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0.06.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마산포에 조창이 서다>

조선은 태조 재위 중 고려 때 실시하였던 조창제도를 거의 복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전국 아홉 개 조창에서 세곡을 수납했습니다.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조창이 충주의 사흥창(司興倉)․원주의 흥원창(興原倉)․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황해도 백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의 다섯 개였고,
바닷길이 연결되는 조창은 충청도 아산(牙山)의 공세관창(貢稅串倉)․전라도 용안의 덕성창(德成倉)․영광의 법성창(法聖倉)․나주의 영산창(榮山倉) 네 개였습니다.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의 사흥창에서 수납하였습니다.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조운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선(漕船)의 빈번한 침몰사고와 민간인에게 운임을 지불하고 운송하는 임운(賃運)이 생기면서 조창의 기능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조창이 폐쇄되거나 관할구역이 축소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민호(民戶)를 기준으로 한 공물(貢物)과세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토지기준 과세인 대동법을 실시합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며 이 때 걷은 쌀을 대동미(大同米)라 불렀습니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경기도에 처음 실시한 대동법은 이후 강원도․충청도 등으로 확산 혹은 축소되기도 하다가 숙종 3년(1677년)에는 경상도에 시행되고 숙종 34년(1708년)에 황해도를 마지막으로 100년에 걸친 시도 끝에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후 영조 36년(1760년)에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이 경상도 지방의 대동미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한 조창을 세우도록 건의하여 결정됩니다.
그 때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창원의 마산창(馬山倉)과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곧 경상도 좌우 양창(兩倉)이 설치되었습니다. 250년 전 일입니다.
5년 뒤 밀양의 삼랑창(三浪倉)을 후조창(後漕倉)으로 설치하여 경상도에 3곳의 조창을 두었습니다.


마산창(馬山倉)의 위치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지금의 남성동 파출소 일대입니다.
당시에는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해안이었지만
지금은 매립이 되어 도시 한복판입니다.
-마산창의 터와 건물 등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히 올리겠습니다-

마산창 관할구역은 창원․함안․칠원․진해․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동남면의 8개 읍이었는데 거제와 고성은 1765년에 위치관계로 거제 견내량의 속창(屬倉)에서 관장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진해는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일대입니다. 진해라는 명칭은 1907년 일본에 의해 당시 웅서면이었던 현재의 진해시로 넘어갔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입니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하였습니다.
배의 기본 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습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경 도착합니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석두창 때문에 번성했던 포구였으며,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계획으로 한 때 동아시아의 군사거점도시이기도 했던 곳이 마산지역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조창 기능도 사라지고 몽고군도 떠나자 조선시대 마산포는 조용한 포구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런 마산포가 다시 도시적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마산창(馬山倉)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산창 건립은 오늘날 마산도시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마산창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집이 들어서고 길이 생겨 마산포가 도시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도심이라 불리며 도시재생의 대상으로 거명되기도 하지만,
250년 전에 들어선 마산창 주변인 창동, 남성동, 동성동 일대는 아직도 마산의 중심입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9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0



Trackback 0 Comment 3
  1. 따옥따옥 2010.06.21 13: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림을오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역사와 어울어져 정말 멋진 자료인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21 13:50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데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10.07.22 23:2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0.05.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경상도 합포에 석두창이 서다
>




고려시대는 조운제가 ‘국가지중최중자야(國家之中最重者也)’라고 표현될 정도로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조운제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고려 제6대 성종(982-997년)기에 전국 여러 포구에 조운기지를 설치하였다가 이후 정종(1035년-1046년)대에 이르러서 이를 개경 남부 12조창으로 개편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12조창은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의,
하양창(충청도 아산), 영풍창(충청도 부성), 진성창(전라도 임파), 안흥창(전라도 보안),  부용창(전라도 영광), 해릉창(전라도 나주), 장흥창(전라도 영암).
내륙의,
흥원창(강원도 원주), 덕흥창(충청도 충주).
남해의,
해룡창(전라도 순천), 통양창(경상도 사천), 석두창(경상도 합포, 마산)이었습니다.
12조창 모두 개경 남쪽입니다. 
그 후 문종(1046년-1083년) 때 서해도 장연현에 안란창이 하나 더 설치되어 고려시대 조창제의 골격이 완비되었습니다.
고려의 조운제는 이 13조창으로 유지, 발전되었습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모두 바다나 강을 끼고 있는 곳이라 조운선이 다닐 수 있었던 곳입니다.

각 조창에는 설치 규정에 따라 6척의 조선(漕船) 외에 1,000석 정도를 실을 수 있는 초마선 1척이 배치되어 세공미의 수송을 담당하였습니다.
2월에 조운하여 가까운 곳은 4월을 기한으로, 먼 곳은 5월을 기한으로 수도 개경에 있는 경창에 수송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전남 나주시청 현관 로비에 전시된 나주선(羅州船)의 1/20 모형입니다.
이 배는 고려시대 나주 조창 해릉창에서 영산강을 통해 세공을 실어 나르던 초마선입니다.
2004년 나주역 뒤쪽 영산강 바닥에 도출된 선재를 주민이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를 나주시가 전문기관에 추정복원 설계 용역을 의뢰, 컴퓨터 3차원 분석 및 전문가들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서 추정복원도를 작성한 후 8억 원을 들여 현재 복원 중에 있습니다.
선체는 길이 29.9m, 너비 9.9m, 높이 3.16m의 크기에 95톤에 이르며, 승선인원은 96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 합포 석두창에도 이런 배가 오갔겠지요.

합포 석두창에는 지금의 창원 김해 함안 칠원 웅천 의령 일대의 세공미가 보관 되었습니다.
석두창까지 수취물을 운송하는 방법은,
지역에 따라 낙동강 수운이나 연근해 항로를 이용했거나, 혹은 22역도() 중의 하나로 김해 덕산역을 중심역으로 했던 금주도(金州道)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 조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촌락으로서 작은 행정기구를 이루었으며 주민들은 조창민으로서 조운에 관계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합포의 석두창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천 선진리에 있었던 통양창의 예로 추정한다면,
석두창에도 창(倉)을 관리하기 위한 토성이 있었을 수 있으며, 창(倉)을 중심으로 판관과 향리 그리고 조창민이 거주하면서 선박 관리 등 조운 업무에 임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을 것이니 자연히 석두창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고 교통망도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가하면 합포현은 조창 때문에 중앙정부와 직접 소통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과 배경으로 합포(마산)는 중부 경남의 유통을 중심지로 발전해갔으며, 이러한 합포의 물적 토대는 장차 이곳이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기지로 선택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정황들을 생각할 때,
고려시대 석두창이 이 도시의 중심지였다는 추정은 쉽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합니다.
초마선이 오갔던 석두창은 과연 지금의 마산 어디쯤이었을까요?<<<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Trackback 0 Comment 2
  1. 도미니 2010.05.03 10:2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선생님,
    지금 그노무 해양신도시인가 뭔가 그거 공사를 시작한거 같습니다. 바지선에 기둥이 네개가 삐쭉세워진 거 두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뭘하고 있습니다. 매립을 위한 말뚝을 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기어이 하는갑습니다.
    그노무 매립... 죄송스럽지만 막말이 절로 나옵니다, 매립, 그거 생각하고 시작하고 추진하고, 그게 무슨 광영을 가져다 주기라도 할 것 같이 생각하는 멍텅구리들 싸그리 매립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마산은 이미 죽어 나자빠진데다가 아주 추악스럽기까지한 도시가 돼버렸습니다. 선생님의 마산변천사씨리즈를 읽는 지금 느낌이 더 그렇습니다.

    도시를 죽인데다가 흉칙하고 추악하게 만든자들은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것이라 믿지만, 거기에 좀비같은 몰골이 돼버린 마산의 역사와 시민들은 우짭니까! 바다는 또 ...

    • 허정도 2010.05.03 11:13 신고 address edit & del

      매립공사를 시작했다고요?
      저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통합시가 출발하게 되면 지금까지 마산 만으로 그렸던 그림을 통합시라는 큰그림으로 바꿔야하는 것이 상식일 터.
      지금 시점에서 착공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