다. 

『馬山と鎭海灣』 平井斌夫․九貫政二, 1911년, p.3, 濱田新聞店

․․․․․신마산과 구마산 사이는 20町(1정은 109.1m, 60간)이며 구마산은 창원가도에 위치, 인가가 즐비하게 남북으로 연하여 조밀하고 해안을 따라 조선인 상가들이 늘어서 있음, 일인도 혼재, 선박화물의 집결과 흥성함이 극을 이룸, 신마산과 구마산의 사이에는 광대한 철도와 군용지가 놓여있음, 두 시가 곧 연결될 것으로 보임,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경부철도 마산선은 군의 서부를 관통하고 정차장 세 개가 있는 것 외에 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도로로 각지에 통하고 특히 마산 진주간 및 창원간은 길이 좋아 교통이 편리하다.

․․․․․시가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最新朝鮮地誌』 日韓書房編輯部, 1912년, p.444, 日韓書房

․․․․․도로는 근래 현저하게 개량되었다. 부근 내륙과의 교통은 도착하는 곳에 차와 말이 연결된다. 또 가까운 마산 진주간 중심가로가 개수되고 있고 교통은 새로운 면을 열어가고 있다. 

『新朝鮮全誌』 南宮濬, 1913년, p.146, 唯一書館

․․․․․市街는 신구 두 도시로 나누어져 신마산은 일본인이, 구마산은 주로 조선인의 부락이며 또 그 북쪽에 昌原舊邑이 있으니 모두 상업의 요충지이다. 

『最新朝鮮地誌(中)』 朝鮮 및 滿洲社, 1918년, p.19, 朝鮮 및 滿洲社出版部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여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며․․․․․ 개항 후 거류지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의 상가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朝鮮鐵道旅行便覽』 朝鮮總督府, 1923년, p.10, 조선인쇄주식회사(경성)

․․․․․구마산은 상업이 발달해 있으며 신마산 쪽은 많은 일본인들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특히 서쪽의 구 외국인 거류지였던 곳은 순 주택지로 사용되고 있다. 무학산을 배경으로 하여 진해만을 앞에 두고 경사가 완만한 시내에 시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업이 매우 번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1911년에 군사요충지로서 개항을 폐쇄한 이후부터 약간 침체된 상태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인구도 늘지 않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진주로 가는 경남선이 군북까지 만 개통되어 있는데 장래에는 한 번 더 성황을 이룰 것으로 본다. 

『馬山港誌』 諏方史郞, 1926년, pp.74-81, 朝鮮史談會

천엽촌(千葉村)이라는 것은․․․․․1905년 봄 40여 호의 어가단(漁家團)이 오고 하나의 어촌을 구성하여 이 속칭을 불렀다.(p.81)

1905년 11월 마산선 철도를 개방하고 일반 공중의 편리를 자유롭게 하면서부터 이주자는 갑자기 격증하고 특히 1906년 봄이 오면서 거류지, 마산포 및 그 중앙부에 모두 건축공사가 크게 일어나서 일본인의 여관은 한 집도 빈 곳이 없다. 한인 객사에도 4-5인의 일본인이 섞여 숙박하는 등․․․․․(p.74)

1906년 대곡하(大谷河)에 걸쳐 놓은 반룡교 서남 모퉁이에는 복옥(福屋)이라 이르는 음식점만 있었지만 북측으로는 요정․양복점 등 가게가 여러 채있었으며 망월루 서쪽 즉, 홍문동․청계동․월남동3가와 4가, 이사청에서 세관에 이르는 도로에는 상가가 즐비하여 마산의 긴자(銀座)거리라 불렀다(p.75)

․․․․․ 마산포 방면은 韓人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으며․․․․․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와 좋은 가옥이 많고 군인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대부분이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곳 관계자의 주택이 많이 있는데 중앙부 중 일부 신마산에 접한 곳은 商況이 오히려 신마산을 능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앙부 대부분은 철도용지를 빌린 전답들이다(p.3)

․․․․․장군교 부근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중앙동에 이르는 가로는 1906년 초겨울에 개통되어 당시 거류지인 마산포의 유일한 연락도로가 되었고 1910년에 마산, 진주 간 일등도로가 마산 역전까지 개통을 보게 되면서 두 개의 길을 얻어 척산교에서 서로 만나 한 도로가 되어 마산포로 들어가게 되었다(pp.202-203)

마산부청이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것은 반드시 府治를 건전히 발달시키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이 이전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治者의 생각인데 府民의 입장에서는 과연 어떠한지․․․․․․․․

․․․․․․형무지소 소재는 옛날 논밭이었던 한가로운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큰 가로에 접하여 상점이 즐비하고 크게 발한 지역이 되었다(pp.222-223) 

 

『朝鮮と建築』 朝鮮建築會, 1929년 3월호, p.39

현 마산의 시가는 바다에 면한 무학산록 일대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으로 길어 마치 띠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산부청의 위치는 남방 신마산의 구석에 치우쳐 있음과 동시에 약간 높은 언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구마산 방면은 매우 불편을 느끼고 있다. ․․․․․ 부청이전문제가 대두하여 그 위치를 중앙부에 선정한다는 것은 부민의 편리에는 이 이상 좋은 일은 없고 나아가 시가의 발전에도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이라․․․․․․․․ 

『馬山現勢錄』 長田 純․高須瑪公, 1929년, p.156, 馬山現勢錄刊行部

마산의 市街區 구성은 종래 新舊 兩 마산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연스런 市街區의 연결이 좋지 않았다. 마산 발전의 암과 같았던 중앙 마산의 耕地(철도용지)가 府에 불하되어․․․․․․

이 中央馬山市街區 構成과 관련해서는 뭐니뭐니해도 中央馬山地先의 공유수면 매축사업을 간과할 수 없다․․․․본 사업의 완성은 더욱 마산항 발전의 기폭제를 이루는 것으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표기한 연도는 당 내용이 실린 문헌의 발간연도이므로 시기를 너무 제한적으로 받아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신마산과 중앙마산 지역〉

1902년. 조계지 건설 초기, 건축물은 조계지의 최남단인 현재의 월남동 5가와 월남동 4가의 최남단, 즉 현재의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에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1902년. 초기 조계지 건설규모는 남북으로 2㎞, 동서로 약 0.8㎞ 정도의 규모였다.

1906년. 율구미에 일본인 어촌이 형성되었다.

1906년. 전 창원군청(현 경남대학교 대학원) 아래의 홍문동, 청계동, 월남동3․4가 일대가 「마산의 긴자(銀座)」로 까지 불릴 정도로 번화하였다.

1906년. 중앙중심가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진주가도(현 크리스탈호텔 앞 도로)를 이용해 원마산과 신마산이 연결되었다.

1908년. 합방 직전, 조계지에는 격자형의 도로가 정연하게 개설되어 있었다.

1911년. 시가(두월동 가로로 추정됨)는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상점이 즐비했다.

1923년. 조계지의 서쪽 경사지는 대부분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었고 상가는 평지인 중심가로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폐항 이후부터는 도시가 정체되었다.

1926년. 신마산의 남쪽(조계지방향)에는 고급주택이 많았으며 북쪽(중앙마산방면)에는 관아․종교시설․교육시설이 많았다.

1926년. 철도용지 때문에 도시발전에 지장이 많았고 관공서 건물이 부(府)의 최남단에 위치한 것에 대한 부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중앙마산 개발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29년. 중앙마산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원마산 지역〉

1902년. 원마산의 인가(人家)는 조밀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상점도 많았는데 특히 창원가도 주변이 번화했고 해변도로변에는 어업과 관련한 상권이 발달하였다.

1911년. 일본인들의 상점이 진출하면서 거리의 외관이 더 번화해졌다.

1918년. 도로는 협소했으나 상업은 발달하였다.

1926년. 교도소 부근(현․삼성생명 빌딩 일대)지역도 상점이 많이 들어선 거리로 변했다. 

이와 같은 문헌의 일편으로 도시의 토지이용 현황을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많고 또한 소개한 문헌의 저자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용이 신마산에 지우쳐 있어서 시기와 내용면에서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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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새고기 값이 가장 쌌던 마산포>

-마산포부근 지도-
1902년 / 향월원태랑 / 동경 청목숭산당 / / 한국안내 제8편 마산포안내 / 서울대중앙도서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 지도가 실려있는  책『한국안내』는 일본인이 편찬한 마산관련 문헌 중 최초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책의 부록에 첨부된 것이라 상세하지는 않습니다만 개항 초기 마산만 주변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에는「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20세기 초 마산포를 먹으려 혈안이었던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을 짐작케 해줍니다.

도시지역에 대한 상세한 표기는 없고, 각국거류지와 마산포와 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것임) 등 일본인들이 관심가질만한 곳들만 간략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산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는 팔용산 아래 봉암동을 거쳐 현재의 봉암교(당시는 다리가 없었음) 부근을 통과하여 진해 쪽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이 도로는 양덕동 부근에서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의 창원공업단지 일부가 바다였다는 것도 이 지도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도 상부에 별도로「馬山浦各國居留地市街圖」란 제목의 조계지(신마산) 도면이 별도로 그려져있습니다. 꽃이 만개한 모양의 확대지도입니다.



여기에는 조계지 내에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조성된 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북쪽 일부 도로, 즉 예전의 마산극장 부근에 있는 도로가 매립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관장관택(海關長官宅)과 우편국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습니다. 해관장 사택은 현 제일여고 부지로 신사로 이용됩니다.

이 지도가 실려있는  『한국안내』에는 20세기 벽두 마산상황이 자세히 실려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 하나 소개합니다.

책 마지막 부분에 '명소고적(名所古跡)'이라 하여 당시 마산에서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는데, 제일 끝에 '유렵지(遊獵地)'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마산부근 일대는 조류가 많아 겨울에 총을 지니고 해안을 따라서 돌아다니면 총 한발에 새 열 마리 이상 잡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날짐승 고기가 가장 싼 곳이 마산으로 오리 한 마리에 12전이라고 한다)"

이 지도가 그려질 즈음,
개발이 있기 전인 그 때 이 도시의 해안은 전부 갈대밭이었으니 당연히 새들도 많았겠죠.
새가 얼마나 많았으면 새고기 값이 전국에서 가장 낮았을까요. 

철새 때가 하늘 높이 날아 다니는 아름다웠던 마산의 해안,,,
콘크리트 호안으로 둘러싸인 지금, 옛날의 그 광경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위 지도 위치의 현재 모습을 위성사진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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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택 2010.12.20 07: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 귀한 자료를 어디서 구했습니까?
    참 재주도 용하십니다.
    그나 저나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지역사 사람들 망연회나 한 번 해야되는 게 아닐까요?
    연말 잘 보내세요.

    • 허정도 2010.12.20 08:3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선생님.
      남 교수 한테 연락해보겠습니다.

2010.11.0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개항직후 마산의 산업>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마산에도 근대산업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역이 본격화되었고, 금융업과 건설업이 선을 보였습니다.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장유업도 이 때 시작되었습니다.

○ 항만

『110년 전인 1900년, 마산항의 무역량은 수입 154,765엔, 수출 87,024엔으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쌀․콩․동광(銅鑛)․사금(砂金)․소가죽․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방적사(紡績絲)․옥양목․석유․솜․명태․누룩․성냥․철제품 등 생활용품이 마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 중 일부 수입품은 칠원․진주 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상인들까지 마산포에 와서 일본에서 수입한 소비품들을 사갔다』

이 글은 1902년 일본인 향월원태랑(香月源太郞)이 1발간한 『한국안내』에 실린 기록입니다. 『한국안내』는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마산포에 대해서는 열다섯 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소비제품들은 마산포를 통해 한반도 내륙 깊숙이 공급되어 1908년경에는 전라도는 물론 멀리 충청도까지 판로가 아주 넓었습니다.

1910년에 들어서도 마산항은 수출액이 158,834,000엔인데 비해 수입액이 566,869,000엔으로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항구였습니다.

이 시기의 수출은 주로 웅천․칠원․진해․영산․함안․창원․의령․김해․덕산․거제․사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의 大阪과 兵庫․중국의 대련․국내의 부산과 염포(울산에 있었던 포구) 등지로 내 보냈습니다.

이 때도 수입품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소모품이었는데 수입품 중 1/3이 동경, 2/3가 오사카 제품이었으며 그것도 효능 위주의 필수품이 아닌 양산․모자․가방․넥타이와 면포․면사․솥․성냥 등 사치성 고급소모품과 고급 생활필수품 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마산항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으로 내보내고 일본에서 생산된 소비품을 수입하는 항구였던 겁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수출입 창구였던 마산세관 뱃머리입니다. 1910년 사진입니다.



○ 금융업

러일전쟁
승전 후 한국에서 유리한 지위에 선 일본은 종전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까지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화폐개혁․금융제도, 재정정리, 교통운수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이런 정책 기조 속에서 마산에서도 일본인들에 의한 금융업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878년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이 한국 땅에 들어 온 외국 금융업의 최초였습니다만 마산에는 그로부터 27년 후인 1905년 12월 25일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개설되었습니다.
마산포에 있던 제일은행 마산출장소는 1907년 현 월남동 성당 자리로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다음 사진이 1907년 신축 이전 기념사진입니다.


이 건물은 1960년대 중반에 현재의 성당이 거립되면서 철거되었지만 사진 속에 서있는 일본인들이 밟고 섰던 현관입구의 계단석은 성당 마당 한쪽에 보존되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현 성당 건립 때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께서 선물한 종을 안치하기 위한 기념물을 만들면서 그 계단석을 땅에 묻어버렸다고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보존해왔던 의미있는 계단석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아래 사진이 성당 마당 한 켠에 있는 기념물입니다. 이 탑 아래에 계단석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성당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 밑 보호석입니다. 원래 은행건물의 화단석으로 유일한 흔적입니다.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외에 진주농공은행 마산출장소, 마산금융주식회사, 창원지방금융조합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사채업자도 약 20명 있었으며 전당포 10여개소가 영업을 시작하였고 보험업도 번성하여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개설한 보험회사가 11개소나 되었습니다.

모든 금융기관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금융조합은 한국인이 조합장을 맡았으나 중요 업무는 역시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사채업자와 전당업자도 전부 일본인이었으며 영업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이율이 월 2.3%에서 7%의 고리였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빌려 썼습니다.

○ 양조업 및 기타

일제시대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산의 대표적 산업인 양조업은 1904년 1월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에 의해 세워진 아즈마(東)양조장이 효시였습니다.
무학소주와 몽고간장으로 그 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마산의 양조업이 드디어 마산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05
년 창업한 석교(石橋)주조장입니다. 사진의 공장건물은 1914년에 지었으며 서성동에 있었습니다
.

 
일본인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신마산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건설관련업체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해 1910년경에는 17명의 토목건축청부업자가 있었습니다.
전문건설업체도 많아 1909년에는 미장업 35명, 목공업 40명의 회원들이 조합을 구성할 정도로 건설관련 종사자가 많았습니다.
이 시기 거류지에는 주택임대업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확대되어 가는 마산의 산업 및 상권을 주도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상품판매를 기업화시키는 일환으로 마산청과물시장과 같은 대규모 채소매장을 1910년 9월에 열었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10개의 목재상과 13개의 석유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재상들은 모두 신마산에 자리잡은 데 반해 13개 석유상들 중 11개가 원마산(마산포)에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해안에 정박하는 선박의 양과 생활필수품의 판매량이 신마산에 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상업에 비해 공업부분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는데 1911년까지 정미소 6개와 소규모 비누공장과 철물공장이 각 1개씩 있었습니다.

이 외에 근대적인 주식회사 형식으로 1905년 마산수산주식회사가 창포동 3가에 설립되어 일본인들을 상대로 활어 위판업을 시작했으며 1906년에는 사(私)금융업체인 마산금융주식회사가, 1908년에는 마산곡물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개항 후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일본인들이 마산에 세운 공장들입니다.<<<

업종

상호

대표자

소재지

설립일

자본(원)

 청주양조업

東양조장

 東忠勇

 

 1904. 1

 

石橋주조장

 石橋市太郞

서성동

 1905. 10

 12,000

五反田주조장

 五反田富次郞

장군동

 1906. 10

10,000

水式주조장

 水式富次郞

청계동

 1906. 11

 10,000

西田주조장

 西田嘉惣市

홍문동

 1907. 11

 20,000

岡田주조장

  岡田玉吉

상남동

 1908. 9

  12,000

千鳥園주조장

 遠藤豊吉

장군동

 1909. 10

 15,000

 장유양조업

赤門장유양조장

 管式夫

신창동

 1906. 11

 10,000

 정미업

夏目정미소

 夏目哲三

남성동

 1907. 5

 10,000

松原정미소

 松原甲藏

남성동

 1910. 8

 20,000

 기타

上野제면소

 上野玄一

추산동

 1910. 7

  5,000

마산철공소

 松本多藏

월포동

 1907. 3

 10,000

瀨川하차공장

 瀨川渚之助

상남동

 1908. 4

   3,500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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