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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의 거시 사회사적 분석에 미시 문화사적 분석을 부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신을순과의 결혼식 사진 / 1953년 가을>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마산 315의거를 다룬 문헌들에서 왜 마산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빈번히 제기되거나 다루어져왔다. 315의거 학술논문총서에 실린 많은 글들도 이 질문을 예외 없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압, 원조경제의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곤란,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획책 등 대동소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표출 강도는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산 지역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해 유혈시위가 발생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논자에 따라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으로 또는 지역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치, 경제, 사회 및 역사적 요인으로 나누어본다. 요컨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요인은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며 이 글의 목적상 사회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요인들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뒤이은 개인적요인의 검토를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마산 지역은 조선 말기 개항장이자 구미 열강의 조차지로서 근대 문물에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떴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정부운동 등 사회운동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일본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충돌도 첨예했기에 일반인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강만길(1999)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마산인의 진취성과 저항성을 키워왔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6.25전쟁 기간의 피난민 중 상당수가 마산에 정착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난민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날품팔이, 고아, 부랑아 등 최하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구의 사회적 구성상의 특징에 주목한 이은진(1998)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곤란,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형성이 지역사회의 유동성과 급진성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경제면에서 마산은 1950년대의 수입대체 기반 경공업화 과정에서 상공업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던 만큼 동 연대 말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불황(서익진, 2000)의 여파가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등 시민의 경제적 불만도 상대적으로 더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정치적으로 민주당 허윤수 국회의원의 변절(자유당 입당)이 미친 다면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은 허윤수와 자유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에게는 충성경쟁으로 부정선거 획책을 위해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과 반공청년단까지 대거 동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상대적으로 선명성이 강한 신파 세력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게 만들어 의거의 발단이 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선거포기 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조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이은진, 1998).

 

이러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315 선거일 직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가히 폭풍전야의 상태였다고 평가된다(홍중조, 1992: 108).

지역의 정보나 소문이 집결되는 도심(번화가이자 유흥가)에서 장사를 하던 중년의 하상칠은 이러한 시내 분위기나 민심 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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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3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산야화>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공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하여서는 소상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하여 소년기에 돈을 번 일이 꼭 두 번 있었다 하는데 18세 때 진영 대목장에서 조장수를 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창원산업조합에 가마니 검사원으로 취업을 하여 월봉 10원이란 대금을 벌어 쓴 일이 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였었다.

 

20대에 손문기 씨가 경영하던 조선일보 기자를, 30대에 고교(高橋) 씨가 사장이던 남선일보 기자를, 40대에는 창산(蒼山) 이형재(李瀅宰) 씨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김종신 씨가 경영하던 남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마산일보로 개제(改題)한 후 현 경남매일(경남신문)로 넘어가기까지 최근 20여 년간을 경영하였으니 공의 일생은 그야말로 언론에 모조리 몸을 바친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공의 진면목은 유우머와 해박한 풍자에 있는 것이며, 가지가지의 기행과 괴벽(怪癖)은 김립(金笠)이나 정수동(鄭壽銅)을 방불케 하였고, 특히 방랑벽이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바람처럼 편력(遍歷)하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해방 그 해 1230일 신탁통치 반대시위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검거되어 1947년 봄에 석방, 마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공의 모든 언행의 근원이 되는 인생관이나 사회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공의 사상적(무정부주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공은 끝까지 부정, 불의를 증오하였고,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곤욕과 박해가 노상 뒤를 따랐으며 일정 때는 옥고도 수없이 치렀다. 3년 전 봄에 공은 필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마산시사를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하기에 쾌락(快諾)를 하고 발족하였던 것이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오직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끝으로 공을 애칭 또는 별명으로 목발(目拔)’이라 부르게 된 일화를 여기 소개하면서 공의 약전(略傳) 겸 회고담을 공을 추모하는 유우머로써 맺을까 한다.

 

우금(于今) 50년 전 마산 앵정(櫻町)의 벚꽃이 만개(滿開)일 때 일인 요정에서는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인 게이샤(기생)’들이 삼미선(악기)을 통기며 일남(日男)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찬 무르녹고 있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 헌병이 민족적 모역을 주며 그를 끄집어 내었다. 이를 본 김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호 같이 일()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공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당시 힘이 또한 장사였었다.

 

목발(目拔)’이란 이 무용담에서 비롯한 것이나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름발이로 오단(誤斷)을 하여 빚어지는 희화(戲話)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끝

 

  <마산야화 초판본(1973)과 재판본(1996)>

 

 

-김형윤 선생을 회고한 조병기(趙秉基) 선생은 창원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조병기 선생은 1928년 핵심회원 6명과 비밀결사체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흑우연맹은 창원.마산의 열혈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면면을 보면 창원공립보통학교 동료교원이었던 손조동(23), 창원 북동출신 박창오(朴昌午.20)와 박순오(朴順五.19), 창원 북면의 김두봉(金斗鳳.20), 창원 동면의 김상대(金相大.20), 창원 북동의 김두석(金斗錫.21)이었다.

이들은 나라사랑과 겨레번창의 유일한 길은 민중계몽과 혁명적 투쟁에 진력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심도 강력한 정신적 기반이 없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조병기 선생은 청년.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데는 오로지 민중계몽밖에 없다고 본 것이었다.

1927<청년에게 고함(크로포드킨 저)>이란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 보급하려다 일경에게 발각,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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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7.03.29 13: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하셨습니다. 고향 마산의 숨은 역사를 이렇게 조감해 주시니 평범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젠가는 많은 마산 시민들이 역사의 깊음을 음미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날이 오겠지요. 지금은 일부 일급 교양인들만이 음미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로 정신은 황폐해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2015.02.23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0) -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5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흔히들 마산을 두고 공기 좋고 물 맑아 인심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 왔다.

맞는 말이다.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접하고 살아가는 마산시민들은 잘모르지만 타지사람들이 마산에 오면 안온한 기후에다 살기 좋고 쾌적한 도시임을 실감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일찍이 일제가 마산을 강제 개항시키고 나서 온난한 날씨에다 더 없이 맑은 물과 공기에 착안하여 거점도시의 기틀로 삼은 점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먼저 기후부터 보자.

마산은 중위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안에서 길게 뻗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기후의 특색을 보면 먼저 온대 몬순기후로 겨울철에 한랭 건조한 대륙성 극기단에서 발생하는 북서계절풍과 여름철엔 고온다습한 열대기단에서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기후 특색과 거의 유사한 기후현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쓰시마(對馬島)의 난류가 옥포만과 합포만에 겨울에도 유입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내륙지방에 비해 기온의 연교차가 적어 이른바 해양성 기후에 속하고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마산의 연평균 기온은 고위도에 위치한 대구·서울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위도상에 의한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마산과 거의 같은 위도상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기온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남단의 제주시의 14.7°C보다는 다소 낮지만 남해의 도서지방을 제외한 한반도의 기온분포로서는 통영시 다음으로 마산시가 높은 기온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포 전경>

 

-천혜의 자연환경, 가포-

일제는 이같은 기후의 호조건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살려 요양원을 차렸다고 볼 수 있다.

입지적 여건만 보더라도 구한말, 러시아가 가장 탐냈던 율구미(栗九味)였다는 점이다.

요양원으로서 터전을 잡은 이곳은 나지막한 부용산(芙蓉山) 자락 일대로서 삼면에 울창한 송림으로 싸여있고 동쪽으로는 호수와 같이 잔잔한 합포만을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다.

80을 훨씬 넘긴 노인들이 보통학교에 다닐 적에 원족(소풍)을 가면 으레 요양소가 위치한 가포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자복동을 지나 자복고개를 넘으면 송림이 울창해 숲에서 뿜어내는 송진향에 흠뻑 취했다고 회고한다.

어디 그뿐인가 일제가 마산의 물로 빚은 정종을 최고로 꼽은 사실이 있다.

정종을 ‘마사무네’라 하여 일본 천황한테 진상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감칠 술맛은 일본·만주전역까지 꽤 유명했었다.

또 있다. 간장·된장을 생산하여 일본 ‘끼꼬망’을 견줄만한 상품으로 일약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러한 제품들이 일본열도 전역은 물론 군용으로 만주까지 수송하여 소비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산 전역에 걸쳐 술과 간장 양조장과 통조림 공장으로 즐비하다보니 마산을 주도(酒都)라 하여 한동안 명성을 떨쳤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듯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공기가 맑고 기후가 온난한 이점을 살린 일제1941년, 이곳 가포에다 ‘상의군인요양소’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국립결핵요양원의 모태가 된 것이다.

1940년대, 가포의 결핵요양원과 월영 홍골(지금의 경남대) 언저리에 철도(교통)병원이 자리잡게 되었다.

1950년대 들어와 자북동에 위치한 일본병참부대가 육군군의학교와 제36군 병원으로 바뀐 것도 천혜의 자연환경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1960년대는 국립결핵요양원, 군의학교, 36군 병원, 철도병원을 잇는 ‘호스피탈·벤트’가 형성돼 그야말로 전국에서 제일 이름난 휴양도시로 부상되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1941년 상이군인요양소로 개설된 것이 해방과 함께 완전히 우리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해방 후 기존 건물을 보수하고 일부건물을 신축하여 초기에는 200병상의 수용능력을 갖추었다.

이어 194661일 ‘국립마산요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국립기관으로 개원하기 전 해방 후 과도기에는 신마산에서 저명한 의사였던 제길윤 박사가 마산시 의사회장 위임으로 책임을 맡아 일본인 요양소장으로부터 제반 물건과 인원을 접수하고 운영책임을 받아 자치관리를 했던 것이다.

당시,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은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질서유지를 하면서 60%의 공사가 진척되다가 해방으로 인해 중단된 신축병동 재건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또한 도난·분산된 건축자재를 회수·보관하는데도 진력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제길윤 박사와 간부직원이 상경하여 해방과 함께 급작스레 몰려온 귀환동포 중 결핵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요양원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국립마산요양원은 오늘날 명실상부한 결핵전문치료센터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결핵병원 전경 / 최근 신축 때문에 철거되었>

 

-머물다 간 사람들-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마산요양원은 광기 넘친 일제의 마지막 단말마인 태평양전쟁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함께 갖은 풍상을 겪어온 역사의 표상이요, 결핵퇴치의 요람으로 그 구실을 다해온 것만은 틀림없다.

숱한 애환이 서려있는 요양원에 말못할 곡절과 애틋한 사연도 많았음은 물론이다.

곳을 거쳐간 유명인사도 있었고 요양원을 주제로 한 가요와 영화까지 나와 한때나마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암울했던 일제시절 요양원을 거쳐간 문인으로서 임화(林和:19081953 / 사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본명이 이현욱(李賢郁)인 그는 약관의 나이에 KAPF를 조직, 서기장이 될 정도로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문인으로서 일약 유명하였다.

월북한 그는 1953년, 김일성일파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는데, 억울하게도 미제간첩의 누명을 쓰고 어이없이 희생되고 말았다.

임화의 아내 지하련(池河連)은 마산출신 문인이었다. 둘은 요양소에서 로맨스를 꽃 피웠는데 폐결핵환자였던 임화를 위해 지하련은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임화는 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되어 결혼하였다. 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무대가 바로 요양원이었다.

한국전쟁 때 만주에 소개해 있던 지하련은 임화의 사형소식을 듣고 미치광이가 되어 끝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지하련은 1940년 <문장>지에 <결별>을 발표, 문단에 데뷔했다. 단편 <결별>·<가을> 등을 대표작으로 남겼는데 그 누구보다도 여성의 심리를 이성적으로 관찰한 작가로 주로 소시민의 상극적인 심리상태를 잘 묘사했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

나홀로 재생의 길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리/

 

1956년 마산방송국에 재직하고 있던 반야월(박창오)이 가장 절친했던 친구 이재호(李在鎬)를 찾아 마산요양원에 문병을 갔다.

그 날 위문공연도 함께 했다. 요양원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장을 연상시켰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한 묘령의 여인이 호젓한 숲길을 거닐고 있음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이 여인 역시 폐결핵환자였다.

완쾌된다는 보장도 없이 그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외로운 모습이 서녘하늘에 타는 붉은 노을마저 애처로운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고 있었다.

반야월은 당장 만년필을 뽑아들고 청순 가련한 이 여인의 비감 어린 심정을 아는 듯이 노랫말을 적었다. 제목은 <산장의 여인>으로 정했다.

폐결핵환자였던 이재호가 즉시 곡을 붙였다. 이런 사연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당시 KBS전속가수로 활약하던 권혜경이 취입했다.

권혜경은 이 노래 한 곡으로 1950년대의 톱싱어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이 가사를 쓴 반야월은 마산출신으로, 진주 출신인 이재호가 곡을 붙인 <꽃마차>, <넋두리 20년>과 같은 자신이 부른 노래에 가사를 지었다.

작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추미림, 박남포 등 여러 필명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5000편에 달한다고 하며 작곡가의 손에 넘어간채 미발표된 가사만도 250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서슬퍼런 유신독재의 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1975년 그 해 사상계 잡지에다 <오적>의 시를 실어 일약 유명해진 김지하 시인도 한때나마 요양원을 거쳐간 사실이 있다.

김지하가 요양원에 머물렀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의 집요한 감시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실례를 든다면 75쯤, 일본 문예춘추잡지가 주관하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아꾸다가와(芥川)상을 그해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재일교포작가 이회성(李恢成)이다. 그는 수상작품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해서 탁월한 문학가로서 장래가 촉망된다고 평판이 자자했다.

이 무렵 한국일보가 주선하여 모국을 방문하였는데 이회성이 김지하를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는 바람에 마산까지 내려왔다.

이회성은 끝내 김지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시 극심했던 감시와 인권유린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문인이었던 권환, 이영도, 구상 등과, 재야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진 계훈제, 영화인 최백산 등도 한때 요양원에 머물다 가기도 했다.

병원은 영화의 무대이기도 했다.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넘긴 올드 팬들은 기억해 낼 수 있는 <3천만의 꽃다발>이라 하겠다.

<영화 (삼천만의 꽃다발) 연습 장면>

 

195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촬영 8개월로 완성된 16mm판 영화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한국전에나가 부상을 당해 실명한 자식에게 자기 눈을 빼내 각막이식으로 광명을 찾게하여 다시 출전시킨다는 단조로운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모성애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관제군사영화였다.

출연진은 당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조미령, 마산출신 시인 정진업, 김수돈을 비롯해 이규숙, 박영 등이 등장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주로 요양원을 위주로 하고 앵기밭골에 있는 무학농원, 육군군의학교 등지에서 촬영했다.

이 영화에 친일기업인 한일봉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몰고 달리는 모습은 눈길을 끌만하다.

이 작품의 연출은 신경균(申敬均)이었으며, 촬영은 김찬영이었다. 이 영화의 기획·연출 분야는 제2육군병원이 맡았고, 마산결핵요양원이 후원을 맡기도 하였다.

어디까지나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상징하고도 남을 국립결핵요양원은 결핵으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을 일으키는 재활의 둥지요, 삶의 윤기를 더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하였다.

국립결핵요양원 뿐만 아니라 신생 국립결핵요양소, 철도요양소 등 3개소가 밀집되었던 것은 그만치 마산의 따뜻한 기후와 맑은 공기가 바로 건강을 되찾는데 가장 알맞은 요양지였기 때문이다.<<<

홍중조 / 당시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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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