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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5) - 강점기 정리

지난 회 까지는 1945년까지 생성·변화해온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을 총 194회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오늘부터는 1945년까지 변해온 마산도시의 특성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구성요소로 ① 시민(citizen), ② 활동(activity), ③ 토지(land), ④ 시설(facility)의 네 가지를 듭니다만 이를 둘로 묶으면 인간적 요소(①시민, ②활동)과 물리적 요소(③토지, ④시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인간적 요소인「시민」과「활동」분야는 아쉽지만 논외로 하고「시민」의「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수용해 주고 뒷받침해 주는 물리적 요소, 즉「토지」와「시설」중 일부를 살펴보되 정확하게 확인되고 분석 가능한 것들, 즉

① 시가지 확산 : 도시영역을 형성하는 물리적 시설(도시의 공간 범위)

② 도로망 패턴 : 교통망(중심가로의 양태)

③ 토지 이용 : 공간의 성격(용도지역) 에 한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도시의 내부구조에 대한 것으로서 도시공간의 속성․패턴․변이에 대한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글은 「마산의 도시내부공간구조의 기본적인 패턴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했고 그 결과의 성인(成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가지 확산-

시가지 확산은 확산규모와 확산양상 두 부분으로 나누겠습니다. 금회는 확산규모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시의 성장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도시내부에서 양적․질적으로 발생하는 토지이용강도의 분포변화와

② 증가하는 인구와 경제활동을 수용할 수 있도록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구역확장이 그것입니다.

이 글에서 「시가지 확산」이란 ②의 경우, 즉 시역(市域)의 변화를 말합니다.

시가지의 확산은 보통 이전확산과 팽창확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마산의 경우는 새로운 도시가 신설(공간 확산이란 의미에서는 이전확산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음)된 후 기존도시와 신설도시가 각각의 팽창과정을 거치며 공간이 확산․연결되었기 때문에 두 가지 양상을 모두 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의 입지형태는 도시가 자리 잡는데 토대가 되고 도시구조나 형태구성에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입지형태는 도시가 자리 잡는데 가능한 지역과 불가능한 지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최대의 시가화가 될 수 있는 영역은 위에서 말한 가능지와 불가능지의 경계선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입지형태라는 것은 도시가 입지할 수 있는 형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급사면(急斜面)의 형태와 지면(地面)과 지면이 아닌 면(예를 들어 하천의 수면이나 해면 등)의 형태적 관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이상구, 조선후기 도시입지형태의 연구, 1993, p.41,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따라서 입지형태는 시가지를 최대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범위를 결정하는 것이며 아울러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도시의 입지형태를 결정하는 요소로는 산과 바다 혹은 하천 등인데 산과 바다는 도시의 외곽형태를 결정하며 하천도 도시형태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도시의 기본적인 골격을 이룹니다(박제용, 도시형성과정과 도시형태에 관한 연구, 1999, p.79, 한양대학교 박사논문).

마산은 백두대간의 종단점인 지리산에서 분기되어 남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뻗고 있는 낙남정맥의 남쪽 산록(山麓)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무학산(763m)이 대곡산(516m)과 연결되고 무학산에서 돌출한 환주산이 원마산과 맞닿아 있으며 북서쪽으로 팔용산(328m)이 에워싸고 있고 동쪽으로는 진해만의 내만(內灣)인 마산만에 길게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연적 조건 때문에 마산은 서쪽으로 무학산록과 동쪽으로 마산만 사이의 세장형(細長型)으로 좁고 긴 해안평지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장축(長軸)은 해안을 따라 평지로 형성되었으며 단축(短軸)은 사면(斜面)으로서 여러 개의 하천이 서쪽 무학산에서 동쪽인 마산만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러한 자연조건에 의해 정주 초기의 교통망도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에 조계지로 결정된 지역은 이와 같이 북쪽 원마산 방향만 제외하고 동․서․남쪽 모두 공간의 확장이 용이하지 않았던 자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산의 도시변천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조건 위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가지 확산 규모>

시가지는 일정규모 이상의 인구가 밀집하여 있는 토지이거나 도시적 토지이용이 연담(連擔)하여 있는 토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가지화(市街地化)는 위의 두 정의에 해당하지 않는 인접 토지가 두 정의의 영역에 포함되는 과정을 말하며, 도시변화과정의 고찰에서는 시가지화의 패턴과 시기 등은 중요한 연구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시의 시가지화 시기를 일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토지이용 자료나 인구밀도, 인구규모의 지리적 분포에 관한 통계자료가 없으면 밝혀내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 홍경희 선생 육군측지부대에서 쓰고 있는 지도제작법을 인용하여 다수의 건물이 연속 되던가 근접되어 있을 때 그것을 하나하나 기호화하여 상당부분이 중첩되는 장소를 시가(市街)라고 규정하였습니다(홍경희, 남한의 도시의 형성 / 경북대학교 논문집 No.9, 1969, 경북대학교).

그러나 조사대상이 넓어지면 시가지내에 농지 등 비도시적 용도가 섞여 있거나 부분적으로 건물이 세워져 있고 여타의 많은 대지가 공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지도상에 건물이 중첩되어 나타나지 않으므로 시가지로 간주할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생깁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손태민 선생은 지도상에서 건물이 중첩되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지구 내에 세가로망(細街路網)이 형성되어 있으면 그것을 시가지에 포함시켰습니다(부산의 도시성장과정과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p.27, 1987, 부산대학교 박사논문).

이 글에서도 조사대상이 넓을 뿐만 아니라 토지와 건물의 용도조차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후자를 적용하겠습니다.

개항 이후부터 해방 때까지 변화한 마산의 시가지 면적을 정리한 것이 다음 표입니다.

본 표에 제시한 계수는 각 시기의 토지이용도에 나타난 시가지 범역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실제와 상이하겠지만 시가지확산의 정도를 가늠한다는 수준에서 이 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의 변화가 있었지만 시가지 면적의 변화가 조금도 없다고 한 것은 구체적인 범역변화의 물증을 찾기 어려워 이렇게 기재한 것인데 실제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시기구분

 1899년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 

 지역구분

마산 

 전체

원마산 

신마산 

전체 

원마산 

신마산 

전체 

원마산 

신마산 

중앙마산 

전체 

전체 

 시가지면적(A)

0.19 

 0.19

0.19 

 0.64

0.83 

 0.42

 0.64

 1.06

 0.90

 0.64

 0.11

1.65 

 4.37

 확장면적(B)

 

 

0.64 

0.64 

 0.23

 0

 0.23

 0.48

 0

0.11 

 0.59

 2.72

 시기별확장비율(B/A×100)

 

 

100 

 

437 

221 

 100

 128

214 

100 

 

156 

 265

 누계확장비율(B/0.19×100)

 

 

100 

 

 437

 221

 100

558 

 474

 100

 

 868

 2,300

<시가지 규모 변화 양상 / 단위 ; 면적 ㎢, 비율 %>

 

위의 표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이 결과에 따르면 1899년 개항 당시 원마산의 시가지 면적은 0.19㎢이었는데 이 규모가 1910경까지 그대로 존속하다가 1920년에는 0.42㎢, 1930년에는 0.90㎢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마산은 개항 직후 조성되기 시작하여 1910년에 0.64㎢ 규모로 급성장하였다가 1920년까지는 더 이상 다른 변화가 없었으며 이런 상태는 1930년까지 지속됩니다.

하지만 1920년대에 건설이 시작된 중앙마산지역에 0.11㎢규모의 면적이 시가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과정을 거쳐 1945년에는 신마산과 원마산이 하나의 도시로 연결되면서 전체 시가지가 4.37㎢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각 시기 별로 구분하여 확장규모를 살펴보면 1899년부터 1910년까지 0.64㎢가 늘어나고 그 후 10년간 0.23㎢가 늘어나 총 1.06㎢가 되었다가 1920년대는 0.59㎢가 늘어나 1.65㎢가 되었고, 그러다가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의 15년 동안에는 무려 2.72㎢가 늘어남으로써 전체 시가지 면적이 4.37㎢로 대폭 넓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10년대에 비해 그 전후시기인 개항기와 1920년대에 시가지가 많이 확산되었다가 1930년대 이후에 확산의 규모와 속도가 급속히 상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 변화과정의 결과를 보면 1899년 개항 당시 원마산의 시가지 면적 0.19㎢에 비해 1945년 마산의 시가지 면적이 4.37㎢로서 이는 무려 23배가 늘어난 규모입니다.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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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마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였습니다만 일본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884년에 착수한 그들의 공사관(公使館) 신축 때 들어 온 직공(職工) 70여명이 최초입니다.
그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상인 약간 명이 잠주(潛住)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 밑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설정된 1885년 후였습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894년,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되도록 속히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일,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계책이다. 한국 땅 이식 사업은 한반도를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기적 대책이다. 한국 땅으로의 이식은 국부의 증진 도모에 크게 족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는 데도 또한 이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조선도항자편리(朝鮮渡航者便利) 22편-

이러한 정책에 따라 한국 땅에 이주한 일본인들과 그들로 구성된 일본인 거류지가 장차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함께 1911년에 펴낸『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은 개항하던 해에 33호 103명이었으며 이들은 생업 때문에 대부분 원마산(마산포)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80호에 259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래의 표가 개항이후 12년 간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들의 수 입니다.

년도별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호수

33

70

80

99

95

154

340

677

868

989

1,132

1,548

인구

남자

87

189

160

203

191

359

717

1,233

1,826

2,009

2,360

3,163

여자

16

61

99

130

136

270

531

937

1,393

1,678

1,961

2,778

합계

103

250

259

333

327

629

1,248

2,170

3,219

3,687

4,321

5,941


이 통계를 보
면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인은 불과 77명밖에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03년에 327명이던 일본인의 수가 1904년에는 629명으로 302명이 증가하였고 이어서 1905년에는 619명, 1906년은 922명, 1907년은 1,049명, 1908년은 468명, 1909년은 634명, 1910년은 1,62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항 당시 103명이던 마산의 일본인이 1910년에 무려 5,941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1905년경부터 시작된 급격한 일본인 증가현상은 1905년 10월 노일전쟁 승리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1906년 2월 1일 마산에도 이사청이 설치되어 종래 창원감리가 행사하던 지방통치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해 9월 1일「일본거류민단법」이 실시되어 마산의 일본거류민회는 「마산일본인거류민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마산일본인거류민단이 발족할 당시의 일본인 거류민 수는 660호에 2,433(남자 1,452명, 여자 981명)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미곡상을 주업으로 하는 송원조장(松原早藏), 구중감작(久重勘作), 산본호장(山本好藏) 등을 비롯하여 216호 700명이 원마산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개항 다음해인 1900년 마산에 이주해온 일본인 송원조장 씨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그가 이주해온지 29년 뒤인 1929년 발간된 '마산현세록'에 실린 것입니다.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사진으로보아 꽤 젊은 나이에 마산으로 건너온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마산포(원마산)에 거주했던 까닭은 그들의 주업종인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영업 활동 때문에도 개항 이전부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마산포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 ) 안은 겸직입니다.

무역상 1

중매상 6(4)

약종상 5

잡화 27(6)

술소매 2(1)

도기 (5)

일상잡화 (1)

주물상 (1)

옷가게 3(2)

부엌잡화(1)

양주(2)

담배 (4)

과자상 3(2)

설탕상(2)

석유상(1)

장유상(2)

의사 2

문옥(問屋)1(1)

회사 2

여인숙(1)

야채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예기 1

선원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1)

철력세공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2)

일용노동 22

토목청부 1

정미상 (1)

식빵 1

대궁(大弓)(1)

페인트칠 1

작부 3

선두(船頭) 3

광업 2

 

러시아 : 호텔업1, 잡화상1

중국 : 잡화상7,잡화행상3

독일인 : 선교사


이 표는 1902년 당시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과 그 외 외국인들의 직업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그 중 건설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이가 50여명이나 되어 새롭게 조성되는 조계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겸직이 많았다는 사실과 직업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이주가 극히 초기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직업도 있습니다.
알아보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짐작하기로는 문옥(問屋)은 건설관련, 일고(日雇)는 일용노동, 대궁(大弓)은 조선목공, 선두(船頭)는 선박업 정도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뒷날 봉암동 수원지를 건설한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 경찰서와 일본인 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등을 건축한 천해신시(淺海新市) 등의 토목․건축 청부업자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은 거류지 내에서 일기 시작한 각종 건설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아래 사진이 본전추오랑 씨와 천해신시 씨입니다.
이런 일본인들이 개항된 마산을 휘어잡았습니다.


당시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수에 대한 통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 시기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인구와 일본인 인구를 나타낸 것이 다음 표입니다.

년도

총인구

일본인

기타

한국인(추정)

출처

1899년

 

103

 

호수 : 2,000여호

香月源太郞, 韓國案內

1907년

11,881

3,219

80

8,582명

손정목, 도시사회경제사연구

1909년

11,022

4,321

 

6-7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1910년

16,657

5,941

52

10000-11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당시 마산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을사조약 전후에 6,000-8,000여명이었다가 1910년 경에 10,000여 명을 조금 넘긴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친 총 16,000여 명의 마산 인구는 1910년대에 내내 14,000명에서 16,000명 정도로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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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31 10: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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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