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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9 00:00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일본국민 대다수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만난 더글러스 러미스(C. Douglas Lummis) 교수의 말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는 '오키나와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그 시선을 통해 세계평화의 길을 찾는 미국인 정치사상학자이자 평화운동가'입니다.

오키나와-일본-미국, 다시 돌아와 한반도-중국-동아시아에 이르기 까지 그의 지식은 넓고 깊었으며 그의 자세는 진지했고 겸손했습니다.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한 1920년대 일본지도를 보여주고 있는 러미스 교수>

두 시간의 강연과 뒤풀이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았던 말 중, 내 귀를 가장 진하게 울렸던 것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섬에 머무는 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이 읽는 신문을 살펴봤습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어디를 가나 한국의 조중동처럼 눈에 띄었던 ‘아요마’(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요마’ 대신 오키나와의 두 신문 「류큐신보(琉球新報)」와「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식당, 호텔로비, 주점, 공항에서까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미군정 시기였던 1948년 창간되었고,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9세기 말인 1893년 창간된 오키나와 최초의 신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정부발행 「한성순보」창간이 1883년이고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창간이 1896년인데, 작은 섬 오키나와의 민간발행 「류큐신보(琉球新報)」가 1893년 창간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거기에다 12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제호도 바꾸지 않고 발간되고 있어서 더 놀랐습니다.

                                     <류큐신보와 오키나와 타임즈>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두 신문 모두 1면에는 전국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고 나머지 모든 면은 우리처럼 지역기사였습니다.
순간 '웬 전국소식?'하고 의아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요마’를 읽지 않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당연한 편집이었습니다.

조중동 중 하나를 반드시 읽는 우리에게는 지역소식만 있더라도 아무 문제없지만 러미스 교수의 말처럼 이곳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만 보니 전국소식을 지역신문이 다루는 건 당연했을 터입니다.

지역관련기사들도 우리와 사뭇 달랐습니다.
미군철수니 오키나와 정체성회복이니 하는 소위 오키나와평화운동의 동력이 지역신문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지면 곳곳에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제사회와 오키나와의 관계 등에 관한 기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본토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오키나와평화문제에 대한 기사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예민한 반응이었는지 몰라도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오키나와가 진정 오키나와다워지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이 신문활자 한자 한자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역사문화안내단체의 회원인 히카료코 씨가 태평양전쟁 때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동굴 앞에서 전쟁의 참상을 설명하던 도중, 일본정부의 오키나와 전쟁 왜곡의도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집회를 보도한 류큐신보 호외판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은 정부입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


<
오키나와 전쟁 60주년이던 지난 2005년에 류큐신보는 「오키나와 전쟁신문(沖繩戰新聞)」이라는 특집을 발간하였다. 사진은 2005년 4월1일자 특집7호 신문 1면.
신문의
왼쪽 상부에 오키나와 전쟁 60년 -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정보와 시점에서 구성이라는 제작의도가 밝혀져있고  그 곁에제7호-1945년 소화(昭和)20년 4월1일 일요일」이라고 적혀있다. 기사 큰 제목은 '본 섬에 미군상륙' 작은 제목은 '병력18만3천명 투입' '일본군 반격않고 각지에서 집단사'라고 적혀있으며 사진은 '미군상륙장면'을 사용하였다.
1945년 4월 1일은
미군이 오키나와에 최초로 상륙했던 날로, 참혹했던 오키나와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
>


지난 달, 합포문화동인회가 주최한 김두관 도지사 초청 강연에서 김 지사는 “옛날 제가 대학 갈 때만 해도 부산대학과 경북대학이 상당한 명문이었습니다만 요즈음은 서울의 대부분 사립대학보다 입학이 쉽다고 들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지방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참석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습니다.
어디 참석자뿐이겠습니까. 서울사람을 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생각일 겁니다.

그 동안 수도권은 마치 아귀처럼 지역을 삼켰습니다. 수도권 빨대현상을 생각하면 정말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한국의 서울집중현상에는 언론이 능동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제대로된 지역소식은 다룰 수도 없고 다루지도 않으면서 전 국민을 지배하고 있는 신문이 더욱 그렇습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신문의 중앙집중현상(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집중현상)은 중앙과 지방의 격차를 점점 더 넓힐 뿐만 아니라 지역을 피폐화시키는 원인이기도합니다.

오죽 심했으면 부산일보 모 논설주간이 서울언론의 태도를 두고 “지역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지역민의 자존심까지 상습적으로 추행 당하게 될 것”이라 경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전국지라 부르는 서울지는 공짜 신문에다 자전거, 가전제품, 심지어 현금까지 뿌려대며 독자를 사들이는 통에 돈이 없는 지역신문들의 위축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경남도민일보 사장으로 근무하던 2006년 경, 우리나라 지역신문 구독률은 평균 6%를 밑돌았습니다.
그나마 경남지역은 16%대로 타 지역에 비해 많이 높은 편이었지만 충청 호남 강원지역은 3-6%에 그쳤고 경기지역은 1%정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은 93%, 프랑스가 73%, 영국이 67% 정도를 지방지가 차지했으니 우리나라의 신문시장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잘 비교되실 겁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최근 경상남도에서는 ‘지역신문발전을 위한 지원 조례’도 만들고 위원회까지 구성했습니다만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주민들의 자발적 관심이 없으면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보는 생각입니다.
오키나와주민에게 배우는 건 어떨까요.
설령 정보량과 편집과 서비스가 조금 미흡하다하더라도, 우리자신이 우리 문제와 우리 사정을 잘 알아야 우리다워지고, 그래야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지역 언론 사랑하기, 어떻습니까?

몸은 지방에 있으면서,
아침마다 서울시내 출근길 도로사정 TV방송을 보고, 화장실에 앉아 여의도 소식만 담긴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점심 먹으며 되새김질하고, 밤에는 강남 부자이야기 연속극을 보며 살아가는데, 지방의 정체성과 자생력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관심한데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겠습니까.


“일본국민 대다수는 요미우리 마이니찌 아사히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의 작은 미술관에서 들었던 벽안의 노(老) 교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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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11.02.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0.04.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마산인근을 ‘합포(合浦)’라 부르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행정체계를 주-군-현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진주와 양산이 9주(州)에 포함된 도시입니다.
당시 진주는 뒷날 강주(康州)가 되는 청주(菁州)로, 양산은 뒷날 양주(良州)가 되는 삽량주(歃良州)라고 불렀습니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는 12개 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굴자군(屈自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굴자군(屈自郡)에는 칠토(柒土-칠원)․골포(骨浦-마산)․웅지(熊只-웅천)에 각각 현(縣)을 설치함으로써 마산지역은 골포현이 되었습니다.

마산지역 현(縣)의 명칭인 ‘골포(骨浦)’는 포상팔국 중의 ‘골포국’에 이어 또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곧 '골포'는 기록에 남아있는 마산 최초의 국가명칭이자 행정구역명칭입니다.

스스로 몸을 굽힌다는 뜻을 가진 '굴자(屈自)'를 군명(名)으로 한 것과 포상팔국시대에 국명()이었던 '골포(骨浦)'를 행정체계 최하단위인 현명(縣)으로 사용한 것에 눈길이 갑니다.
혹시 전쟁에서 골포국을 굴복시킨 승리자 신라가 고의적으로 지은 이름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마산에는 2천 년이나 되는 ‘골포’가 아직도 살아남아
골포 라이온스클럽’ ‘골포 부동산’ ‘골포 갯마을식당’ ‘골포 스크린골프’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행정구역을 새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때의 군현개편은 군과 현의 명칭개정을 비롯하여 군현의 승격과 강등, 영속관계의 조정 등 행정질서의 개편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명을 한화(漢化)시켰습니다.

이 정비 때 지금의 진주지역인 청주(菁州)는 강주(康州)로, 지금의 양산지역인 삽량주(歃良州)는 양주(良州)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양주의 의안군(義安郡)으로 바뀌었습니다.

의안은 창원시에 의안동이라는 동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만 몇 해 전 창원시가 동을 합치면서 인근 몇몇 동과 함께 의창동으로 변하면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의창동주민센터 의안민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아직 연명은 하고 있었습니다.

굴자군이 의안군으로 바뀔 때 현의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마산의 골포현(骨浦縣)은 합포현(合浦縣)으로,
칠원의 칠토현(柒土縣)은 칠제현(漆堤縣)으로,
웅천의 웅지현(熊只縣)은 웅신현(熊神縣)이 되었습니다.

이 때 탄생한 합포(合浦)라는 지명은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 직후인 고려 충렬왕 8년(1282년)까지 마산지역의 행정구역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정구역명이 바뀐 뒤에도 '합포'는 지명이나 포구의 명칭으로는 계속 사용되어 마치 '마산' 지명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합할 합(合)’자를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대합조개 합(蛤)’자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합포라는 지명에 대해서,
아래 그림(1833년 제작된 고지도의 일부)처럼 마산의 산호천과 삼호천 그리고 창원의 창원천과 남천이 팔룡산을 가운데 두고 창원과 마산 양쪽에서 흘러내려 마산 앞바다에서 합쳐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양쪽의 큰물이 합쳐지는 곳, 그래서 이곳을 ‘합포(合浦)’라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이 합쳐진 합포가 아니면,
‘대합조개 합(蛤)’자의 합포(蛤浦)도 병용했다하니 마산 앞바다 갯벌에 대합조개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까요?

하지만 보다 정확한 분석은 따로 있습니다.




동아대 김광철 교수에 의하면,
합포는 단순히 포구의 모양이나 물산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위 두 개의 그림에서 보는 중국 남부지역 광서장족자치구 연해지역에 있는 '합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중국의 '합포'는 대륙 최남단인 베트남 국경 부근, 곧 요즈음 한국사람들이 골프여행 많이 간다는 해남도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해안의 작은 도시입니다.
한대(漢代) 이래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수천 년된 유서 깊은 지명입니다.

합포군은 후한시대 맹상(孟嘗)이라는 사람이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면서 유명해졌답니다.
따라서 마산이 합포로 개칭된 것은 청렴한 수령이 다스리는 고장으로 인식되어 왔던 합포의 상징성을 고려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곧 '골포'에서 '합포'로의 개칭은 지방관을 비롯한 관료의 선정과 민생의 안정을 바라는 국가 염원이었다는 설명입니다.

환주(還珠)가 합포의 별호로 사용된 것도 이런 상징화 작업이었다는 설명도 곁들여 하고 있습니다.
'구슬이 돌아왔다'는 뜻이 담긴 '환주(還珠)'는 곧 선정을 펼친 수령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합포’라는 명칭은 마산에 구청이 있을 당시 ‘합포구’로도 사용되었지만 ‘합포초등학교’ ‘합포여중’ ‘합포고등학교’ 등의 학교이름과 ‘합포만’ ‘합포문화동인회’ '합포만의 아침' ‘합포우체국’ ‘합포동’ 등 지금도 마산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마산시민에게는 아주 친숙한 지명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가겠습니다.

신라시대,
이미 마산에는 부산, 울산 등과 함께 항만이 있었습니다.
(사)한국건설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항만건설사/1978년』를 보면 고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 항만으로 이용된 지역을 소개하면서 마산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불 때 당시의 항만건설은 공법상 원시적인 개발에 불과했지만 백제와 신라의 축항기술은 당시 아시아지역 최첨단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기술자들이 와서 신라의 조선기술과 축항기술을 습득해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의 축항기술은 천연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과 해상조건에서 오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풍랑 등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시설은 석축돌제식(石築突堤式), 석주잔교식(石柱棧橋式) 또는 목재를 이용한 잔교(棧橋) 등 이었습니다.

당시 선진공법으로 축조되었던 신라시대 항만은 지금 이 도시 어디쯤에 있었을까요?
그리고 신라시대 마산의 부두에서는 어떤 분들이 무슨 일을 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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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0.04.19 10: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 ^^*

    • 허정도 2010.04.19 11:00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소.
      설명을 하려니 글이 조금 기네요.

  2. 후배유림 2010.04.21 14: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선배님.
    다음 글 기다리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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