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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3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침묵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개인적 요인들에 천착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된 사회적 정의감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보복 공포증과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1985년 회갑연 때 가족과 함께 / 맨 왼쪽이 글쓴 이>

 

하상칠의 증언은 315의거 당일 시청과 무학국교 앞에서 벌어졌던 야간시위의 전개과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향후 4월혁명 공로자 신청이 추가 시행된다면 하상칠과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구제되고, 나아가 2020315의거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예정된 315의거사개정판을 낼 때 그의 증언이 반영되어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역사 서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가 315의거의 다른 참여자들에 대한 미시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기대감과는 반대로 이 글을 준비하는 내내 왜 당사자가 살아있던 동안에 이러한 논문을 쓸 생각을 하지 못 했던가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사망 후에야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증빙자료는 고사하고 85세의 노인이 50년 전 사건에 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증언밖에 없는데다가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그것도 극히 한정되고 단편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구술사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가급적 많은 사람의 구술부터 받아두는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개별 연구자 차원에 맡겨두어서는 안 되며 공공의 관심과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방법론적으로 이 글은 여전히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미시사 방법론의 원용만으로는 증거의 단편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아마 주관성과 객관성 간의 거리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시사 방법론이 가진 영원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조사자나 연구자의 더 많은 노력에 의해서만 다소간에 해소될 수 있다.

둘째,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해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삶과 활동을 천착했지만 관련 자료와 참조인의 부족으로 좀 더 생생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개인과 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엄밀하고도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어려웠고,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생애와 사회적 활동을 그가 참여한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기도 힘들다.

이는 315의거와 관련된 개인들에 대한 구술 자료가 늘어나고 개인별 사례 탐구가 누적되어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후속연구와 관련해 우리는 하상칠의 증언이 참임을 믿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객관적 증빙서류의 미비를 이유로 유공자 선정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상칠 같은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고 역사적 사건의 리얼리티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행의 객관적 증거주의가 가진 장단점을 명시하고 유공자 선정 방법의 개선책을 제시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끝)

서익진 /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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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초기 유화 국면이다.

그러나 의거가 발생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정권과 특히 경찰 조직의 속성이 바뀐 것은 아니어서 증언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315의거와 4월혁명은 사실상 잊혀진 사건이었다(남부희, 1995; 이은진, 2004; 남재우, 2005).

다음, 1987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처음으로 노태우 민선정부가 들어서고 뒤이어 김영삼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여당의 집권 연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31019315의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지만 유공자 발굴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하상칠은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2002년 이른바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증언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데는 무엇보다 전라도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해 315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자 국립묘지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증언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지만 이걸로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2010년에 “315의거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비로소 국가가 기념하는 사건의 관련자를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정치권력이 개인에게 가한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장기 지속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증언록, 478).

이 진술은 그의 진심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녹취를 풀어낸 사람이 지어낸 미사려구일 것이다.

 

<회갑연 때 아내 신을순과 함께 / 1985년>

 

필자는 그가 말하지 않은 속내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염려되고 또 자신의 묘 자리에 관심이 커졌는데 유공자가 되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부언하기를 자신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자손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또 자손들에게 마지막 교훈도 남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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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언을 하고 공로자 심사 신청을 하기로 맘먹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먼저 철저한 비밀 유지의 이유를 살펴본 후 증언 결심의 동기를 알아보자.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하상칠이 315의거 당일 시위에 참가한 이후 무려 50년 동안 침묵해왔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기는 공포라는 감정과 빨갱이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성격보다는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하상칠의 사례는 이것들이 개인의 의식에 어떻게 각인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우선, 권력의 보복에 대한 공포증이다.

315의거 당시 부정선거라는 권력의 부당한 행위에 저항권을 행사한 시민들에게 공권력이 가한 폭력과 보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증언록(2010a)을 보면 기자는 물론 구경꾼이나 시위에 참가한 가족을 찾아 나선 사람 등 시위와 전혀 무관한 사람까지 무차별로 연행해갔고, 그들 중 다수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거나 악랄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반병신이 되거나 평생 동안 지병으로 고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난사하거나 심지어는 도망치는 시위자들을 뒤쫓으며 뒤에서 총격을 가했고(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남아 있는 사람 키 높이의 총탄 흔적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315의거 당일 밤과 그 직후 며칠 동안 마산 시내 분위기는 무차별 검문검색, 가가호호 가택수색, 보복적인 검거 선풍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당시 경찰은 물론 정부도 315의거가 빨갱이 소행이거나 적어도 북한 오열(간첩)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저지른 일로 간주했다.

빨갱이나 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불온문서를 시체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작태나 피검자들 중에는 사주 받았다는 자백을 하라며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이 부지기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상칠은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 해나온 포로였었기 때문에...”(증언록, 478)라고 진술하듯이 자신이 검거되면 반공포로 경험이 빨갱이 조작 빌미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그날부터 며칠 동안 가위에 눌렸다고 증언할 정도다.

이러한 빨갱이 트라우마는 단지 하상칠의 경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 그리고 반공독재 치하를 겪은 한국인 모두에게 많건 적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적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빨갱이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0년 경 마산시내에서 가족과 함께 / 가운데가 신을순 여사. 하상칠 선생의 팔장을 낀 이가 둘째 딸 하효선 시네아트 리좀 대표>

 

이러한 빨갱이 트라우마는 하상칠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행동이나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다.

우선, 그는 그 오랜 세월 동안 315의거 참가는 물론 반공포로 경력에 대해서도 가족에게조차 거의 완벽하게 비밀로 유지해왔다.

다음, 혹시 있을 수 있는 의심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경력을 세탁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필자에게 상당한 후원금을 내고 경우회 자문위원이 된 것은 의거 참가자나 빨갱이로 의심받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경우회 회원이라면 시위 가담자로 의심받거나 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사상까지는 의심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얼음상인조합 결성을 주도하거나 경남인조빙판매조합장 등을 역임한 것도 이러한 경력 세탁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1960315일 이후 그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단체에는 일체 가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벌이에 신경 쓰고, 직업 관련 이익단체에만 관여하고, 자식 교육 시키고, 집안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정치적으로 주목받을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극우 보수주의자로 처세했는데, 이 역시 자기 위장의 한 술책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처럼 사회와 역사가 하상칠이라는 개인에게 각인시킨 공포와 트라우마는 반세기나 지속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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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가 위험한 시위에 가담하지는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한 대답이 주어진 적이 없는 까닭은 참가자 개개인에 관한 탐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최초로 왜 하상칠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상칠의 경우 가장 궁금한 것은 315의거 당시 세 명의 자식을 가진 35세의 가장이었고 잘 나가는 얼음 판매업자였던 그가 왜 그토록 위험한,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잡혀서 거의 병신이 되거나 아니면 빨갱이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는 상황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는가라는 의문이다.

당시 경남도경 수사과장 김경술의 국회조사단 증언(증언록, 674)에 의거해 경찰에서 취급한 사건 관련자를 직업별로 구분해보면 232명 중 중고학생이 58, 무위도식하는 무직자가 50, 나머지 절반이 넘는 사람은 직공이거나 소규모 상인이었다.

요컨대 참가자의 다수는 창녀, 거지, 소 가게 직원 등과 같은 사회 하층민들이었다. 이러한 참여자들의 사회적 구성에 비추어볼 때 학생도 정치인도 실업자도 하층민도 아닌 사람이 시위에 적극 참여한 것은 희귀한 일일 뿐만 아니라 믿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가 부자 소리를 듣는 등 경제적으로 윤택한 중산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증언에서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하상칠, 2010, 478)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이처럼 높은 사회의식(정의감)과 참여의식(실천)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실마리를 찾아보는 방법밖에 없다. 예컨대 성격, 가족 구조, 가정 형편, 교육, 친구 관계, 직업, 사회활동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 오른쪽이 하상칠 선생>

 

하상칠은 초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고 서당 교육의 유무도 확인할 수 없어 학교 교육의 영향은 논외다.

역으로 그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식 교육만큼은 최대한으로 시켰고 수많은 조카들까지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재우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교육을 통한 개인의 신분 상승과 이로써 가문의 영광을 구현한다는 유교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어쨌든 그는 관직만이 출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자식이 정치와 행정이 아니라 학계나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거의 무관심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이는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체험한 권력의 무서움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작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한국인의 권력에 대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받은 가정교육이나 소년기와 청년기에 대해 뭔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생존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프로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어릴 때 지지리도 못 사는 속에서도 진양 하씨 가문이 간직한 선비 정신의 분위기 하에서 자랐다.

이것이 나중에 선비 가문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났고, 특히 오촌 당숙인 백촌 선생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받은 교육의 효과를 추정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해도 그가 자식들에게 제공한 가정교육을 통해 역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다.

자식들은 그가 불의를 보고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조모(조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자식 중 하나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삐딱한 행동을 해도 자식들 전부가 단체로 야단을 맞거나 벌을 받았다.

꾸중을 할 때는 반드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모순을 예로 들었다. 그래선지 자식들도 사회적 불의에 대해 공동 책임감을 느끼고 잘못된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입바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셋째 딸은 198020세 때 창동의 모 상인의 횡포를 알리는 플랫카드를 들고 단독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서에 잡혀갔고 부친이 와서 풀려난 적이 있는데, 큰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하느라 고생했다며 칭찬을 들었다며 그때 아버지가 엄청 존경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친구 면에서 그의 성격이나 행동거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315의거 이전의 친구 관계는 전혀 알 도리가 없고, 92세로 장수해서 사건 이후에 사귄 친구도 이젠 찾기 어렵다.

사회 활동으로 얼음 판매업계 회장, 종친회 회장, 노인당 회장 등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조직의 장을 맡았다는 경력이 그가 무학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리더십과 불편부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가족들이 아는 한 그는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 정치적 색채를 띤 활동을 한 적이 없다. 315의거 참가 이후 그는 자신의 활동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모든 정치 관련 활동에서 의식적으로 멀리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경우회 자문위원 위촉은 의거 참가 이후의 일인데다 이 또한 의거 참가나 사상을 의심받지 않기 위한 보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이는 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용의주도하게 대처하는 성격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가족들은 그가 평소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언행을 일관되게 해왔으며 특히 전라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한다.

그의 반 전라도 감정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에 친하게 지내면서 잘 대해주었던 전라도 출신의 한 동료 포로에게 배신당한(자신의 돈까지 들고 튐) 경험과 나중에 마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전라도 출신자들과의 접촉에서 겪은 경험의 소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국가관이나 공동체 의식(의무감)과 관련해서는 약 3년간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반공포로 경력도 완벽한 비밀로 유지해왔기 때문에 거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들려줄 사람이 아예 없다.

그러나 당시 포로들의 생활과 거기서 벌어진 유혈 사태들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포로수용소는 훌륭한 정치 및 이데올로기 학습의 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친공과 반공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사상 투쟁을 보면서 국가와 민족, 정치와 이데올로기, 공동체와 사회적 정의, 옳고 그름의 분별, 이데올로기의 실천 등에 관한 나름의 의견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형성했을 것이다.

단지 처 신을순은 그가 다른 포로들에게도 반공포로로 분류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가 박정희 개발독재에 친화성을 보였지만 박근혜 국정 논단 사건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반공, (개발)독재 등 한국 보수주의의 핵심가치를 지지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 정의(법치와 법의 준수, 절차적 민주주의의 존중 등)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사고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반한 부정선거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선거 무효를 위한 개표 저지 활동은 선비 정신의 구현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뿌리와 가문을 중시하고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선호했던 보수주의자이면서 불의를 용인하지 못하는 하상칠의 성격은 정의 실현과 원칙 준수가 보수와 진보를 넘어 한 사회를 유지케 하는 공통의 기본가치임을 잘 보여준다.

당시 그는 마산의 도심 유흥가 업소들을 주 고객으로 얼음 소매업을 적어도 5년 이상 해왔다. 지방 도시의 도심 유흥가는 정재계를 비롯한 각계의 지역 유지들 사이에 정보 교환과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도 그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많은 부정부패의 현장을 보거나 관련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감과 저항심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유력한 상인이 되려면 편의주의(편법 활용), 보신주의(신상 안전)와 기회주의(이익 우선)를 키웠을 법한데 그는 달랐다.

상당한 부를 쌓았음에도 부동산 재테크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후회하는 말을 한 적도 거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땀 흘리지 않고 얻은 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그의 남다른 정의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공로자 심사에서 탈락한 후 줄기차게 재심을 요구하면서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진정서를 보냈으며, 면담은 못했지만 직접 보훈처장을 만나기 위해 본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노인의 아집이라기보다는 목적 달성을 위한 집요함과 공적에 대한 강열한 인정 욕구를 보여준다. 이는 달리 보면 그의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삶의 편린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의 시위 참가가 개인에게 체화된 강렬한 정의감에 기인하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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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의 거시 사회사적 분석에 미시 문화사적 분석을 부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신을순과의 결혼식 사진 / 1953년 가을>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마산 315의거를 다룬 문헌들에서 왜 마산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빈번히 제기되거나 다루어져왔다. 315의거 학술논문총서에 실린 많은 글들도 이 질문을 예외 없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압, 원조경제의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곤란,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획책 등 대동소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표출 강도는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산 지역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해 유혈시위가 발생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논자에 따라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으로 또는 지역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치, 경제, 사회 및 역사적 요인으로 나누어본다. 요컨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요인은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며 이 글의 목적상 사회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요인들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뒤이은 개인적요인의 검토를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마산 지역은 조선 말기 개항장이자 구미 열강의 조차지로서 근대 문물에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떴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정부운동 등 사회운동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일본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충돌도 첨예했기에 일반인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강만길(1999)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마산인의 진취성과 저항성을 키워왔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6.25전쟁 기간의 피난민 중 상당수가 마산에 정착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난민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날품팔이, 고아, 부랑아 등 최하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구의 사회적 구성상의 특징에 주목한 이은진(1998)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곤란,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형성이 지역사회의 유동성과 급진성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경제면에서 마산은 1950년대의 수입대체 기반 경공업화 과정에서 상공업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던 만큼 동 연대 말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불황(서익진, 2000)의 여파가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등 시민의 경제적 불만도 상대적으로 더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정치적으로 민주당 허윤수 국회의원의 변절(자유당 입당)이 미친 다면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은 허윤수와 자유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에게는 충성경쟁으로 부정선거 획책을 위해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과 반공청년단까지 대거 동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상대적으로 선명성이 강한 신파 세력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게 만들어 의거의 발단이 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선거포기 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조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이은진, 1998).

 

이러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315 선거일 직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가히 폭풍전야의 상태였다고 평가된다(홍중조, 1992: 108).

지역의 정보나 소문이 집결되는 도심(번화가이자 유흥가)에서 장사를 하던 중년의 하상칠은 이러한 시내 분위기나 민심 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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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72114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원본>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 녹취/2010107)

 

나는 19603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을 본 후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35세로 얼음소매상을 하며 마산시 산호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투표권이 있었으며, 내가 어느 당을 찍고 어느 입후보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인데 왜 선거에 개입해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관여를 하고 위협을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컸고, 그래서 이 선거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투표함이 집결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정남규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후 내 머리에는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 민주당원들을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가 더해 갔다.

나는 부림시장을 지나 시청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섰다.

630분경 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지프와 소방차 등을 배치, 방어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몰려들었.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정선거 개표가 시작되고 있는 마산시청을 점령하기위해 수차례 전진 후퇴를 계속했다. 경찰은 우리를 막기 위해 공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 그곳을 피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근처 길가 무릎높이의 하수구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경찰 쪽으로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그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멀리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얼굴이 노출되어 데모주모자로 잡히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기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시민들은 이제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투석전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나는 데모 군중들과 함께 시청 쪽으로 가서 투석을 하다가 경찰이 총격을 가해오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총소리를 피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뒤 법원 골목 어딘가에 있을 때였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달려오면서 "저 총 맞았어요. 총알이 제 팔을 관통한 것 같아요" 했다.

살펴보니 다행히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총을 맞은 학생을 보고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이제 정말 전쟁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청 앞에서 투석전과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총소리가 시민들을 물러나게 하는 공포사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우리들 심장을 겨누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사격을 가해오는 경찰들의 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적개심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총상을 당한 학생을 살펴본 후 치료를 권유하며 가까이에 도립마산병원이 있음을 알려주고, 나는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투석전을 계속하며 자산동 쪽으로 이동해 나왔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중과부족으로 점점 자산동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때 소방차 한 대가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인지 마산시청에서 자산동 쪽으로 달려왔다.

자산동 무학국민학교를 조금 지나 지금 경남데파트가 있는 곳 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것이 벼락 치는 소리나 대포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는 총이 아니라 아예 시민들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일까 생각하니 전쟁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빛이 확 하고 번지며 온 천지를 밝혔다.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설명하는 걸 들으니 북마산파출소에 불이 나 불 끄려고 가던 소방차가 데모대의 돌 세례를 맞아 그만 전봇대를 들이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연이어 아름드리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간이 8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정말인가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그 현장을 보았다.

정말 세 동강이가 난 전봇대가 큰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넘어진 전봇대를 옮겨 일단 길을 막도록 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당시 나는 크고 무거운 얼음 판매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힘이 꽤 좋았다. 따라서 전봇대는 내가 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고 당기며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동강난 전봇대를 무학초등학교 앞길에 가로놓게 함으로써 길을 차단해 경찰의 접근을 막고 또 데모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땅에서 줍지 말고 철길에 있는 자갈을 사용하자고 말하면서,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로 올라갔다. 학생들에게 돌은 함부로 쓰지 말고 일단 차들이 철길 밑을 지나갈 때 뒤를 보고 퍼붓자고 시켜놓았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예상한 것처럼 조금 있으니 선거함을 실은 차가 북마산 지역에서 성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시청 쪽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다가 왔다. 그 차 안에는 모자를 눌러 쓴 4~5명의 경찰이 타고 있었고, 선거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듯 했다.

그 시간으로 봐서 아마 마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개표를 위해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함을 실은 차는 시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철길 밑을 통과하자 철길 위에서 우리가 퍼붓는 돌 세례에 다급히 차를 되돌려 도망쳤다.

우리들이 던진 돌 세례를 피하기 위해 선거함 뒤로 숨거나 선거함을 뒤집어쓰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0여 분 후 9시경이 되었을까, 또 지프 한 대가 다가왔다. 형상으로 보아 좀 높은 사람들이 타고 또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차를 향해서도 돌 세례를 퍼부었으나 덮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 투석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내 바리케이드 앞에 다가와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곧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시 조금 지나서 차가 한 대 현장에 도착했다. 세히 보니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이 차도 바리케이드로 인해 더 이상 가지못하고 다른 차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머물러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철둑에서 내려와 보니 젊은이들이 달려들어서 벌써 총을 모두 뺏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유혈 사태로 갈 우려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우리가 대치하는 원인과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군인들이 무조건 명령에 움직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으로 간주하여 가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정신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먼저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렇게 항거하는 것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인데, 너희들이 만약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명령이라면서 총을 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 젊은 너희들은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렇게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총을 잃고 가면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총은 돌려주겠다. 여기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너희 부모와 형제들이다. 록 군복을 입었어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며 빼앗았던 총을 돌려주었다.

군인들은 "고맙습니다" 며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군인들을 돌아가게 했을 때, 시청 쪽의 총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드디어 우리 가까이서 총을 쏘아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들 심장이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숨어 대항해보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없이 어둠 속에서 무학초등학교 담을 넘어 철길을 따라 겨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경찰들은 데모대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날뛰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옷이 물에 빠진 듯 젖어 있고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가 나를 기억할까 너무도 두려웠다.

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자라면서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선두에 서서 사태를 주동한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위해를 가해올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때 셋째 딸을 갓 출산했었고,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렇게 건장했던 몸이 사흘 동안 어깨와 팔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잠을 자면 온 몸이 가위에 눌리었고, 정말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에 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당시 실제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붙잡히면 혹독한 벌을 받았으며, 공산당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연일 이어졌다.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였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처벌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날 밤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간혹 세상이 달라지는 듯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음속에 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고 모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밤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3·15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하상칠이 참가했다고 증언한 3 15의거 당일 시청 앞 야간 시위는 3 15의거의 백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그의 증언 중 이미 확인된 사항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의 증언으로 새로이 밝혀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시해두고자 한다.

그는 오후 6시 경 집을 나와 시청으로 가던 중 오동동빠 근처에서 정남규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것을 (증언록, 474) 보고 선거무효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시각에 정남규는 민주당원이 주도한 가두시위 중 오후 3시 반경에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음은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므로 다른 사람을 착각했음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시각에 오동동빠 근처에서 누군가 연행되었다는 증언은 우리가 알기에 다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기에 사실이라면 최초의 언급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증언 중 유일하게 사람이나 시간 또는 장소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항인데 사건 후 50년이 지났고 85세 노인의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후 8시쯤 지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동강이 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소방차가 북마산파출소 화재 진압 차 출동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다수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북마산파출소 화재는 930분경으로 알려져 있고, 시청 앞 도로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경찰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살수를 하던 여러 소방차 중 하나가 갑자기 데모군중 쪽으로 돌진해왔다는 것이고, 이 돌진의 이유가 운전수의 돌발 행동인지 지휘자의 지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3 15의거사』 300쪽에 살수를 하면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 중 하이라이트는 첫째 동강난 전신주를 직접 옮겨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트를 친 것, 둘째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 위로 올라가 이 길을 통과하려던 두 대의 차량에 투석해 되돌아가게 만든 것, 셋째 마지막으로 세 번째 차량을 타고 온 군인들에게서 시위대가 총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이들을 설득해 총을 되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에게는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설득해 유혈사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요지의 진술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거의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소문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참가했거나 옆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사건 중 두 개가 국회조사단 앞에서 도경수사과장 김경술의 증언 속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권종림은 ... 9시 경 무학초등학교 앞 노상에 쓰러져 있는 전주로서 국도를 차단하고 동시에 박주복은 구한오를 지휘, 구마산 방면으로 통과하는 쓰리코타 운전수인 육군502 장거리 통신대 마산 파견대 소속 상사 이재중을 구타하여 동 인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 일정을 탈취하고 실탄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본인에게 반환하고..., 구한오는... 오후 9시경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군 쓰리코터에 대한 투석사건에 가담하였고 군인 이재중의 총기를 박주복, 정상숙과 같이 탈취했다가 반환한 제정수(시당 감찰위원)... (315의거 증언록, 676)'이라고 말했다.

김경술의 증언은 경찰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당시 경찰은 빨갱이의 소행이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여기서 지목된 각 사건의 행위자를 실제의 행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들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증언은 이들 사건에 대해 시위 참가자 측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세한 전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사기록과 모든 증언을망라한 면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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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언 등 이른바 비 사료들을 활용해 가능성의 역사를 최대한 기술하고자 하는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했다. 또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과 증언을 제시한 후 증언에 내포된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논문의 대상이 된 이(하상칠)의 증언은 당일 시청 앞 야간시위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결과적으로 도시사적 가치도 크다.

이 논문은 인문논총46(2018. 6)에 게재되었다.

 

<목 차>

. 머리말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2. 녹취와 증언록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가

. 맺음말

 

 

. 머리말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매우 개인적인 것임을 밝혀두고 싶다. 2010년 초 어느날 85세의 어르신 한 분에게서 3 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는데 늦게나마 이 사실을 밝히고 3 15의거 유공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고백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 아닌 필자의 장인으로서 필자가 아는 한 그런 중대한 사회적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장 3 15의거기념사업회를 찾아가 공식적인 증언을 하도록 주선했고, 이 녹취록은 그 해 2010년 말에 발간될 예정이던 『3 15의거 증언록: 1960,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이하 『증언록』)에 수록되었다.

그의 증언 내용은 그동안 3 15의거 당일 밤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누가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소방차에 부딪쳐 세 동강난 전봇대를 옮겨 바리케이트를 친 일이나 경찰의 증언 속에만 나타난 총기 탈취 사건 등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것이어서 그의 증언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큰 것으로 보였다.

녹취 때 증언을 직접 들었던 3 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당시 회장은 소문으로만 듣던 일의 장본인을 만났다 는 감회를 숨기지 않았고, 경찰과 시민이 총격전을 벌이는 내전 같은 상황을 사전에 방지했다 며 치하해마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언이라도 객관성이나 진실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특정 개인의 증언이 주장하는 활동이 논문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방법을 모색하던 중 역사학에 개인의 생생한 삶의 탐구를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미시사 방법론과 구술사 방법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이 방법론을 다루는 데 있는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는 이 방법론들의 특징을 간략하나마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채택한 연구 방법론의 타당성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먼저, 역사학 분야의 미시사(micro-history). 곽차섭(2017a, 미시사 방법론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역량은 물론 본고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곽차섭(2017a)을 참조할 수 있다)이 편집한 책에 실린 여러 미시사 연구자들의 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를 대상으로 특이한 행동을 촘촘히 기술함으로써 역사적 리얼리티를 추구함과 동시에 일반적 해석의 길로 나아간다.

둘째, 관찬자료만이 아니라 미약한 증거력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료로 인정되지 않던 일기, 수기, 증언 등 사적인 자료도 사용하고, 계량적 방법보다는 질적 방법을 사용한다.

셋째, 구체적인 개인의 실명을 사용하며 실명들 간의 관계를 추적해 기존의 사회사가 포착하지 못한 틈새를 포착한다. 사회사가 역사를 주체 없는 과정으로 만든다면 미시사는 실명의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추적해 주체가 살아 있는 생생한 사건이나 역사를 기술한다.

넷째, 이러한 이유로 이야기체(story)로 가능성(possibility)의 역사를 서술한다(‘가능성의 역사’란 증거의 단편성이 문제될 때 증거와 증거를 잇는 최선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긴즈부르그-2017a 2017b-의 추론적 패러다임 이나 실마리 찾기 방법이 대표적이다. 그랜디의 이례적 정상 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으로서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비정상으로 보이고 사료의 양적 측면에서는 이례적으로 보이는 하층 종속 계급의 목소리가 행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정상이라는 입장이다-곽차섭, 2017b, 31).

끝으로 다섯째, 단순한 작은 이야기라는 비판에 대해 미시사적 스토리를 거시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창(window)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미시사 방법론은 3 15의거와 같은 중대한 사회 현상을 다루는 사건사(생활사, 지역사 등과 함께 미시사가 적용되는 주요 분야 중 하나)에 더욱 잘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우리의 연구는 특히 개인의 증언이라는 구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미시사의 일환을 이루는 구술사(oral history) 방법론에 대해서도 간략하나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구술사 방법론은 양적이 아니라 질적 방법론으로서 문자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유용한 접근방법론이지만 주민과 지역, 여성, 장애인, 노인, 빈민, 월남인 등의 연구에도 널리 쓰일 수 있고, 그 약점은 양적 분석이나 문헌 분석으로 보완될 수 있다(김귀옥, 2000; 윤택림 외, 2006). 그리고 문서가 아닌 증언 등을 바탕으로 한 구전사나 구술사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일제의 위안부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의 증언 없이 생생한 역사를 복원할 길은 없다(곽차섭, 2017b: 35).

이 글은 이러한 미시사와 구술사의 방법론을 사용해 하상칠이라는 한 개인의 3 15의거 참가 증언과 그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3 15의거라는 거대한 사회적 사건을 특정 개인의 활동이라는 창(window)을 통해 재조명해봄과 동시에 역으로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왜곡시켰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장에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을 제시하고 그의 증언 녹취물을 『3 15의거증언록』에 수록된 그대로 전재한 후 증언의 내용에 대해 나름의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 장에서는 그의 증언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두 가지 의문을 다룬다.

첫 번째 의문은 그는 왜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적극 참가했던가 라는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사회적 요인뿐만 아니라 개인에 고유한 요인도 최대한 살펴본다.

이어서 그는 왜 무려 50여 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증언을 하겠다고 나섰던 것일까라는 두 번째 의문을 다루는데 이를 통해 사회적 맥락이 개인의 삶과 생각에 미친 영향을 추적한다.

끝으로 장에서는 우리의 논지를 요약하고, 이 글의 한계를 지적한 후 향후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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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출소를 에워싸고 투석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극장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자 힘을 받은 듯 더 격한 고함들을 쏟아 뱉으며 돌질을 하기 시작했다.

<3.15의거 시위 중인 마산 시민들>

 

남성동은 중심지라 당시에도 그 도로들엔 포장이 되어있어 많은 돌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우리가 서서 구경했던 이학골목(그 골목 한 곳에 이학이란, 당시로선 고급 일식집이 있었다.)과 맞은편 세신양복점 골목의 상황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골목을 다니면서 주운 돌을 치마에 싸서 날라다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다투어 앙칼지게 부르짖었던 소리도 지금까지 귀에 쟁쟁한데,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야 이 도둑늠들아 내 포 내나라였다. 그날은 그들의 실체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민주당 여성당원이었다.

‘내 표 내어 놓으라는 말은,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유당원들과 공무원들의 주도 아래 3인조 또는 5인조로 조직되어, 조장의 인솔아래 투표소로 들어가서 종장의 감시 아래 공개투표를 하게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 편입시킬 수 없으니까, 투표통지표를 이들에겐 아예 보내지 않은 데 대한 항의라는 것도 알았다.

돌팔매질은 점점 잦아가고 정문 접근자도 많아져 가던 상황이 한참 진행될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놀라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파출소 옥상에서 화약 불빛이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흩어지며 일부는 더 흥분되어 날뛰는 모습이 보였는데, 총소리가 난 지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세신양복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나는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쪽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이어 파출소 문 쪽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는 곧 그쳤다. 친구와 나는 어떤 적극적 행동도 없이 우물거리며 사람들 쪽으로 쓸려 다녔으니 사람이 죽었는 지 어쨌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

가서 보니 그곳에도 이미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쪽엔 남성동에서와는 좀 다른 양상이 있었다. 구마산역 쪽에서 보니 파출소가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주위에 집들이 적어 접근이 쉽지 않아 돌 던지기가 어려웠던지, 좀 색다른 방법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구마산역 입구에서 파출소쪽으로 꺾어져 십여 미터 가는 곳에 돌공장이 있었는데(목재소도 있었는지?) 거기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밤일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추워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몇 명 청년들이 어디서 깡통을 주워와 밤일 현장에 땔감으로 쌓아둔 톱밥과 대패밥 등을 담아서 불을 붙인 뒤, 그 깡통을 새끼줄에 매어 원을 그리며 휘둘러서는 파출소로 향하여 던지는 장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개는 파출소 벽 밑에 떨어지거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안에서 되던지는 장면도 보였다. ......

이튿날 어머님의 만류로 시내에 나가보진 못했으나 대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열 명 이상 죽었고, 특히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면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총을 난사하며 나오는 통에 그 앞에서 제일 많이 죽었다고 했다.

<3월15일 밤 경찰이 쏜 총에 생명을 잃은 김주열. 사진은 4월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열사의 시신>

 

나는 파출소 화재가 어제보았던 그 깡통불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이상 『상식의 서식처』>

추기 :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신념이고, 그 신념을 정치로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가 선거다. 그런데, 이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뜻에 반해 나라를 침략자 일제에게 갖다바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소위 사이비 보수집단이 민의를 따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선거로선 집권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를 이어 부정선거를 관습으로 삼아왔었다. 3,5인조선거는 박정희에 의해 릴레이선거로 발전해 왔는데, 그건, 앞사람의 기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가지고 나와 검표자에게 보이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또 그렇게 가지고 나오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소문이 나 시끄러워지니 박정희 전두환은 아예 체육관에 꼭두각시들 모아놓고 하는 소위 체육관선거로 권력을 찬탈했다. 노태우는 전국 유세장을 투석장으로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고, 이명박 박근혜는 댓글부대를 만들어 민의를 조작하고......

그래서 역대 소위 보수당 집권자 7명 중 2명은 쫓겨났고, 한명은 심복한테 살해되었고, 한명은 사형 또 한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두 명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보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참보수(김구, 장준하 등)를 살해하고 보수를 참칭해온 결과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작년 10월 16일부터 매주 게재해온 창원미래연구소 박호철 이사장님의 글 「기억을 찾아가다」 25편은 오늘로 끝냅니다.

마산 봉암동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부터 자유당의 암울했던 혼란기에 보낸 중,고 시절 이야기까지 1950년대 마산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한 회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송고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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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7) -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10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학우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대학생연합회에 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익히 알면서도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일 입니다.

 

197910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명의 학생들은 어느 대학생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와 나가자!”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민주회복’, ‘학원자유’, ‘독재타도’등의 구호가 뒤따랐다.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마산지역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 모순의 중심, 마산-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영구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철저한 사회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은 비약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통령 선출은 국민 직선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6년으로 연장시키는 동시에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하여 영구집권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체제의 안정, 정권의 안정이라는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70년대 박정권의 독재를 가능하게한 것은 긴급조치였다. 9호에 걸친 긴급조치는 각종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1975년부터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온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하면서 침묵하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긴급조치에 해당하는 내용은 광범위하였다.

유언비어의 날조와 유포, 학생들의 불법집회·시위·정치간섭행위,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는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유신헌법 아래서의 정치질서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마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말로 합리화했다.

이 개념은 국민대중에게 광범위하게 교육·선전·계몽됨으로써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중들의 반독재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편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극단적 기아를 추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도성장이라는 미명아래 빈부격차는 확대되었고,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높아만 갔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 1979년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최소한의 생존권 조차 보장받지 못한 민중의 불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마산지역 또한 1970년대의 한국사회가 지닌 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마산·창원지역은 산업화과정에서의 한국경제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지역이었다.

1970대 초부터 수출자유지역, 창원기계공업공단 등의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면서 상공업도시로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농촌지역의 노동력이 대량 유입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저임금구조를 유지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층과 생활의 터전을 확보하지 못한 도시빈민층이 확산되었다.

1979년의 불황은 이 지역에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경기침체에 따라 휴업, 폐업, 노동자 감원, 조업단축, 임금체불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체불, 실직자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노사분규는 급증했다.

이것이 마산지역에서의 항쟁이 노동자가 적극 참여했던 원인이었다.

<항쟁 당시의 신문 보도(1979. 10. 21)>

 

-초기 시위 주도했던 대학생들-

경남대학을 빠져나온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쪽으로 진출했다.

오후 53·15의거 탑 주위로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시위 경험이 없던 학생들은경찰의 제지를 뚫을 수 없었다.

오후 7시무렵 시내진출, 수출자유지역 진출과정에서 저지·해산된 200여명의 학생들이 창동네거리로 몰려 들었다.

마산의 중심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일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고 최루탄이 터지자 주위의 군중들도 자연스럽게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중들의 수는 불어나 학생의 비율은 줄어들고 행동의 주도권은 학생에서 시민대중의 손으로 옮겨갔다.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화당사로 가자”라는 선동에 산호동 공화당사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공화당사는 파괴되었다.

양덕동파출소, 산호동파출소가 불탔다. 북마산파출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시위는 19일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시위대의 습격으로 파괴된 마산 산호파출소>

 

시청, 파출소, 방송국 등의 공공건물에는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장갑차와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정부는 마산지역의 항쟁을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왜곡하면서 재발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언론은 그날 밤의 일을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19일 저녁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시내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관제언론의 상징인 MBC방송국과 경남매일신문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시위군중들은 통금시간이 지난 11시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하다가 경찰과 군인의 진압부대가 총공세로 나오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20일 새벽까지 시위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전날과는 달리 대학생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주로 10대후반, 20대초반의 실업자, 노동자들이었으며, 고등학생들도 많이 가담했다.

20일 정오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민중들의 의로운 반독재 투쟁은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되었다. 그렇게 민중들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항쟁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국을 향해 치닫던 국내정치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1026일 유신독재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마산 시위에서 발견된 사제소총. 경찰은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민중의 참여로 이어지고-

항쟁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됐다.

물론 그 전부터 은밀히 시위가 계획되고 있었으나 16·17일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시작되자 당초 예정됐던 22일의 경남대생 궐기계획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이다.

항쟁의 불길은 대학생들이 붙였지만 그 이후의 거리시위는 노동자와 점원, 상인 등 일반시민이 주도했다.

실제로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재판을 받46명의 직업을 보면 노동자가 21명으로 가장 많았고, 자영업자 4명, 실업3명, 학생 18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민간재판에 회부된 구속 학생 5명을 포함하면 대학생의 수는 23명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명단이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연행자 454명은 대부분 일반시민들로 추정되고 있다.

항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적극적, 공격적인 참여자라 할 수 있는 연행자, 검거자 중 대다수가 민중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일반인들이었다는 점은 항쟁의주체가 누구였던가는 명확하다.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는 1979년 상반기에 휘몰아친 제2차 석유파동과 정부당국의 부가가치세제 강행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으며, YH사건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이 노동자들에게는 또다른 생존권의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항쟁의 주체는‘유신대학’이라는 오명 속에 분노를 삭여온 대학생들, 왜곡된 경제구조 속에 생존을 위해 허덕이던 민중들이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이 적극 호응해 투쟁의 질을 높였다. 

<1999년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마산 서항 근린공원에서 관계자들이 기념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

항쟁은 끝났다. 아쉬움도 컸다.

민주 변혁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은 확인되었지만 변혁운동으로서의 지향으로 정립되지 못한 채 지배집단의 물리적 대응에 쉽게 굴복했다.

어떠한 사회운동도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집단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적 전망, 실천적 행위가 통일되지 않을 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커다란 교훈이었다.

폭발된 민중들의 힘을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한계였다.

전국 차원의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마산·부산 지역에 그쳤다는 것도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마산·부산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내부 분열로 치달았고 10·26에 의하여 그 막을 내렸다.

10월의 부마항쟁1970년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의 정점이었으며, 1980년대 5월의 광주항쟁과 함께 한 단계 질적으로 진전된 민족·민주운동의 모태였다.

그리고 항쟁은 마산시민에게는“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자부심을 다시 한번 심어줬다.

3·15이후 처음으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한국 민중들의 지향점인 민족적 자주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현실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10·18마산민중항쟁은 3·15 의거와 함께 우리 마산시민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있다-휴화산 속에 끓는 마그마가 간직되어 있고, 마른 개천 아래 복류천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이라했던 어떤 이의 예측은 19876월항쟁으로 분출됐다.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기득권층의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한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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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4.09.16 20:2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가심이 뛰네요.

    • 허정도 2014.09.18 22:4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잘 계시죠?

2014.09.0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6) -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9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마산의 봄은 산등성이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의 붉음 만큼이나, 부정과 불의에 저항했던 정열에 불탔던 계절이다.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를 쟁취했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마산의 지역민들은 항상 그 앞에 서 있었다.

3·15는 분단된 남한, 그 민주화의시작이었다.

1960315일 정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마산에서는 적어도 4차례의 시위가 목격된다.

314일 밤 민주당사 앞에서 일어난 시위, 315일 선거 당일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마산시 전역에서 진행된 시위와 총격발포 사건, 315일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411일 바다에 떠오르자, 이를 보고 격분한 군중이 이날 밤에 치열한 시위를 벌이고, 경찰이 총격을 하는 사태와 이어서 통행금지 중에도 일어난 412일과 413일의 시위, 마지막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물러날 의사를 표명한 후인 426일과 27일에 부산에서 원정 온 경남고교 학생들과 군중들이 시청, 소방서, 경찰서, 파출소 등을 파괴한 시위가 그것이다.

 

-“못살겠다, 가라보자”-

1960314일 저녁부터 밤까지 오동동에 소재한 민주당사 앞에서 적게는 1백여 명에서 많게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 민주당의 마이크 유세를 듣는다.

민주당은 당사 옥상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자유당의 폭정을 비난하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군중들이 ‘협잡선거 다시하자’, ‘조병옥만세, 장면만세’를 외친다.

이에경찰이 등장하고, 경찰에 대해 모자를 빼앗아 던지기도 하고, 경남관용 290호 짚차와 공군 81항공창 본부 12호 짚차에 돌팔매질을 하고, 정복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기에 반공청년단이 들이닥치고, 경찰은 폭행용의자를 연행한다.

이에 군중들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 ‘협잡선거 물리치자’라고 외치면서 석방을 요구한다.

이 때 민주당원들은 피해를 변상조치하고, 군중들의 시위를만류하여, 일단귀가한다.

<위, 부전선거 자료들 / 아래, 3.15 시위 광경>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일인 이날은 오전 7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하고, 민주당의 투표 참관인이 참관을 하지 못하고, 투표를 한 사람들도 투표함에 이미 투표용지가 사전에 들어 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자, 마산시민들은 하나 둘, 무엇인가 촉발요인만 있으면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오전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거부를 선언하고, 이어 대외적인 방송을 시작하고, 시위를 준비한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은 하나둘씩 마산시당 사무실 앞에 모이고, 이어서 남성동, 오동동 파출소, 그리고 북마산 파출소를 향해 나아가면서 돌팔매질을 한다.

경찰과 반공청년단은 주동자들을 연행하면서 곤봉, 칼빈총, 몽둥이를 이용하여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더욱 강하게 밀려나오면서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시청방향으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오후 5시경 소방서 차량에서 빨간물을 뿜어대기 시작한다. 낮시위는여기에서 끝나고 거리는 조용해진다.

그러나 오후 6시경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될 예정인 마산시청 앞에 군중들이 다시 하나 둘 모인다.

밤 시위는 무산층의 젊은이들이 주축을 이룬다. 젊은이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어른들이 시위에 나서도록 설득한다. 물론 젊은이들중 대부분은 학생들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여학생이었다.

315일에 총상을 입은 41명중 10대가 반 이상을 차지하며, 반 정도는 학생이고, 반 정도는 무직자 내지 육체노동자들이었다. 경찰과 경찰을 상징하는 파출소, 반공청년단이 시위대의 일차적인 공격대상이었다.

1960315일 마산의거가 일어난 지 27일 만인 411일에 마산시민들은 다시 한번 일어난다.

 

<눈에 최류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315일에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살해된 김주열 군의 시체가 중앙부두(지금의 대한통운 앞바다)에서 오전 1030분 경에 발견되고 참혹한 김주열 군의 시체 모습이 경찰에 의해 신고되어 감추어지기 전에 이미 촬영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에 대해 소문이 나, 삽시간에 마산바닥에 소문이 퍼져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에 모이게 된다.

너무나도 많이 모여든 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경찰은 공개를 결정하고 이를 보여준다.

김주열의 시체모습을 본 시민들은 모두 그 잔혹함에 눈물을 흘리며 밤시위를 벌이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김주열의 참혹한 시체는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경찰들이 자행했던 고문과 주민 살상의 한 일각이 보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315일 이후 실종된 자녀들을 찾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 그러나 경찰은 어린 자녀를 찾는 부모들을 좌익분자로 몰면서 오히려 구금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315일 의거를 좌익의 소행으로 몰려는 경찰은 마산의 이런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금하고 고문을 통하여 죄를 조작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무리한 조작은 마산주민들의 눈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만든다.

김주열의 시체는 바로 경찰의 잔혹함을 만천하에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좌익으로 몰려 숨을 죽이던 마산시민들은 굴종을 깨고 생존의 갈림길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날 시위에는 경찰서와 5개 파출소, 도립병원을 맴돌면서 진행된다. 412일에는 마산에 있는 7개의 고등학교 학생 5천여 명 중 대부분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도립병원은 개방되어 있고, 마산에 주재하는 2백여 경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경찰은 외지에서 도움을 받아 15백여명으로 증강된다.

오전 10시경에 마산공고생들은 마산역 광장으로 몰려오고, 창신고등학교 학생들도 뒤따르고, 오후 1시경에는 마산여고생들과 마산고교생들이 합류하고, 오후 2시에 마산상고생들이 김주열군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에 몰려든다.

12일 밤에는 경찰들이 경찰서에서 나오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마산시내는 이미 시민들이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증강된 병력과 낮의 밝음에 힘입어 13일 오전에는 도립병원을 막아서서 김주열 군의 참혹한 시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

이 날은 해인대 학생들, 마산여고, 성지여고 등이 조직적으로 결합하고, 중학생들도 시위에 나서고,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시위에나선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의사를 표명하고 이화장으로 이사를 간 날, 국회에서 하야를 권고한 날 저녁때 부터 밤 사이인 426일(화) 오후 6시부터 27일(수) 하오 1시까지, 부산 경남고등학교 학생을 필두로 한 약 2여 명의 군중이 마산에 원정을 와서, 폭력 시위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에 마산시 의회조사단이 발표(1960. 5. 3일자 마산일보)한 바에 따르면, 공공시설 및 차량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마산시청의 창문 유리가 부서졌고, 소방서도 유리창이 파손되었고, 경찰서는 유리창문이 파괴되었고, 신마산 파출소의 책상 등, 북마산 파출소의 유리창 등, 남성동 파출소의 유리창 등이 파괴되었다.

관공서 및 경찰 건물 외에도, 일반인들의 피해로는 트럭, 지프, 버스 등이 파괴되었다.

이날은 관공서의 공무원들도 이러한 파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권력 공백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안전만을 감안하여 행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후에 마산시의 서류 망실, 관리들의 무책임한 피신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3.15의거가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를 돕기 위해 성금을 보내왔다. 대구시민은 400만원을 모아 4월 18일 마산시장에게 전달한다>

 

-항쟁의 주체들-

민주당은 315일 낮 시위에서 중요한 촉발인자로 작용하였다.

그 이유는 민주당이 당시 부통령 후보를 내고 있었으며, 자유당의 사전투표, 선거 참관봉쇄, 민주당원에 대한 물질적 회유, 민주당원에 대한 투표권 거부 등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여 최초의 참여가 이루어졌다고 해석된다.

마산의 경우, 조직적으로 허윤수와 그의 일파가 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함으로써, 오히려 잔류한 민주당 세력은 더욱 강하게 조직적으로 뭉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주당은 315일 마산의거 당시에 신속하게 선거포기를 결정하고, 옥외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시위가 곧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었다.

항쟁의 중심은 학생들이었다.

마산에는 당시에 15여만 인구 중에 5천명 이상의 고등학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315일 의거 이전인 313일과 14에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살포하였으며, 14일 밤에는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의 시위에 참여했다.

더구나 선거 당일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번호표를 받지 못하고, 투표를 한 사람들도 투표함에 이미 표가 꽉 차 있다는 경험을 전해들은 학생들은 더욱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후 315일 오전부터 시작된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의 규탄방송은 학생들에게 모일 구심점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경찰들의 시위해산 종용방송, 민주당사 앞 시위자들에 대한 체포, 경찰과 반공청년단이 시위자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시위가 끝날 무렵 신마산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소방차가 붉게 물든 차가운 물을 뿜어대자 315일 밤 시위에서도 가장 열렬히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한 집단이 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숫자상으로는 아마도 시위자의 60~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발생한 낮 시위에서는 선두에 서기보다는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서서히 두려움이 가시면서 시위를 따라다니고, 어둠이 깔린 밤 시위에서는 적극적으로 구호를 따라하고, 욕설을 퍼붓고, 돌팔매질을 하는 집단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일부의 시민들은 병에 모래와 휘발유를 섞어 불을 붙여 던지는 간단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 무산층은 당시에 전체 마산시 경제활동인구의 20%에 달하는 실업자군을 비롯하여, 노동인구, 창포동에 소재한 귀환동포 수용소, 소규모 서비스 업체인 세탁소나 이발소 등에 근무하던 노동자, 신포동 철길 뒤의 매음녀도 등장한다.

물론 이들과 같이 거주하는 아주머니나 노인인구도 최후에 시위에 등장한다.

 

-독재정권이 무너지다-

315일과 411일에서 13일 사이에 일어난 마산의거는 결국 서울에서 419일 대규모 시위를 야기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의 하야가 곧 민주주의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독재권력은 무너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만들어 내었다.

이후 1979년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몰락과 뒤이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전두환군부 정권의 몰락 때 보여준 민중 항쟁의 씨앗이 바로 315일 마산의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 315일 마산의거는 한국민들이 생명을 바쳐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표출한 쾌거였다.

 

<독재자의 말로 / 파고다 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시민들이 끌고 다녔다>

 

산의거는 1948년부터 계속된 이승만 정권의 독재권력을 무너뜨림으로써 전 세계에 한국민이 민주주의를 쟁취할 자율적인 힘을 가졌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한국은 소위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여기에 마산시민들의 피를 머금고 민주주의의 장미가 꽃피어 났다.

이는 민주주의의 소생일 뿐 만아니라, 이를 통하여 전세계에 한민족의 소생을 선언한 셈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 체제가 부정되기 까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마산은 물론이고 한반도에 몰아 친다.

바로 315일 의거는 시대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시도에 물꼬를 튼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315일 마산의거는 통일, 계급모순, 민주주의 등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는 여러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마산은 항구의 도시인만큼 갖가지 사상이 유입되어 혼합되어 있었고, 시장이 발달하여 다른 지역과의 비교도 가능하고, 또한 근대적인 상인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해방후와 한국전 당시에도 6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퇴각, 일본에서의 귀환동포들의 유입과 정주, 한국전 당시의 피난민들과 이들의 정착지가 바로 마산이었다.

따라서 마산은 근현대사의 고민을 경험한 사람들이 제각기 정착하고 있는 도시였다. 이것이 마산의거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은진 /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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