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5.03.16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3-마지막 회) - 매립의 도시, 마산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8 매립의 도시, 마산

 

19세기 말, 동성리(현 동성동)에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항된 해인 189910월, 마산포 조창에 들어있던 창원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항만건설과 매립사업을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에게 15,000량의 공사비를 차용하여 매립공사에 착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1906년 히로시는 김경덕의 매립인허장을 저당 잡을 때 작성한 전집표에 ‘차용금을 갚지 못하면 매립권은 채권자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근거로 권리의 승계를 요구했고 창원감리서 주사 김병철은 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의정부 참정대신은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빨리 취소하라고 엄명했고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히로시에게 즉각 사정을 통보했지만 히로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성통감부를 통해 매립 사업을 하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창원감리에게 사건의 재조사를 명했다.

이에 대해 창원감리는 ‘만약에 마산포 해안을 타인이 매립하게되면 마산포는 입이 틀어 막힌 목구멍이나 문이 잠겨버린 집과 같이 되어 마산포 수천호 주민은 결국 생업을 잃고 흩어져 비참하게 될 것이라’ 는 내용으로 보고했다.

그리고 기왕 매립을 하려면 마산포 주민들의 힘으로 해야 된다고 덧붙였는데, 이때 마산포의 자본가 15명이 4만원을 모아 공동으로 매립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 공동매립 청원은 신청한지 1년이 넘도록 정부로부터 아무 해답을 못얻었으며 시간이 흘러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다.

결국 김경덕도 히로시도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지는 못했다.

 

<매립 전의 월포 해수욕장>

 

-사라진 마산포 선창-

하사마 후사다로(迫間房太郞)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하사마는 부산 제일의 땅부자로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부산 경제를 좌우한 자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고 소작농을 자그마치 2,000여호나 거느린 대지주였다.

러시아와 일본이 마산 율구미를 두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 때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 러시아의 마산 진출을 막은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한 자다.

합방 후 부산·경남 일대를 호령하던 이 하사마가 오래 전 김경덕이 꿈꾸었던 마산포 남성동 해변을 매립하게 되었다. 김경덕이 매축권을 얻은지 12년만의 일이다.

대지 8,000평 도로 3,600여평 합11,600여 평의 대규모로 1911년 착공, 19147월 준공하였다.

전주(錢主)는 하사마(迫間)였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합방 전 김경덕의 매립권을 얻기 위해 날뛰던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였다.

매립이 끝나자 이중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토지가 하사마의 소유가 되었으며 19362월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하사마 히데오(迫間秀雄)에게 상속되어 해방 때까지 전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매립 후부터 마산의 중심상권이 되었던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내내 마산포 상권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이 매립지 전체를 일제시대 내내 하사마에게 모든 상인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하였다.

이 매립으로 마산포 중심상권이 크게 변했다.

일찍이 두개의 굴강과 네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산 어시장은 전국적 규모로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하사마의 토지가 모든 해안을 차지하게 되어 굴강과 선창은 없어지고 마산포는 젖줄인 바다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어 그 중심상권이 새로 조성된 매립지 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마산포 가로망(점선으로 표기된 길 주변이 변화한 곳이었다)>

 

마산만 최초의 매립은 1905년 현 중앙동 해안이 일본 군부에 의해 철로정차장 건설을 구실로 시행된 것이며 두 번째는 19097월 진해에 있던 육군중포병대대가 월영동(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쪽으로 이전되면서 이 일대 일부를 군용지 확보를 이유로 매립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에 의한 매립은 하사마의 것이처음이었다.

일본군부에서 시행한 앞의 두 매립은 그 특수성 때문에 매립의 규모와 위치 등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해안선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여러자료와 철도 및 육군중포병대대 이전에 관한 기록을 보고 추정할 뿐이다.

남성동 매립 후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선박의 접안·정박시설과 물량장이 갖추어졌으며 통영, 거제 등지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다.

 

-직선으로 변해버린 천혜의 해안-

1920년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었다.

그 동안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일본자본가들이 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한국인도 일부 창업하면서 1920대 마산 도시는 변화를 맞는다.

마산은 한국과 일본을 손쉽게 연결할 수 있는 입지조건과 철도로 내륙까지도 손쉽게 연결되므로 타 지역에 비해 공업도시로서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마산만과 무학산이라는 배산임수의 자연조건 때문에 대규모 산업시설을 수용할 수 있는 가용부지가 부족했다.

마산과 부산 혹은 본국에 있던 일본 자본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지조성방법으로 폭 70m에서 200여m의 간석지가 있는 마산 해안의 매축에 눈을 돌렸고 이들에 의해 시행된 마산의 매립은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다.

마산이 끼고 있던 해안의 간석지가 일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손쉽게 큰 돈을 쥘 수 있었던 투자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산 도시의 역사는 매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립과 함께 도시가 바뀌고 매립과 함께 교통과 산업도 변화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마산매립은 마산부나 조선총독부가 전체적인 도시의 균형발전을 위해 일관되게 계획,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매립 주체인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이다.

 

<매립 전의 마산만>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마산매립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27년 : 남성동 어시장 너른 마당 일대 252평이 마산부에 의해 매립되었다.

2) 1928년 : 신마산에오래 동안 살아온 일본인 목재상 메가다 헤이자브로(目加田平三郞)가 우리나라 철도건설에 참여한 후 이름이 알려진 서울의 토건업자아라이(荒井初太郞)에게 의뢰하여 본정(本町,현월남동) 앞 해면을 매립했다. 현재의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남쪽 건너편 일대와 옛 진일기계, 유원산업주변 10,500여 평의 넓은 면적이었다. 해안선은 석축안벽으로 시공되었고 유원산업 앞에는소규모의 선착장이 마련되었다.

3) 1929년 : 오동교에서 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2,100여평이 매립되었다. 이곳은 당시 야마다(山田)장유(현 몽고간장)의 사주 야마다 노부스케(山田信助)에 의한 것이었다.

4) 1935년 : 남성동 건어물시장 일대 1,000여 평이 마산부에 의해 매립되었다.

5) 1935년 : 신포동 삼익아파트, 대우백화점, 대한통운 일대에 대지 48,000여평, 도로17,000여평, 총65,000여평의 대규모 매립이 있었다. 이 사업에 참가한 일본인은 모두 여섯 명으로 그 중 두 명은 부산, 한 명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마산매축주식회사라는 새로운 토목회사까지 설립하였으며 자산동 임야를 매입하여 그곳의 흙을 파 매립토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마산의 도시형태는 몽고정 부근에서 해안은 깊고 환주산은 돌출해 나와 가용대지가 잘록해서 마산포와 신마산 두 도시를 지형적으로 단절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매립으로 노선(路線)만으로 연결되던 두 도시가 하나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마산 최대의 매립이었다. 이 곳은 원래 북에서 남으로 2㎞이상이나 되는 아름다운 백사장 때문에 전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월포해수욕장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6) 1931년 ~ 1942 : 창포동과 월남동 일대 13,700여 평이 7차례에 걸쳐 매립되었다. 좁게는 4~500평, 넓게는 3~4,000평 규모로 진행된 이 매립은 여러 명의 일본인들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주로 자신들의 공장이나 조선소 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7) 1942년 : 마산 수협 자리와 동양공업, 신기사 등이 있던 11,800여 평이 부산의 토건업체 다케모토 구미(竹本組)에 의해 매립되었다. 일제기 마산포의 매립공사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8) 1944. 12 : 마산의 명승지 월포해수욕장이 매립된 이후 고노에가하마(近衛濱) 해수욕장이란 이름으로 이용되던 해운동 일대(전 마산화력발전소자리)의 해변 12,200여 평이 일본인 나까무라 시게오(中村繁夫)에 의해 매립되었다. 그러나 완공된 지 8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하여 해방 당시 공터로 버려져 있었고 시기를 잘못 선택해 크게 실패한 나까무라는 후에 마산에서 그이름이 회자되기도 했다.

9) 이 외에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제2부두, 제1부두, 중앙부두 등을 건설하면서 총 4차례 42,000여평이 매립되었다.

 

해방 당시,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천혜의 마산 해안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직선형 호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방된 지 40년, 창포동에서 월영동까지의 서항과 오동동에서 서성동에 이르는 구항 일대의 매립공사가 1985년 착공 후 1993년 준공될 때까지 일제에 의해 조성된 이 해안은 수십년 동안 존속하였다.<<<

허정도 / 건축사, 창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

이 글로써 43회 연재한 <마산·창원 역사 읽기>는 전부 끝났습니다.

애당초 계획대로라면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시작해야 합니다만 아직 준비가 다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다시 마산 도시의 근대기 이야기를 다룬 책, 목발 김형윤 선생님의 『마산야화 소개하겠습니다.

김형윤 선생님은 마산지역의 원로 언론인이셨고, 소개드릴 책 『마산야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산의 지난 세월을 알게 해준 고마운 유산입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5.01.19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5) -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은 신사(神社)였다.

마산 제일여고 터가 신사였다.

<마산 시사 / 현 제일여고 터>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었다.

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마산시의 지붕에 일본의 식민정책을 상징하는 두 쌍벽이 나란히 있었던 셈이다.

대포는 고 김형윤씨의 글에 의하면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된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위해 마산만 중포병대대 입구의 산정에 두었다가 대대장이 1935년 마산부에 기증했고, 마산부는 이것을 신사 앞에 거치시킨 것이다.

광복 후에도 대포는 공터에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진일철공소」라는 고철공장이 마산시의 허가를 받아 망치로 두들겨 분해해서 뜯어 갔다고 한다.

일제침략을 증언하는 역사적 유물이 안타깝게도 고철로써 처분되어버린 것이다.

신사 주변과 신사로 올라가는 길가에 즐비했던 수많은 벚꽃나무들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 주민들에 의해 모조리 베어져 땔감이 되었다.

배일감정도 있었지만 광복 후의 심각했던 물자난이 큰몫을 했다. 건축자재를 구한다는 것도 몹시 어려워서 집을 새로 짓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쓰던 건물을 가급적 그대로 고쳐 썼다.

마산 신사건물은「신마산교회」에 의해 잠시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47년 제일여고의 전신인 마산 가정여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교사(校舍)로 썼다.

가정여학교는 신사의 본전 건물을 교무실과 교장실로 썼고 부속건물을 교실로 사용했다.

부속건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서 몇년 전 허물 당시까지 학교 민속관으로 사용해 왔다.

학교와 학교주변에 아직도 신사의 흔적이 몇몇 남아 있다.

학교 안과 바깥에 있는 길고 넓은 돌계단이 옛 신사계단이다. 돌계단은 일제하 마산 부민의 근로봉사 작업이라는 명목의 강제노역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근로봉사 작업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제일여고에 가면 입구의 돌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이 교정의 정원석으로 남아 있고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을 음각한 돌도 박혀있다.

그리고 마산제일여고의 정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신주문을 모방하지는 않았겠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육중한 문이 보는 사람을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과 옛 신사에 대한 기분 나쁜 기억이 엉키어서 불러낸 느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설립자 이형규씨에 의하면 이 문은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일여고 정문과 신사 입구 계단으로 사용되었던 돌계단>

 

-왜 마산에 신사를 세웠나-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신토는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의 천황, 유명한 귀족들, 무사나 문신, 각 씨족의 조상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 놓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별별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개를 모시는 신사, 술신을 모신 신사, 된장신을 받드는 신사, 김치를 받드는 신사, 만두를 섬기는 신사, 부뚜막신을 받드는 신사, 젓가락을 받드는 신사, 냄비를 받드는 신사, 굴뚝신을 받드는 신사, 쌀을 받드는 신사, 물을 받드는 신사, 곳에 따라서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도하신사(稻荷神社)라고 하는데, 광복 이전의 한반도에도 마산을 포함해서, 서울 남산, 인천, 목포, 부산, 진해, 진남포, 신의주, 용천, 성진 등지에 있었다.

마산신사의 본전에는 천조대신을 봉안했지만, 경내 오른쪽에 여우를 모신 도하신사(稻荷神社)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병설했다.

마산에 송미신사를 특별히 세운 것은 마산이 술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산의 기후와 수질이 양조에 적합해서, 일제 당시에 우리나라 청주의 6할이 마산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

일본인은 원시신앙에 머물러 있던 신토를 일본 천황의 가계에 맞추어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면서 그들의 세속적 지배에 유리하게 변질시켜 왔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일본황실의 조상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천조대신의 직계종손인 역대의 천황은 만세를 일계로 이어나가는 현인신이다. 천조대신은 그의 직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국을 항상 보살펴 주고 보호해 준다는 것이고, 일본은 신국이고 황국이며 유신의 대도가 존귀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신사라는 이야기이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각 지역의 각국 공동 조계(租界)에 일본 거류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거류민들은 그 조계에 신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마산조계에도 일본인들이 꽤 많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곳에 마산신사가 세워진 것은 1909년의 일이다.

마산신사는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의 창도로 건립되었다.

「마산항지」가 신사 건립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이죠는 마산에 사는 일본인 유지들과 신사 창건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이사청을 방문해서 이사관으로부터 마산해관장 사택 예정지에 신사조성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마산신사는 세이죠의 말에 의하면 ‘거류민으로서의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1909년의 일이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에 본격적인 신사정책을 펴기 전이고, 마산신사는 거류민들의 신앙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통해 순종을 요구했다-

1915년에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신사설립 기준과 그 인가절차를 정한「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고, 일본거류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각지의 대부분 신사들이 총독부로 부터 공인되고 정리된다.

1925년은 일제가 한반도 내에서 신사정책을 본격화하게 된 획기적인 분수령이 된다.

그해 서울 남산에 5년여의 공사기간에 걸쳐 조영한 조선신궁이 완성된 것이다.

조선신궁은 한반도에 거류하고 있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과 신앙심까지도 교화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신궁의 건립을 계기로 신사는 조선인을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충성을 강요하여 일본화(日本化)시키려는 방법으로 원용(援用)되었고, 혹독한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일제는 중국 대륙 침략의 첫 발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뒤이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드디어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그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한민족의 정신적 통일과 순종의 자세였다.

일제는 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기관, 학교, 민간유지, 종교단체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의 일이다.

그 이듬해「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되었고 이 운동의 말단 기관으로 애국반이란 것이 있었는데, 애국반원과 경찰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또 매일 아침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말기에 이르러 애국반이 46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당시 신사참배의 광풍이 얼마나 참담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조선민족이 신사참배에 굴복한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강하게 거부했다. 끝까지 신사참배에 항거한 교회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였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라고 할만한 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는데, 당시 산정현교회의 장로는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마산의 문창교회를 찾아와서 주기철(18971944) 목사를 산정현교회로 초빙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 사람인데, 오산학교와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첫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이 때 이미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여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가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가기 전에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해서 새 교회당을 완공하고 설교를 할 때, “우리 교회는 일본 우상에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절대로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총5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 하지않았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명의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 나는 바야흐로 사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었다가  나와서 이 강단에 다시 섰으나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 있는 만물은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

 

-일본 귀신은 승신식을 통해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끝난 1945815일 현인신으로 군림하던 천황은 보통 인간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는 종전과 동시에 조선신궁에 안치해 두었던 어령대를 동경 궁내성으로 돌려 보내고 각 지역의 신사에서는 승신식을 일제히 실시하게 했다.

승신식이란 신사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관이 엄숙하게 주문을 읽고 위패를 불태우면 신령이 하늘로 해서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의식이다.

마산신사의 승신식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94일 집행되었다.

광복과 함께 한반도에서 광기를 부리던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비로소 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현도 / 당시 창원대학교 독문학과 강사

 

 

 

 

 

 

Trackback 0 Comment 2
  1. 양만춘 2015.01.22 10: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런 귀신을 받들었으니 사람을 그렇게 탄압한 게 아니겠어요?
    아직도 잘못한 걸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귀신에 씌여도 단단히 씌인 게 이닐지...

    • 허정도 2015.01.22 17:54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4

14. 정전 후의 체험들 Ⅴ - 마부 버스, 화물차 군용차 아닌 것들을 그때 우리들은 ‘개인차’라 불렀는데, 개인 승용차는 당시로선 하루에 한두 대 보기도 어려웠고, 거의 모두가 화물차와 버스였다. 거의 모두 일제가 두고 간 ..

건축의 외형 - ‘새둥지’ (Bird's Nest)

동굴에서의 삶을 시작으로 인간의 주거는 자연을 모방하는 단계를 거쳐 현재는 완전히 인공적인 삶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형태들은 완전한 인공물인 건축의 형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의도되었든 ..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Ⅳ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건축의 외형 - ‘원통’ (cylinder)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도형들 중에, 언제나 주변에 있어서 오히려 존재감이 낮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의 '원통' 이 그런 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원통형 물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

기억을 찾아가다 - 12

12. 정전 후의 체험들 Ⅲ - 귀환, 상이군인들 정전 얼마 후에 전장에 갔던 아저씨들이 속속 돌아왔다. 함께 끌려가서(그땐 그렇게들 표현했다) 내내 한 부대에 있다가 함께 돌아온 우용 아저씨와 내 당숙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

건축의 외형 - ‘타공판’ (perforated board)

사람이 건축의 외형을 인지하고 기억할 때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특정 건물은 가장 부각되는 특정 요소로 기억하게 되는 듯 합니다. 규모나 재질, 기하학적 형태, 조..

2018년 새해인사

새해 인사드립니다. 꿈 꾸는 것과 희망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해가 되기 바랍니다.

건축의 외형 - ‘액자’ (frame)

미술의 역사 만큼이나 액자의 역사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회화의 전시, 보존 등을 위한 보조적인 위치에서 출발한 액자는 사진의 등장과 기술의 발달 등으로 현재는 picture frame 만이 아니라 photo frame, d..

기억을 찾아가다 - 11

11. 정전 후의 체험들 Ⅱ - 수학여행 전쟁이 막바지로 갈 때쯤 해선 민간자동차도 많이 다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로 화물차가 많이 보였는데, 마산 부산 간에만 다니던 버스 숫자도 상당히 불어난 걸 느낄 수 있었다. ..

건축의 외형 - ‘계단’ (Staircase)

오늘은 이전 포스팅들 보다는 조금 더 인공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계단' 이라는 주제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계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어, 이미 BC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에서부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Ⅰ-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

건축의 외형 - ‘초승달’ (crescent)

달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나 종교와 연결지어서 생각되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뜨지 않는 삭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에 서양권 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여 new moon 이라고도 불리죠. 오늘은 이슬람의 ..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Ⅲ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

건축의 외형 - ‘삼각형’ (Triangle)

피라미드와 삼각형, 그게 그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입체도형과 평면도형 이라는 근본의 차이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접근 또는 적용 방식 또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삼각형 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확..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